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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9 배곧소망교회 부흥회 넷째날 이은선 교수 설교 - 무디의 대부흥운동
이은선 교수 2018-09-21 추천 0 댓글 0 조회 1799
[성경본문] 요한Ⅰ서4:18 개역개정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무디(D. L. Moody, 1837-1899)의 복음 전파 활동과 대부흥운동

 

이은선 교수

 

무디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 미국은 두 가지 사회적 변화에 직면한다. 하나는 1861년부터 4년간 지속되었던 남북전쟁 이후 급속하게 진행된 산업화로 인한 도시화의 진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와 함께 유럽의 성경 비평주의가 들어오면서 사회복음주의가 등장하여 보수적인 신앙에 도전하였다. 이러한 시대에 성경의 권위를 믿으며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개인들의 영혼들을 변화시킴으로 미국사회를 건강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복음주의 노선에서 부흥운동을 펼쳤던 인물이 무디이다. 무디는 당시의 사회적인 문제들을 인간의 죄의 결과로 보고, 그러한 문제들의 참다운 해결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 회심할 때에 가능하다고 보면서 복음전파에 헌신하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문제들을 성경의 고등비평을 수용한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인물이 사회복음(Social Gospel)운동을 펼쳤던 월터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이다.

 

1. 무디의 교육과 회심(1837-1856)

그는 1837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출생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가 4 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그가 7세가 되던 해에 유니테리언 교회에 등록하여 그도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는 자연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생계를 돕기 위해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7세 때인 1854년 무디는 보스턴에 가서 YMCA에 가입했으며 삼촌의 구두 가게에서 일하며 이 지역의 회중교회에 출석하던 중 1855421일 그의 주일학교 교사이며 노방전도자였던 에드워드 킴볼을 통해 영적인 회심을 하였다. 훗날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 받은 날 아침, 밖으로 나가 만물을 보았습니다. 태양이 그토록 사랑스럽게 보인 적은 없었습니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내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구원을 받자마자 너무 기쁜 나머지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니, 기뻐해 주세요. 183725일은 제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생일이지요? 18년이 지난 오늘 421일은 성령으로 제 영혼이 거듭난 생일입니다.”

 

2. 경험의 세월: 시카고와 그곳을 넘어 1860-1866

무디는 회심한 다음 해인 18569월에 신흥 산업도시인 시카고로 이주하였다. 무디는 4개월 후 185716일 시카고 YMCA에서 열린 연합기도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체험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썼다. “이 도시에 위대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고향 노스필드에서도 부흥이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무디의 전기 작가 존 폴락이 지적한 것처럼 이것은 무디에게 깊은 영감을 제공했다. 그가 시카고 북부 슬럼가 노스 마켓 홀에서 거리에 방황하는 도시 젊은이들을 모아주일학교를 시작한 것은 바로 1858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제화점의 영업사원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1859년에 세일즈맨으로 월급 외에도 5000불의 보너스를 받을 정도로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무디는 사업상의 여행을 하면서 복음전도 사업을 하기가 어려워 18606월에 제화점 세일즈맨을 그만두고 복음전도에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무디가 이렇게 어린이 전도에 헌신하게 된 것은 한 주일학교 선생님의 헌신 때문이었다. 이 주일학교 선생님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가정을 심방하여 그들의 회심을 확인하는 열정을 보여주었고, 무디는 여기에 감동받아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게 되었다. 술집을 개량하여 만든 그의 설교 장소에는 주로 빈민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카고에서 가난한 대중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동시에 주일학교와 YMCA를 통하여 시카고 부유층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YMCA에 참여하게 되어 정식 직원이 되었고 부유한 실업인인 존 파웰을 만나도움을 받았다. 이 주일학교가 발전하여 186412월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수용할 일리노이 스트리트 교회가 지어졌고, 무디는 자연스럽게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세움을 입었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의 노예 폐지론을 지지하며 전쟁터로 달려간 무디는 군인 교회에서 1,500여 차례 집회를 가졌고, 매번 집회를 연병장에서 가져야 될 정도로 그의 집회에는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그는 교파를 초월하여 어떤 교리에도 매이지 않았고,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 죄를 모두 사하셨다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치중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관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서 그가 가는 곳마다 비방하는 무리들이 뒤따랐지만, 그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말씀에 큰 감명을 받고 복음 편에 섰다. 그는 1866년에 YMCA 회장으로 선출되어 4년간 이 직책을 수행하였다.

