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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18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이정현 목사 20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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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히브리서11:36-40절 개역개정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1:36-40,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 또는 믿음의 명예 전당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오직 믿음으로 살았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아벨부터 시작하여 족장들과 모세와 사사들과 왕들과 선지자들이 믿음으로 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에 이르러서는, 특정인을 지목하지 않고 그 외에 어떤이들을 거론하면서 그들도 오직 믿음으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해주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믿음으로 어떻게 세상을 살았는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속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왜 그렇게 살았는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이 시간에도 사모하는 마음과 간절함으로 말씀을 들음으로 깨닫고 은혜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다하였으니, 경청함으로 복있는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의 말씀이 재미없다, 너무 딱딱하다, 지루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없는 목사의 설교가, 하루아침에 바뀌어지지는 않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설교가 재미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 이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진리라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판단이 되면, 딱딱하더라도 들을려고 노력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설교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은 본인과 하나님 사이의 가로막힌 죄가 없는지 생각해 보시고, 또한 설교자하고 막힌 담이 없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 딴 생각하고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조는 사람도 자기의 삶을 뒤돌아보고 고쳐야 할 부분을 빨리 고쳐야 합니다. 설교 시간마다 조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간에, 영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도 졸고 있다면 어찌해야 합니까?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망신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영혼을 깨워서 말씀을 듣게 하려 함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심으로, 큰 도전과 은혜와 감동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는데, 대부분 구약에 나타난 인물들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떤 사람에 의해서 아마도 AD 64-67년 즈음에 이 성경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때 저자가 구약의 여러 성도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글입니다. 그리고 왜 그들이 이렇게 살아야만 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한구절 한구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6절에,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성도가 조롱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채찍질을 당하였고 결박을 받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누가 누구로부터 이런 가혹한 시련을 받았을까요? 혹자는 마카비 전쟁 때에 시리아 침략자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성도들이 이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방 군인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당하였고 채찍에 맞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답니다.

그러나 유명한 학자인 브루스(Bruce)는 본 구절에 해당되는 사람은 예레미야라고 주장을 합니다. 예레미야는 한때 바스훌에 의해 매를 맞고 착고에 채워지기도 하였으며(20:2)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되었으며(29:7이하), 구덩이 속의 진흙에 던져지기도 하였습니다(38:6). 이런 시련을 당한 성경적 기록이 있기 때문에, 예레미야 일 것이라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 절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저자는 본문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수많은 핍박과 고난과 희롱을 당하였다고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든지 간에 그는 분명히 큰 환란과 시련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은 그 신앙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핍박과 시련을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은 구약의 신자들이 단순히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더 큰 고난을 당하고 심지어 다양한 방법으로 순교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진술입니다.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여기에 보면 몇 가지 학대하는 방법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돌로 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지던 처형법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애굽의 유대인들이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을 때 예레미야가 그에 대해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돌로 쳐서 죽였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탄식하시기도 하셨습니다(23:37). 이렇게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던 것은,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은 예언자 스가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대하 24:21, 11:51). 스가랴 선지자는 우상을 섬기던 백성들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책망하다가,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습니다.

 

다음은 톱으로 켜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선지자 이사야는 므낫세 왕이 보는 앞에서 톱으로 켜져 두 동강이 나 죽었는데, 이사야는 큰소리로 울부짖거나 울지 않았으며, 그의 몸이 두 조각으로 잘릴 때까지 그의 입술이 성령으로 말하였다고 전해 집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 선지자가 핍박을 피하여 나무통 안에 숨었다가, 그만 이것이 발각이 되어서, 므낫세는 통 안에 든 이사야를 통과 함께 그대로 톱으로 잘라서 죽였다고 합니다.


다음은 칼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성도들이 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34절에는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다라고 했음으로, 어떤 신앙인은 악한 자들의 칼날을 피하여 생명을 부지하기도 하였으나, 다른 성도는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는 이세벨로부터 피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다른 예언자들은 칼에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왕상 19:10). 또한 여호야김 왕이 집권할 당시 예레미야는 칼날을 피할 수 있었으나 반대로 예언자 우리야는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26:23), 그리고 신약 시대로 넘어와서도 아그립바 1세는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으나’(12:2) ‘베드로 사도는 그 칼날을 피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이처럼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칼날을 피하기도 했으나, 혹자는 믿음으로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다같이 믿음으로 살았으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혹자는 건짐을 받고 혹자는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수 많은 성도들이 그 믿음 하나 때문에, 잡히면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몸 둥아리가 잘려서 죽기도 하고 칼에 목이 달아나기도 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모들이 순교하는 장면을 자식들이 보기도 하였고, 반대로 자식들이 신앙고백을 하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그 부모가 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심판을 예언했다는 것 때문에...’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고,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도 비참했던 것입니다. 짐승의 가죽을 덮어쓰고 짐승처럼 살았고, 학대를 받으며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서 겨우 살아갔습니다. 훗날에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라는 사람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한 사람들을 본받으라”(Clement 117:1). 신앙 때문에 이렇게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오히려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비록 생활은 비참하지만, 그래도 신앙을 지키겠다는 저들을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참으로 멋진 표현으로 평가를 했습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모진 핍박을 하고 못살게 굴고 심지어 죽여도 저들의 신앙을 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들은 세상이 통제할 수 없는 사람, 세상의 가치가 먹히지 않는 사람, 사탄의 통치 영역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신앙으로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통치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맞춰 보십시오.

19193.1 만세 운동에 가담했다가 1년 동안 투옥되기도 하였고 그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교회를 개척하여 말씀을 전하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936년 미국 달라스신학교에서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최초의 구약학 박사학위를 받으셨던 분이십니다.

1944년 지금 서울역 맞은편 대우빌딩 뒤에 있는 남대문교회의 제6대 담임목사님을 역임하셨습니다.

