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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12 14 <예수님이 배신당하고 체포되심>
이정현 목사 2025-12-14 추천 0 댓글 0 조회 27
[성경본문] 요한복음18:1-11 개역개정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51214일 요 18:1-11, 예수님이 배신당하고 체포되심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그 기도를 생략합니다. 아마도 다락방에서의 기도로 대치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겟세마네 기도를 생략한 사도 요한은 곧장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 의해 배신을 당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군병들에게 내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지시하는 예수의 말씀은 17장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는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8장은 예수의 중보기도에 이어 수난 기사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공통되게 다루고 있는 겟세마네 기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17장의 기도를 공관복음의 겟세마네 기도와 대체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와서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의 기드론은 백향목이라는 뜻을 가진 지명인데 구약 시대의 우상들이 불태워지던 곳이며(왕상 15:1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반란군을 피해 다윗이 건넜던 곳이기도 하다(삼하 15:23). 그리고 시내라는 말은 겨울에 흐르는 시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내는 겨울 우기 동안에 약간의 물이 흐르고 곧 말라버리기 때문에 다른 계절에는 말라 있는 건천(wadi)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 있는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동산은 바로 겟세마네라 불리는 곳으로, 누가는 감람산이라고 했습니다(26:36, 14:32, 22:39).

 

특히 이곳은 2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와 제자들이 자주 찾았던 곳으로 이 장소를 가룟 유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합니다.그리고 누가는 보다 더 자세하게 이곳을 늘 하시던 대로’(22:39, 공동번역) 찾으신 것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다가 예수의 일행이 머문 장소를 알았던 것은 유다 자신도 예수와 함께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3절은 공관복음서와 다르게 유다가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이끌고 온 사람들의 신분을 소상히 밝히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서는(26:47, 14:34, 22:47) 유다가 이끌고 온 사람들이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라고만 밝히고 있으나 요한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종들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군대는 로마군 600명으로 구성된 한 부대 단위를 나타내기도 하며 또한 200여명으로 구성된 보병 중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12절에서 천부장이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서 작은 부대는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들은 예수와 그의 11제자와 다수의 백성들이 함께 있을 것을 대비해 많은 수의 하속들을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많은 하속들은 예수를 잡기 위해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검과 몽치라고만 언급하였지만(26:47, 14:43) 본문에서는 등과 홰까지 언급되었습니다. 등과 홰가 언급이 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날씨가 구름이 낀 흐린 날씨였거나 아니면 예수의 체포 시간이 한 밤 중임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가 당할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의 초자연적 예지(豫知)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가룟유다의 배신도 알고 계셨고 자기가 앞으로 어떠한 죽음을 죽으실 것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는 사역 초기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음을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역 도중 위협에 직면했을 때 예수는 자신이 예측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런 위험에 직면했을 때 아직 자기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아시고 위험한 일을 피한 적도 있었습니다(10:39, 11:54). 그러나 지금은 때가 이르렀기 때문에(17:1) 피하지 않고 담대히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동산에서 나가셔서 잡으로 온 무리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묘사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예수의 자발적 체포를 강조하고 있으며 당당하고 권위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이 적대자들에 의한 단순한 처형이 아니라 구원사적 맥락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섭리이며 예수님이 그 섭리를 자발적으로 수용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버리노라.”

 

예수님이 당신 발로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다가가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권위 있는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자신의 일을 다하기 위해 당당하게 체포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독자들은 예수의 체포나 죽음을 자발적이며 위엄있는 구속사적 드라마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니까 주님이 나다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다시한번 더 질문과 대답을 연결하여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나사렛 예수라’ ‘내가 그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형식의 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이 말은 과거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간단히 줄이면 나는 나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자신의 신적 권위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를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 계시를 분명히 할 때에 성경은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5)고 햇습니다. 이는 유다가 예수의 맞은편에 적대자들과 함께 서 있음을 묘사한 것입니다. 정면으로 예수와 마주하고 있는 유다는 배신자로서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공관복음서와 구별되는 점은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 맞추어 예수를 체포케 하는 행위가 언급되지 않고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권위와 위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다음 구절에서 놀라운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6). 예수님이 내가 그니라고 말하자 즉각적으로 나타난 반응입니다. 이를 보아 주님이 내가 나사렛 예수이다라고 말한 것은 대단한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묘사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대자들이 두려워 물러서며 엎드리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7절과 8절에서는 한 번 더 주님이 동일하게 물으시고 대답하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너희들이 나를 체포하려는 것임으로 이 제자들은 자유롭게 갈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자신을 내어놓으면서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4:50에 보면 이때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한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과 연결하여 해석을 한다면 예수님이 피하라는 지시에 따라서그들이 피해 간 것이라고 이해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이같은 일련의 사건은 예수님 자신이 자발적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행동이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씀이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8)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같은 행동은 예언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예언된 말씀이 아니라 바로 앞장에서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12에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존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라고 하셨는데 이를 성취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같은 언급은 예수님 자신의 말은 곧 성경적 권위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는 갑자기 살벌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들의 살기 등등한 모습을 보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무리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체포당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양쪽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베드로가 자기의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짜르게 되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어느쪽 귀인지 언급하지 않지만 누가와 요한은 동일하게 오른쪽 귀를 잘랐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 우선 예수님께서 칼을 사용한 베드로에게 칼을 꽂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나의 갈 길을 막지 말라는 의도가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씀 이후에 예수님이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연결하여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서 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가 겪어야 할 수난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수난의 잔이 우연히 발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섭리임을 강조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주신 잔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잔을 기꺼이 마시겠다는 당당한 의지적인 결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배신을 당하시고 체포되시는 순간에도 위엄있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의해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은 은 30에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 넘긴 것입니다. 그런 배신의 아픔 중에 주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연약한 모습으로 체포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 나사렛 예수이심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시는 순간에도 그의 제자들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에게 체포가 되시고 이제 얼마있지 않으면 모진 채찍과 죽음에 직면하시게 될 것입니다. 인류의 죄 값을 감당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가 바로 눈 앞에 다가 왔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도 주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끝까지 챙기셨습니다. 그들을 걱정하셨고 그들의 안위를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되시는 순간에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우선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대적자들이 자기를 잡으로 왔을 때 천상의 군대를 동원하여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 말씀만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제압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순순히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저들을 구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기 백성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우선시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떤 상황 앞에서도 내가 기독교인이며 예수님의 제자이고 소망교회의 성도임을 잊지 말고 신자답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 놓이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확신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상황 속에서 내 뜻보다 주님의 뜻을 우선 시 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의 유익이나 편안보다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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