3. 무디의 영국과 미국에서의 초기 사역(1867-1872)

1867년 무디는 영국을 최초로 방문하는데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와 찰스 스펄전 목사를 만나 자신의 부족을 채우게 해주신다. 조지 뮬러는 무디의 정열적인 전도 방법과 교회 사업에 대해 듣고 중요한 것은 무디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디를 통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라고 조언했다. 무디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속에 자신이 쓰임을 받게 된 것임을 알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 또 찰스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그의 설교의 힘과 해박한 지식 앞에 그는 자신의 보잘것없음과 부족함을 알고 충격을 받아 주여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외쳤으며, 그의 설교를 본받으려고 하였다. 그 후에 무디는 죄로 인한 타락(ruin by sin),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redemption by Christ), 성령에 의한 중생(renewal by the holy spirit)이란 명쾌한 성경적인 부흥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1867년 영국을 다녀온 후 무디는 청소년 설교자 헨리 무어하우스를 만나는데, 그는 무디 교회에서 6일 동안 요한복음 316절 한 구절로 설교하며 매일 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게 되었고 마지막 7일째 되는 날 여러분 저는 온종일 설교할 새로운 본문을 찾아보았습니다만 요한복음 316절보다 더 좋은 말씀을 찾지 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또다시 하나님의 사람 사랑하심을 역설하였다. 무디는 이 청소년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 두 가지, 첫째 말씀의 무한한 깊이와 성경을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모든 설교의 중심을 성경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초등학교 5년의 정규 교육 밖에 받지 못한 무디였지만 그는 매일 새벽 4시면 성경을 공부하는 성경학자가 되었다. 무디는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사람들의 영혼을 감화시키는 설교의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설교할 때 그 시간이 오전이건 오후건 할 것 없이 청중이 몰리게 되었다. 이것은 이 세상을 정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성경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의 믿음의 결과이다. 다음으로 그때까지 무디는 하나님이 죄인을 미워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설교를 통해 무서운 지옥 대신 천국에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디는 헨리 무어하우스로부터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배우게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게 되었다영국에서의 경험과 헨리 무어하우스로부터의 교훈은 그 후 무디가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시카고에 세운 교회의 건물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글귀를 새겨 누구나 보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1870년에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국제 YMCA 대회에서 그의 평생의 동역자인 이라 생키(Ira Sankey, 1840-1908)를 만나 그의 영감있는 찬양과 함께 부흥운동을 해 나갔다. 생키는 영혼을 움직이는 찬양을 하여 모인 회중들의 마음의 문을 열도록 했다. 무디는 체계적으로 성경을 공부하지 않았으나 그는 분명한 칼빈주의 신학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은 죄로 인해 전적으로 타락했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죄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역사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수하셨다고 설교하였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분은 성령이라고 선포하였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을 믿어 중생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으라는 복음을 선포하였다. 무디의 집회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했고 그의 설교를 청중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 영국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겠다는 매우 뜨거운 열정을 느끼지 않고는 그의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다.” 평이하면서도 결단을 촉구하는 무디의 메시지는 수많은 영혼들을 잠에서 깨웠다.

187110월에 시카고 대화재가 발생하여 무디는 그의 집도, 그의 교회도, 그의 주일학교도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만 재가 된 그 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과 잃은 것보다 구한 것이 더 많음을 깨닫게 된다. 잿더미 된 도시의 피난민 구제소에서 그는 일을 하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의 교회의 두 명의 성도들의 중보기도의 응답으로 잠시 들른 뉴욕에서 강력한 성령세계를 경험하였다. 그 후 영국을 방문하는 동안에 그는 헨리 발리목사가 인도하는 기도회에 참석하여 그의 평생의 지침을 얻게 된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무디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이 크고 유명해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자신과 하실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디는 발리목사의 말을 듣고 자신이 그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며, 그 말은 그의 생전에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4. 영국과 미국에서의 대중전도(1873-78)