19453백만부흥전도회를 설립하셨습니다(전 인구의 11).

1948년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를 세웠던 분입니다.

1950-19536.25 동란 중에도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던 분이십니다.

1961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교단을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바로 김치선 박사님이십니다. 이분이 19682월에 돌아가셨는데, 이 분의 묘가 우리 동네인 시흥 물왕리에 있습니다. 그의 비문에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 오늘 히브리서 기자가 구약의 믿음의 성도들을 평가했던 그 한마디 말을, 신앙의 후배들이 김치선 목사를 두고도 이 말을 썼던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한 사람.’ 그분은 평생토록 전도자로 살았고, 설교자와 교수로 살았고, 집필가로 애국자로 살았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사셨던, 정말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다음 3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39절에 나오는 이 사람들은 히브리서 11장에 언급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이들은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증거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2, 5). 달리 말하면 믿음으로 천국의 시민권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받지는 못하였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온전한 약속의 성취는 보지 못하였다는 얘기입니다. 곧 새 언약의 성취로 그리스도의 초림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약속 성취를 기대하다가 결국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39절의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과, 33절의 약속을 받기도 하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 두 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33절의 약속은 복수로 약속들로 되어 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에게 하신 특정한 약속들이며, 그러한 약속들은 그들의 생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39절의 약속그 약속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영원한 기업의 약속’(9:15)으로서 영원한 하늘나라의 구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저자가 본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사람들은 다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살았다는 것입니다(13).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다 약속의 성취를 경험하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구약 시대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

 

39절보다 40절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여기의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더 좋은 것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믿음을 통한 구원을 준비해 두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이 말이 우리가 구약의 성도들을 온전케 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브루스(Bruce)의 해석을 들어보겠습니다.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온전함을 경험할 수 없었으나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 시대의 믿음의 사람들이나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은 다같이 동일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구약 시대의 믿음의 인물들의 구원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고 합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구약의 성도들이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해진다는라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결국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본문 몇 구절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으로부터 많은 환란과 핍박을 받았고 그것 때문에 궁핍하였고 짐승처럼 비참한 생활을 했고, 그것 때문에 돌에 맞거나 톱으로 짤리거나 불가운데 던져져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같은 참혹한 고난 가운데서도 오로지 그 믿음을 지켰고 배신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다른 말로 본문을 간단히 정리하면,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승리했다. 믿음으로 고난을 받았다믿음으로 소망을 향해서 전진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죽음을 각오하면서 믿음을 지켜나갔던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만 이런 믿음이 사람들이 있는가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 사람들이 성경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지금은 없는 건가요?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현대 성도들은 없는 것입니까?

 

2000210일 함경북도 무산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37세의 리영희라는 여성이 총살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기 전 다급한 목소리로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말했고 그는 주여라는 한마디 말을 남기고 순교했습니다. 그때 그녀의 총살형을 지켜보았던 한 사람이 탈북해서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한국 선교사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여줌으로 리영희의 죽음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리영희와 그의 남편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건너 탈북했습니다. 그들은 한국 선교사에 의해 운영되던 처소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남편은 복막염을 앓고 있었는데 처소교회에서 그를 병원에 입원시켜 주었습니다. 3개월 후 회복되어 두 부부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성경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자기 동네로 돌아왔습니다.


리영희는 그 후 2년 동안 중국을 오가면서 소형 성경책을 가지고 와서 동포들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보위부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리영희는 자기를 고문하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말했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니 동무들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녀는 극심한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자기를 도와준 선교사의 이름과 처소교회의 위치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기꺼이 순교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준 한국 선교사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지금 북한에는 도처에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99년 한해만 하더라도 400여명이 공개처형을 받았는데 그중 1/3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땅에 제2, 3의 리영희가 양육되고 있으며 수십 개의 지하교회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순교를 당하는 그날까지 이 일을 할 것이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 이 땅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론

 

히브리서가 쓰여진지 20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를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고, 적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환란과 핍박과 궁핍함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이 멋진 삶을,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어갔습니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랑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치고 난 후에도, 슬픔과 아픔을 이기고 그들은 바통을 쥐고 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우리 주님이 이미 가장 위대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장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앞의 고난과 모욕과 조롱과 십자가의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신 분이십니다.’ 또한 주님의 그 길을 사도들이 이어 갔고 특히 바울이 주님의 그 가시밭 길을 따라갔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구약과 신약 성도들의 이 믿음을 이어가야 하겠습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이 이 신앙 경주의 바통을 이어 받아서, 앞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400m 계주를 하기 위해서 트랙에 서 있는 네 명의 달리기 선수 중 내가 지금 마지막 주자로 서 있습니다. 앞의 세 사람이 잘 뛰어 주셔서 1등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내 차례입니다. 내가 저 사람의 바톤을 잘이어 받아서 마지막 골인 지점까지 온 힘을 다하여서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부담스럽다고 바통을 안 받는다든지, 떨어 뜨린다든지, 받고도 열심히 뛰지 않는다면 결국 상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시합을 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이미 세바퀴를 돌았습니다. 한 바퀴만 남았습니다. 신앙의 경주를 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 신앙의 바통을 우리는 잘이어 받아야 하고, 그것을 굳게 붙잡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처럼 어떤 위험과 고난과 환란과 궁핍함이 있어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 십자가 튼튼히 붙잡고, 오직 믿음으로 앞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저 천국을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계신 저 천국을 소망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당하는 그 모든 고난을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지막이 어떤 줄 아십니까? 주님은 친절하게도 믿음을 지키다가 고난을 받고 심지어 순교까지 한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20:4-5).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사람들, 우상숭배를 거절한 사람들,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믿음의 주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더불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 환란이 닥쳐와도...

기도 제목/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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