- 2025 4 27 <무리를 먹이시고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
- 운영자 2025.4.27 조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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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6 : 1 - 21 | 개역개정
-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 20. 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25년 4월 27일 요 6:1-21, 무리를 먹이시고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본문에서 예수님이 두 가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앞부분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 5병2어 표적은 4복음서에 다 나오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또한 이 사건은 성경 안에서 가장 공개적이며 가장 많은 증인들 앞에서 행하신 이적이라는 것입니다. 뒷부분에서는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가신 이적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을 제외한 다른 복음서에는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12명의 제자들에게만 보여 주신 이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사건은 아주 유명한 사건이고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이 이루어진 시기가 유월절이 가까이 온 때입니다(4).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애굽 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유월절을 세 번 보내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한복음 2:13에 나오는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실 때 였습니다. 두 번째는 본문 이곳에서(요 6:4)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 였습니다. 두 번째 유월절 때에는 주님이 예루살렘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갈릴리에서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세 번째가 요한복음 12:12인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세 번의 유월절을 보내시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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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부터 보겠습니다(1-15,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처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낫게 해 주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자기의 역사와 아버지 하나님과 성경이 나를 증언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예수님이 유대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사역지를 옮겨가시게 됩니다. 1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라고 했습니다. 그후에는 예루살렘 근방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라는 말이고 그 다음에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사이 즉, 5장과 6장 사이, 달리 말하면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오신 사이에는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고 뿐만아니라 시간도 약 1년이 경과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유월절과 이듬해 유월절 사이였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을 통하여 이 사이에 있었던 굴직한 사건들만 보더라도 꽤 많았습니다. 백부장의 종이 치유가 되었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고, 폭풍을 잠잠케 하셨고, 군대 귀신 들린 거라사의 광인을 온전케 해 주셨고, 혈루증 여인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엄청나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근처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회적인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주님을 따른 것은 주님을 믿기 위함도 아니었고 또한 주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병나은 표적을 보고 멀리까지 주님을 좇아 온 것입니다. 표적은 예수님의 이적으로서 메시야이신 사실을 보여주는 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표적 자체보다는 표적을 보이신 목적이 더 중요한데 그들은 표적만 보고 주님을 따라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한 산(언덕)에 올라가셨는데 거기까지 많은 무리가 찾아왔습니다. 그 숫자가 남자만 5천명 쯤 되었다고 했으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다 합하면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벳새다 들판에서 장시간 동안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녁 때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시장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빌립에게 이 질문을 하신 것은 빌립이 이 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1:44). 이 지방 출신이니까 자연적으로 지방의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이 ‘어디서’ 이런 음식을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의 질문은 ‘어디서’ 이런 음식을 사서 먹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신 것은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때의 시험은 그 사람을 타락시키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한 시험이었습니다. 과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빌립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빌립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주님은 분명히 음식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는데 빌립은 음식을 사려면 2백 데나리온이 든다고 ‘돈’으로 답을 했습니다. 주님은 ‘어디서 살 수 있느냐’고 했는데 빌립은 ‘2백 데나리온이 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주님은 음식을 공급할 방법, 또는 음식을 공급받을 출처를 물으신 것인데 빌립은 음식을 살 돈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요.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200데나리온은 상당한 가치가 있는 돈입니다. 쉽게 말하면 NIV 영어 성경에서는 ‘8개월 임금’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월 평균 4백만원을 번다면 3200만원이 든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현대의 성도들이 어떤 문제와 어려움이 발생하면 주님을 통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우선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2천년 전 빌립과 똑같은 신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고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른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빌립의 말이 끝나자 이제 안드레가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9). 안드레는 지금 이 들판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 아이의 작은 도시락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음식 즉,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한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떡은 보리떡이고요 물고기는 멸치와 같은 작은 생선을 말한다고 합니다. 참으로 보잘것 없는 한 끼 식사입니다. 