무디 전도운동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던 시기는 1873-1878년 사이의 5년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1873-75년까지 2년 동안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873년 무디는 영국을 다시 방문하나 그곳에서의 복음전도는 처음부터 방해를 받게 된다. 여러 종교지도자들의 비방과 복음전도방식(무디는 설교에 앞서 생키로 찬송가를 부르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켰다)에 대한 불만, 게다가 개인적인 생활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에 의한 모함 등 그의 전도를 방해하는 힘이 너무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무디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시도록 맡겼기에 2년간의 영국 전도여행은 영국이라는 섬 전체를 진동시키게 되었다. 그는 18732차 영국 방문 때 런던 북부에 있는 레시 목사의 초청으로 저녁 설교를 할 때 참석자 200명 가운데 100명이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화요일에 다시 초청받아 10일간 연속집회를 했는데 400명이 구원받았다. 무디는 187311월부터 743월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뉴 칼리지 대학 교수였던 블레이키(William Blaikie)는 이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신 부흥이라고 지적하였다. 18753차 여행 때는 요크에서 5, 선더랜드에서 6주 연속집회를 하였고, 뉴캐슬, 에딘버러, 그리고 런던에서의 집회는 대규모의 청중이 참여하는 성공적인 집회였다. 런던에서는 오전에 기도회, 오후에는 성경공부, 저녁에는 부흥회를 진행하였다. 이러한 영국에서의 집회는 285회였고, 동원된 인원은 295만명이었다.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한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불신자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수천의 타락했던 그리스도인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영국 전체를 교파적인 불일치에서 떠나 복음주의 정신으로 되돌아오게 했다. 그는 또한 영국 방문기간 동안 드러몬드, 뉴칼리지 변증학과 목회학 교수인 블래이키와 앤드류 보나르(Andrew Bonar) 목사 등과 교제하였다.

그는 187510월의 브루클린 집회를 시작하여 1881년까지 미국대륙(필라델피아, 볼티모어, 뉴욕, 세인트루이스, 신시내티, 시카고, 보스턴과 그 외의 중소도시)에서 순회 전도 집회를 짧게는 몇 주에서부터 길게는 몇 달에 걸쳐 복음을 전하게 된다. 무디는 그의 생애를 통해 2억명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그 외에도 교회와 성경학교, 성경연구원, 서적협회 등 많은 기관들을 발족시켰다.

무디는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도 설교를 하여 학생들의 심령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그는 1876년과 1885년에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교수들의 초청을 받아 부흥회를 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1882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그래서 무디의 가장 큰 약점은 올바른 영어를 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그의 영어는 종종 문법이 틀리기도 하고 설교 원고는 철자와 문법이 틀렸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족함을 핑계로 하지 못한다고 포기하지 않았다. 무디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교할 때 학생들이 발을 구르면서 웃고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발음도 엉터리인데다 문법도 엉망이었기 때문에 콧대 높은 학생들이 그런 무디를 얕잡아 본 것이다. 그러나 무디는 끈기 있게 끝까지 말씀을 다 전했다. 설교가 끝난 후 한 학생이 무디의 설교 내용 중 문법이 틀린 것들을 적어 주었다. 이를 본 무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문법이 틀린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문법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학생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문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까?”그 학생은 충격을 받고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학생회 회장이 무디를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 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캠브리지 대학에 역사상 유례없는 대 각성 운동이 일어났으며 선교의 거대한 장을 열었다. 일곱 명의 우수한 학생이 중국선교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고, 그 중에 중국선교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가 있다.

5. 새로운 접근법: 연합집회와 학교설립(1878-1899)

무디는 이 기간 동안에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대중전도 집회를 인도했지만, 그는 1878년까지의 자신의 부흥집회를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접근법을 선택하였다. 그는 1878년 볼티모어에서 기존의 교회 건물을 이용하면서 지역교회와 협력하여 집회를 하면서 도시 전역에 선교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선택하였다. 그는 짧은 기간의 대중 집회는 회심의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렸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효과적인 사역을 하고자 사전 준비 작업을 통해 지역교회들의 연합을 이끌어 내었다. 지역교회들이 연합집회에 전력해서 협력하도록 하면서 새로운 결신자들을 지역교회와 연결시켜 주었고 동시에 기존 성도들의 신앙을 새롭게 각성시켜 그들도 개인 전도를 하도록 인도하여 지역교회의 부흥을 이끌도록 하였다. 둘째로 그는 보다 장기적인 복음화의 일환으로 무디는 인격적이고 헌신된 기독교인들을 육성하기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1879년에 노스필드 여학교, 1881년에 마운트 헐몬트 남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학교들은 지역사회에 필요한 신앙을 갖춘 인재들을 육성하려는 학교들이었다. 그리고 1887년에 무디 성경학교(Moody Bible College)를 세웠다. 이 학교를 세운 목적은 7년간 교육받는 신학교보다는 3-4년 동안 성경만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후에 도시 선교를 위해 일하는 복음전도자나 해외 선교사로 파송하려는 목적이었다. 무디는 1890년대에 도시 전도, 특히 1893년에 시카고 박람회 기간 동안에 도시 전도를 하였다. 정교한 계획을 세워 전도를 하였으며, 한 주일에 125회의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셋째로 성인들과 대학생층의 젊은이들을 위한 여름 성경 수련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187911월에 내년에 여름 성경 수련회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여 18809월에 첫 번째로 10일간 열렸다. 다음 해 8월에 열렸고, 3년간 영국으로 가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1886년 여름 첫 번째 대학생 수련회에서 100명이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이것이 학생자원운동의 시작이었다. 다음 해 6월에는 2천 명이 참석하여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를 시도하는 학생자원운동이 일어났다. 수련회 강사들은 피어슨(A. T. Pierson), 고던(A. J. Gordon), 휘틀(D. W. Whittle), 니드햄(George Needdham)과 무어헤드(W. G. Moorehead) 등이었다. 케직 유형의 강조점을 가진 강사들이 많았고 세대주의와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강조하였다. 넷째로 그는 부흥집회와 학교, 성경공부 모임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출판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의 설교집을 출판하였고, 1894년부터는 기독교 잡지들과 서적들을 정기적으로 출판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Moody Press의 기원이다.

