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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3 24 박해 속에서도 자라는 하나님 나라 이정현 목사 202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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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5:12-42절 개역개정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19.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이르되

20.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21.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오라 하니

22. 부하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23. 이르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알리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하니

26.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33.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40.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4324일 사도행전 5:12-42 박해 속에서도 자라는 하나님 나라

 

지난 주에는 사도행전 5장 앞부분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사건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인데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셨던 것은 교회의 성결이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교회의 성결을 해치려고 거짓말로 교회를 공격했지만 성령께서 이것을 막아주시고 해결해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이 있었을 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가르쳐주시거나 깨닫게 해 주지 않으셨다면 베드로의 능력과 지혜가지고는 거짓되고 위선된 구제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주님이 그의 영으로 통치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고 믿는 것도 이런 의미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

 

교회가 어려움과 환란과 핍박을 받을 때 공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일은 온 교회가 모여서 기도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부르짖어 창조주 하나님과 약속의 성취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시고,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적과 표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였고 모두가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했던 한 가지 내용은 아직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 기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오늘 본문 서두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이후에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14절에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했습니다. 대단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핍박으로 인하여 신자의 수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남녀의 큰 무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수백 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 중에 일어났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보니까 병 고치는 역사가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15-16절의 말씀입니다.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부근의 수 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대단한 역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 보면 일반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과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병의 원인은 귀신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있고 귀신들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과 귀신들린 사람 사이에는 그들이 당하는 육체적 고통에 조금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에서, 귀신은 더러운 존재이고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생각해 볼 때 귀신이 얼마나 더럽고 사람에게 괴로움을 주는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존재들도 다 나음을 입게 되었던 것입니다.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에게 참 자유와 건강과 평안을 주신 분은 거룩하시고 평강의 주인이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당신의 종 베드로를 통하여 이런 역사를 행하신 것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곳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병자들이 낫게 되니까 이것을 시기하는 무리가 일어났습니다.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무리가 포함되어 있는 사두개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사도들에 대한 시기가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게 됩니다. 아무리 당시의 세도를 부리는 권력자라 할지라도 이럴만한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죄도 범하지 않았는데 정당한 절차도 없이 사람을 어떻게 구금할 수 있습니까? 단순히 자기들의 시기심 때문에 사람을 잡아 가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존경과 경외심을 요구하지만 사도들은 오직 하나님께 존경과 경외심을 돌리는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어이없이 잡혀 옥에 갇혀있는데 그날 밤에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20)고 하셨습니다.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던 사두개인들이 믿지 않았던 천사(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사도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말 속에는 어디에 가서(성전) 무엇을(생명의 말씀을 다) 누구에게(백성에게) 말해야 하는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메시지의 특징은 바로 생명의 말씀을 다에 있습니다.

 

그들은 감옥을 유유히 빠져나가서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새벽예배를 드리는 사람들과 성전 상인들 때문에 성전 문을 일찍부터 열었다고 합니다. 그 새벽 시간을 이용해서 성전을 찾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주의 사자의 말을 그대로 실행했습니다(21).

 

아침이 되어서 사두개파 사람들이 공회와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모아놓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부하들은 사도들을 옥에서 만날 수가 없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키는 사람들이 문에 서 있으되 문을 열고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23). 그때 한 사람이 와서 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25)고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살아진 죄수들이 바로 그들이 처음 붙잡혔던 곳으로 돌아가서 그들이 붙잡히게 된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것입니다. 이에 성전 맡은 자가 부하들과 같이 가서 그들을 잡아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고 했습니다.

 

지금 성령께서는 사도들을 통하여 복음이 확산되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사탄은 계속하여 종교 지도자들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확장을 가로막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 잡아 가두고 또 놓여서 생명의 말씀을 전하면 또 잡아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런 환란과 방해 때문에 복음이 매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방해를 받겠습니까?

 

사도들은 끌려가서 공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는데 왜 예루살렘 온 천지에 가르쳤느냐?’(28)라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산헤드린 공회가 무슨 죄목으로 사도들을 기소했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 이름으로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금지한 공의회의 결정에 불복했다는 것과 근거 없는 해로운 소문을 퍼뜨렸다는 죄로 기소된 것입니다. 이 질문에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합니다. 어떤 인간적인 권위보다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요성을 말한 것입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영원한 두려움을 간과하지만 사도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궁극적인 권위자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30-32)고 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들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그 조상들의 하나님이 바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게 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과 같은 분임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불순종과 신성 모독죄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결과로 인해 죽임을 당했으며 자신의 죽음으로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역사가 끝나기를 바란 대속적인 왕이요 구세주였음을 역설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담대히 말하는 것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그들을 죽여 보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교법사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나서서 회원들에게 합리적인 권고를 합니다. 여기의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요 바울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나온 것처럼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자입니다. 이 사람이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내어 보내고 나서 드다(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이야기와 갈릴리의 유다(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대로 알려져 있다. 주후 6년 수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과세를 목적으로 호적을 등록하라고 했을 때 이 유다가 일어나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여호와께 제물을 바칠 것이지 이방인의 통치자에게 납세할 수 없다고 반항하였다. 결국 그도 드다와 같은 운명이 되었으나 열심당원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야기를 근거로 사도들의 소위가 만약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면 우리가 어찌할 수 없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상관하지 말자고 합니다. 가말리엘이 이처럼 사도들을 공정하게 변호한 것은 사도들이 크게 율법을 어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인간들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대한 신념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자는 그의 이같은 발언을 무의식적인 예언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가말리엘을 사용하셔서 사도들이 석방되도록 도우셨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과거 바로를 사용하여 요셉을 건지시고 아닥사스다 왕을 통하여 느헤미야를,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왕을 통하여 다니엘을, 고레스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구원하셨던 것처럼 악한 날에 악인들을 통하여 당신의 사역들을 보호하신 것입니다. 잠언 21:1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 결과로 사도들은 채찍에 맞고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라는 명령을 재차 받게 되었습니다.

 

5장 마지막 두 구절은 산헤드린 재판 사건이 사도들을 얼마나 더 담대한 증인으로 단련시켰는지를 보여줍니다.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41-42). 사도들의 기쁨이 무엇이었습니까? 공회 앞에서 풀려나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는 것입니까?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번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습니다. 복음 전하다가 능욕 받는 것을 기뻐했다는 말씀입니다. 채찍에 맞으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가졌던 고난에 대해 태도입니다. 그래서 당시 환난 중의 기쁨은 참 신자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파하고 가르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공적인 자리나 사적인 자리나 가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 것입니다.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을 오직 전도에 전념했다는 말입니다.

 

결론

 

복음은 매이지 않는 법입니다. 환란과 핍박과 감옥의 쇠창살을 뚫고도 전파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형벌이나 재판이나 감옥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발길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갔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내부적인 유혹이나 거짓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나가게 되고 유대 교권자들의 외부적인 압박도 성령의 능력으로 이김으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핍박 중에도 기쁨이 있었고 그 기쁨 속에서 지속적으로 복음은 확산 되었습니다. ‘기쁨이 가득한 자는 설교 없이 설교한다는 테레사 수녀(Mother Teresa)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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