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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20 -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나 이정현 목사 201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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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3:16절 개역개정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3:16,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나.

 

성경 중에서 요한복음 316절은, 1)성경 66권의 중심주제입니다. 2)기독교의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입니다. 3)루터는 작은 복음서다.’ 혹은 복음서 안에 있는 복음이다.’

 

글도 없는 미개한 부족을 찾아간 선교사가 그들의 말을 배우고, 글을 만들어서, 성경을 번역할 준비가 되면, 제일 먼저 번역하는 말씀이 창세기 11절이 아니라, 요한복음 316절이라고 합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에게도, 가장 먼저 외우게 하는 말씀이,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그만큼 요한복음 316절이 중요하고 성경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말입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다니지 못하였지만, 고등학교 때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말씀을 율동으로 이렇게 가르쳤던 것이 기억에 납니다. ...

 

오늘은 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인, 3:16절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없었다면 당연히 우리의 구원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묻지도 않는 사랑입니다. 정말로 사랑하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습니다. 얼굴이 예쁜지 덜 예쁜지 따지지 않습니다. 돈이 많은지 적은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인품이 좋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머리가 좋은지 나쁜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도 따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조건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이런 사랑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새들 중 모성애가 가장 뜨거운 것은 펠리컨입니다. 펠리컨은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또 펠리컨의 희생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높은 사랑이, 어머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나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어머님의 사랑과 은혜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으로 어머님의 은혜는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사랑임에 틀림없습니다. 홈즈라는 미국의 재판관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청춘은 사라지고 사랑은 시들고, 우정의 잎사귀는 떨어지지만, 어머니의 남모르는 깊은 사랑은 그 모든 것보다 오래 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크다고, 이사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49:1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펠리컨의 사랑이나, 부모의 사랑보다 더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할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의 오른손에는 그들을 위해 번쩍이는 불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33:2-3).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들 가운데 임재하사 말씀하셨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한 단어 사랑으로 묘사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단적으로, 사랑이시라고 하셨습니다.

 

E. Brunner라는 학자는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내어줌(the self-giving)이며, 하나님 자신의 커뮤니케이션(the self-communication of God)’이라고 정의를 하였습니다. 화란의 개혁파 신학자 Abraham Kuyper, 삼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 없이 한 순간도 존재하실 수 없다. 하나님 자신 안에, 깊고 영원한 사랑을 간직함이 없이는,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은 깊고 영원한 사랑을 가진 분이라는 표현입니다.

 

이처럼 성경이나 학자들의 말을 빌어볼 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그 사랑은 측량할 수 없이 깊고,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의 세상은 1)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하십니다. 보시기에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와 있는 세상이, 그 피조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2)세상의 풍조와 사조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요일 2:15-17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했으며, 이것들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세상은, 세상의 풍조와 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본문의 세상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만물이나 세속적 사조를 사랑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삼라만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이 아니고, 또한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며, 고대광실 문전옥답을 사랑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3.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셨는가?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로 표현이 되었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사랑의 증표입니다. 여기서 제가 증표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무엇의 증명이나 증거가 될 만한 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셨다는 증거가 될 만한 표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결혼 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사랑 영원히 변치 않을 것입니다라는 의미와 표로, 다이아몬드나 금목걸이, 가락지 등을 주지 않습니까? 이것처럼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 사랑의 증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서,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불의하고 죄 많은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계산적으로 따져볼 때, 그것은 손해 보는 일입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볼 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바보여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실수로,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니시며, 하나님은 절대로 실수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살리는 길은 오직 그 길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보내어 죽게 하신 이것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 대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이 말씀도 결국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려고 오신 것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따라 온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공의를 위해 죽는 자가 혹 있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자가 혹 있을지 모르지만,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없는데, 죄인의 괴수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을 볼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레만 목사님은, 독생자 예수를 주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가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 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우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쓰레기같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 내어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고 위대한지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4. 이런 사랑을 베풀어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그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생은 영원토록 사는 것을 말하지만, 그냥 영원토록 사는 것을 말하지 않고,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지옥에서도 영원히 살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리켜 영생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십자가는 우리의 범죄 함 때문이고, 부활은 우리의 의를 위함입니다. 의롭다함이 있어야 영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아로 인하여,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었다고 하셨는데, 이것 또한 영생을 위함입니다.

 

시편 1033절로 5절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병고침을 받고, 구속함을 입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어주시고, 좋은 것으로 소원을 만족케 하사, 독수리같이 새롭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현세적 복과 은혜도, 결국 영생과 연결되어 있는 복인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이 영생을 준비하셨습니까?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마다” 15절에,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고, 16절 뒷부분에도,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가 반복됨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은 원어 상, 현재형입니다. 믿음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믿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믿기 전의 상태가 어떠했든지를 따지지 않고, 지금 믿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분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계속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믿되 계속적으로 믿어야 함을 말합니다. 현재 믿어야 하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아를 믿고, 계속적으로 믿는 자 바로 그 사람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통해 영생이전에 믿음이 있었고, 믿음 이전에 그리스도의 오심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영생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믿는 자는 지금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

 

성령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시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 주시는 일을 하십니다. 로마서 5(5)에 보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셔서, 그 사랑을 알게 하시고 감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성도들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의 교인들을 향하여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1:7). 바울은 로마교회와 성도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그 사랑을 부어주실 때, 성도는 그 사랑의 옷을 입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1-13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에베소교회의 과거와 현제를, ‘그때이제라는 말로 비교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과거 즉, 믿지 않았을 때를 말합니다. 과거 우리는 할례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없는 자였습니다. 언약을 받지도 못한 외인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소망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게 우리의 과거입니다.

 

그런 우리가 이젠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과거의 경력이 이런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자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자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까?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예수님이 피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선물로 받지만, 하나님은 아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신 겁니다. 그분은 우리와 가까워지기 위하여, 독생자와 멀어지는 것을 선택하신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워졌습니까? 에베소서 2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셨습니다.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닌 성도가 되었고,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권속이란 가족또는 식구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걸 잊지 말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의 원어 상 의미는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조건을, 100% 갖추고 있었습니다. 사랑받을 수 없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우리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셨습니다. 생명을 바쳐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과거에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받을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멸망 받을 자격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음에도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우리가 회개를 하기도 전에,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희생시키신, 아버지의 다함없는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지금도 베풀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혹 여러분이 실패하여 넘어질 때면,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혹 인생길을 걷다 쓰러질 때면, 십자가를 쳐다보시기 바랍니다. 사방이 막혀있고, 건강이 좋지 못하여 좌절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에도,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을 겁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전에도 너를 사랑했고, 지금도 너를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너를 사랑할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뜨거운 이 사랑에 감전되는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멋지게, 의미 있게, 행복하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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