이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냐’고 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무심코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을 비롯하여 다른 어른들은 이 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 이상의 음식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가지고 왔어도 자기의 이 음식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내놓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제공한 작은 도시락을 사용하여 주님께서는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자리에 앉게하고 떡과 물고기를 놓고 축사하시고 그것을 나누어 주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적고 소박한 음식이었지만 그것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신 후에 두 제자와 함께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음식을 두고 감사하였을 때 그들이 주님이신지를 알아보게 되었습니다(눅 24:30). 주님은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아 주님은 음식에 대한 감사 기도의 모범이십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첫 번째 기도가 밥을 먹기 전에 감사기도 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부모님들도 언제 어디에서 밥을 먹기 전에 진심으로 감사 기도를 함으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격한 이슬람권에 가서 식사를 할 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소리를 내서 식사 기도를 하지 못하였을 때가 있었는데 어떤 분은 회사에서 동료들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식사 기도도 주님의 모범을 본 받으시기 바랍니다. 빵 한 조각을 놓고 두손 모아 간절히 감사기도하는 죠지 뮬러의 그림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짧지만 진실되게 감사하는 식사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셨습니다. 감사하는 자리에 더 많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식사 기도를 마치고 그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었을 때,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고 다 배불리 먹었는데도 남은 조각이 12 광주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적은 것을 가지고도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되 차고 넘치도록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곳에서 당신의 신적 능력으로 더욱 질 좋은 포도주를 풍성히 만들어 주셨고 본문에서는 아이 한 명의 한 끼 식사인 5병 2어로 5000명의 장정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조금씩 줄지라도’ 많은 돈이 들 것이라고 했고,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냐’고 했지만 주님은 저희를 배부르게 먹이시고 남게 하셨습니다. 저들은 불신으로 한계를 말했지만 주님은 신적인 은혜를 풍성히 베푸셨습니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 대단한 기적과 표적이 일어 났습니다.
20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자유주의라는 신학 사상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이성에 근거하여 자유롭게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5병2어와 같은 사건은 한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내니까 도시락을 싸온 모든 사람들이 도시락을 내놓고 같이 나누어 먹었는데 5천명을 먹고도 몇 광주리가 남았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신학 사상이 신정통주의인데 여기서는 이같은 이적과 표적은 신화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것들을 제거하거나 새롭게 해석해야 역사적 예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자나 신정통주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성경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예수님의 신비적인 이적들이 다른 데보다 훨씬 더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이성적 합리주의로 해석하거나 신화적인 사건으로 이해하여 제거한다면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남을 부분이 매우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이 본문은 이성적으로 신화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적 능력으로 행하신 신비로운 표적으로 이해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단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벳세다 들판에 모인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이적으로 떡과 생선을 배불리 먹고는, 다시 말해서 놀라운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신 18:15-18)로 믿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열왕기하 4:42-44에 엘리사 선지자가 떡 20개로 백명을 먹인 일이 나옵니다(5:1 비율). 이 엘리사는 메시아의 전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떡 5개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았습니다(1000:1의 비율).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지자는 유대인과 이방인, 곧 모든 사람을 위해 커다란 잔치를 베푸실 것이라’(사 25:6-9)고 하셨습니다. 이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님이심으로 그는 그 선지자이시며 메시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그 선지자로 믿은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정치적인 지도자로 인식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임금 삼으려고 했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람이고 왕이나 임금은 백성들을 통치하고 인도하는 사람임으로 이 둘 사이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세나 사무엘과 같은 선지자이면서 왕이신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런 분이 선지자요 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옥같은 말씀도 듣고 또한 배고픔도 이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으니 백성으로써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은 단순히 이런 메시아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고 먹을 것을 공급해 주는 그런 지도자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한 가지를 놓친 것입니다.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예언하면서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고 하셨는데, 저들이 예수님을 그 선지자로 알았다면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는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주님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해방과 배고픈 문제를 해결하고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큰 잘못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과 환호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군중들의 의도를 깨달았을 때 예수께서는 그 자리를 떠나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며 인간적인 인기가 증가하여 세워지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주님의 통치와 인도하심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합니다.
〉두 번째 문단에서는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16-21, 마 14:22-27, 막 6:45-52).