그는 하나님의 쓰임에 합당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계속해서 쓰실 수 있던 이유는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무디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컬컬한 목소리와 많은 문법적 오류 등 설교에도 결함이 많았지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후부터 그는 사람의 영혼에 강하게 역사하는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모든 일을 어떤 망설임도 없이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자기에게 해로운 것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돈에 대해 너무도 깨끗했다. 그가 하나님께 바쳐진 이후 그에게 돈은 다시는 시험거리가 되지 못했다.그는 돈을 버는 방법을 알았고 능력도 있었으나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사용하게 되는 것이었다. 무디는 단순히 그의 이름을 D. L. 무디라고 서명하고 목사 안수받기를 거절하였다. 그는 단지 평범하게 무디씨 혹은 부흥사로 불러주기를 원했던 겸손의 사람이었다. 무디는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라는 것을 믿었다. 그는 이론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는 18991222일 세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는 세상에 없으나 하나님 앞에서 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의 뜻에 완전히 헌신한 사람을 통하여 하실 수 있는 일을 보아야 합니다."

6. 학생자원운동의 조직

무디는 1886년 화이트 마운틴의 헬몬산집회(1886)에서 젊은 학생들을 모아 집회를 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학생들이 해외 선교를 지망하면서 이 학생운동은 마침내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r Movement)로 발전하였다. 이 운동의 발전과 성장에는 프린스톤대학 졸업생이었던 로버트 월더(Robert P. Wilder)의 선교 비전, 무디의 영적 감화력, 그리고 당시 코넬 대학 학생이었던 존 모트(John R. Mott)의 탁월한 조직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운동은 1886년 여름 헬몬산의 무디수양관에 모인 100여명의 학생들이 본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다.”라는 프린스톤 서약(Princeton pledge)에 서명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이 운동이 정식 발족되면서 존 모트는 회장이 되었고, 윌더는 해외순방 총무(Travelling secretary)가 되었다이 학생자원운동의 표어는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 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였다. 이 운동은 미국전역과 캐나다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단체가 주관하는 선교대회가 매 4년마다 모였는데, 1회 대회는 1891년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열렸다. 선교자원자가 매년 증가하였고, 1920년에 모였던 데스 모이네스(Des Moines) 대회는 절정에 달했다. 그 후 점차 위력을 상실하였고, 1936년의 인디아나폴리스 대회는 마지막 대회가 되었다. 이 모음을 통해 50년 동안 선교사로 자원한 학생가운데서 25백 명이 선교사로 해외에 파송되었다. 그리고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도 바로 이 무디의 헬몬산 집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7. 무디 부흥운동의 오늘날의 의미

무디의 정식으로 신학교육을 받지 않고 초교파적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복음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의 신학은 칼빈주의적인 성격이 들어있다. 그는 복음전파의 방법에서는 찰스 피니의 방법을 수용하여, 도시 전도에 집중하였고, 이라 생키와 함께 복음 성가를 통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문을 여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회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의 성격을 강조하였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킨다.

 

2. 생키의 찬양을 통한 영혼의 문을 열었다.

 

3. 모든 교파들과 연합하여 부흥운동을 하였다.

 

4. 성령의 강력한 기름부음이 있었다.

 

5.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영혼의 회심이 있었다.

 

6.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무디를 사용하신 것은 1) 그의 철저한 순종 2) 그의 겸손 3) 기도의 사람 4) 철저한 성경 연구자 5) 돈에 대한 깨끗함 6)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 7)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히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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