예수님이 이제 벳새다 들판에서 바닷가로 내려오셔서 가버나움으로 옮겨 가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가고 예수님은 뒤에 출발을 하셨습니다.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이 구절을 언뜻 보면 문제가 없는데 공관복음과 비교해 보면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마가복음 6:45에 보면 예수님이 무리를 흩어지게 하는 동안 제자들을 배에 타게 하시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5병2어가 일어났던 장소도 누가에 의하면 벳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눅 9:10).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결점은 벳새다라 불리는 마을이 둘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동북쪽에 있는 벳새다에서 음식을 먹고 배를 타고 서북쪽에 있는 가버나움 근처의 벳새다로 가셨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배를 탄 시간(때)이 ‘저물매’와 ‘이미 어두웠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 시간으로 말하면 하루가 다 가고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시즘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큰 바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동적으로 파도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갈릴리 바다는 지중해 해면보다 무려 200m나 낮고, 남북 총 길이가 21km이고 넓이가 11km이고 둘레가 53km이고 깊은 곳은 45m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방이 산으로 둘려 쌓여 있습니다. 이런 호수에 북풍이나 서풍이 불어올 때면 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이 바다에 도착할 때는 폭풍이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큰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큰 바람으로 인하여 파도가 일어나니까 배를 다루고 노를 젖는데 전문가들이었던 제자들도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갔다고 했는데(4-5km를 갔는데) 어렵게 시간도 많이 걸려서 고생하면서 갔습니다. 그때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이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때가 밤 4경이라고 했습니다(마 14:25, 막 6:48). 로마인들은 밤을 3시간씩 묶어서 사경(경은 파수꾼-경계병)으로 나누었는데 밤 4경은 새벽 3시부터 6시까지를 말합니다. 하루 중 가장 캄캄한 때라고 합니다.주님은 지금까지 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이 칠흙같이 캄캄한 밤에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성난 바다를 넘어 먼 거리를 걸어 오신 주님이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20)고 하셨습니다. ‘내니’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그 때에 자신의 현림하심을 가리킬 뿐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오실 것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람과 파도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두려움에 빠져 있는데 주님은 그 파도를 짓밟고 그 야밤에 고통과 두려움의 현장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다,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21). 제자들의 두려움이 주님으로 인하여 기쁨이 되었고 성난 바람과 파도는 잠잠하게 되었고 주님을 모신 배는 가려던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 ‘배는 곧’이란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심으로 이제 배는 순간적으로 순조롭게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연계를 통솔하실 수 있는 권능으로써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심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마 14:33).
결론
예수님은 적은 음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축사하시고 그것으로 5천명을 먹이시고 12광주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 표적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표적이 지향하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곧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양식을 그들에게 주심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먹지 않는 사람은 자기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고 이 떡을 먹는 사람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의 양식을 먹음으로 생명을 얻으시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저는 5장과 6장을 연결하여 이 주제에 대하여 좀 더 설명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5장 앞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을 유월절로 본다면 유월절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5:18). 그리고 요한복음 6장의 유월절에 5병2어의 이적을 베푸시므로 자신을 그의 백성을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월절에는 반드시 백성들의 죄 용서를 위하여 어린양이 죽어야만 하는 것처럼 이제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시기 위하여 유월절에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어린양으로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을 떡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다음의 표적은 물 위를 걸어오신 주님이십니다. 이것을 통하여 주님은 바람과 파도를 창조하신 창조주시며 그것들을 다스리시는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조물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를 만든 창조주에게 순종하고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람과 파도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두 가지 표적을 통하여 나타난 주님을 생명의 떡으로, 주님은 만물의 주권자로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이 함께해 주시면 고통과 괴로움이 기쁨으로 변하고, 주야로 나를 생명의 떡으로 먹이시고, 주님으로 인하여 가려던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내 인생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셔서 가장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난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해 주시고, 내 인생의 좋은 코치가 되어 주시고, 해 받지 아니하도록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해 주십니다. 주님의 이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찬송/
기도 제목/ 주님이 나의 생명의 떡이시며 내 인생의 주권자이시오니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가 주님의 통치를 잘 받게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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