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라는 선지자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주전 760년대부터 710년대까지 50년 정도, 북 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당시 남쪽 유다의 왕은,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였다고 기록하고 있고, 북쪽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북쪽 이스라엘의 왕 이름이, 한명만 나온다고 해서, 그 왕 시대에만 선지자가 활동했다는 말이 아니라, 남 왕국의 히스기야 왕 때까지 선지자로 활동했다고 했음으로, 연대적으로 따져보면, 여로보암 2세 이후 더 많은 왕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이 스가랴인데, 이 아들은 왕이 된지 6개월 만에, 살룸의 반역으로 죽게 되어, 여로보암의 집은 망하게 됩니다. 또 살룸은 왕 위에 오른지 불과 1달 만에, 므나헴에게 죽고 맙니다(왕하 15:14). 왕위에 오른 므나헴은, 앗수르 나라의 ‘불’의 침략을 받아,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왕하 15:19).
그 후 브가히야가 왕(2년)이 되었으나, 그도 궁중에서의 베가의 반란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베가는 반 앗수르적인 정책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했으나, 호세아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호세아는 앗수르의 보호를 받으며 왕이 되었으나, 기회를 얻어 앗수르를 배반하고, 친 애굽 정책을 펴다가, 결국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bc 722년에 북쪽 이스라엘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세아는, 북쪽 왕들이 이렇게 바뀌고 바뀌는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예언자 활동을 한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부터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를 거쳐,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배신과 반란의 혼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특히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지자 활동을 시작할 때, 즉 여로보암 2세 초기의 북 이스라엘의 형편은, 물질적으로 부요한 시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왕하 14:25이하). 그 어느 때보다도 물질이 풍요했고,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된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 정치적인 안정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함을 누린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며는,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들이 떨었도다.’(호13:1)라는 말씀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사람이 떨었다’는 말은, 북 이스라엘의 창건자인 여로보암 1세가 바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이 말했다는 말은, 여로보암 왕이 말했다는 뜻이고, 그가 말했을 때, 이웃국가와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처럼 그의 부와 명성이, 세계적으로 뛰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는 매우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여로보암의 통치 말년 때부터는, 모든 부분이 것 잡을 수 없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여기에 정치적인 안정이 있을 때, 신앙이 없는 사람은 더 타락하는 계기가 되고,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선한 사업에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경제적인 부는, 더 하나님을 떠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물질적인 풍요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큰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먼저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시고, 그 위에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인 큰 복을 받아서, 그 물질로 하나님의 일에 일심으로 수종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야 바른 믿음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고, 보람되게 사는 것이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선지자에게 임하였는데, 참 엉뚱한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보통 선지자에게 주시는 말씀은, ‘내가 너에게 이른 이것을, 저 백성들에게 말하라.’ ‘이 백성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해라.’ ‘심판이 다가왔으니, 이 백성들을 경고하라.’ ‘예배를 잘 드리라.’고 하라든지, 보통 이런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호세아에게 임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아내를 취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음탕한 여자와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고, 순종하기도 어려운 말씀입니다.
평범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도 안 되겠지만, 선지자는 정결한 사람으로, 그의 부인이나 자식들도 깨끗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한 여인을 얻어 장가를 가고, 그 사이에서 부정한 자식을 낳으라는 말씀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받아드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상식이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만일 음란한 여자를 취한다면, 그의 선교활동에는 큰 지장이 있을 것이고, 또 백성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이며, 하나님의 계명에도(레21:13-14) 어긋나는 명령입니다. 성경에 레위인들이 아내를 취할 때, 어떤 여자를 얻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처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을지니,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나, 창녀 짓을 하는 더러운 여인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에서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으라.”
비록 호세아가 레위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레위인이나 선지자는 같은 종교적 반열의 사람으로 볼 수 있음으로, 호세아 선지자에게도 이 말씀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의 아내도 정결한 처녀여야 하고, 그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아드리기가 어려운 명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그 명령대로 순종합니다. ‘이에 저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취하였다.’고 했습니다(3). 참으로 힘든 명령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른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여자의 행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일단 2절에서는 ‘음란한 아내’라고 했는데, 이는 이미 처녀성을 상실했으며, 더 나아가서 결혼 전에 이미, 아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디블라임의 딸 고멜 그러면, 모든 동네 사람들이 혀를 차며, 손가락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자가 선지자의 부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어쩌면 선지자에게는, 자기 부인이 큰 십자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비참한 사건이, 호세아 3장에 나오는데,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그 명령대로 호세아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살아가는데, 이 여자가 바람이 난 것입니다. 바람난 이 여자를 가리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서, 희희낙락하는 그런 여자인데, 하나님은 선지자보고 하시는 말씀이, 그래도 그 여자를 사랑해라. 그리고 댓가를 치루고 다시 찾아오라고 말합니다.
그 여자를 위해 댓가를 치루라는 말씀을 볼 때, 이미 고멜은 다른 남자에게 재차 시집을 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미 법적으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고멜은 한 남자의 아내라기보다는, 오히려 천한 음부로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그 여자를 사랑해라, 그녀를 위해 댓가를 치루고, 그 여자를 사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은 15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여기의 보리 한 호멜 반은, 앞에 있는 은 15개와 가치가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은 30개인데, 이것은 여종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호세아는 그래도 자기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합당한 가격을 쳐주고, 그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것을 보면 고멜에 대한 호세아의 그 사랑은, 정말 댓가를 지불하는 아픈 사랑인 것 같습니다. 고멜은 호세아에게 큰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호세아가 고멜에게 하는 말이,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고, 이제 죄짓지 말고, 나도 네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부분들을 볼 때, 이 여자가 얼마나 음탕하고 못된 여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은커녕, 용서 받을 수 없는 여자였습니다. 남편을 멀리하고, 자식들을 팽개치고, 오로지 육신의 정욕을 따라서만, 살아가는 정말 보기 드문 여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 여자를 사랑한 것입니다. 바람이 나서, 댓가를 지불하면서도 계속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음녀에 대한 호세아의 불타는 사랑, 끝없는 사랑, 희생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음란한 여자를 선택하여 결혼한 호세아는, 자식을 낳았는데, 첫 아들 이름을 하나님이 ‘이스르엘’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이스르엘은 이스라엘과 발음은 비슷하나, 그 뜻은 완전히 다릅니다. 이스르엘은 ‘하나님께서 흩으시다.’는 뜻이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한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뜻이 아닌 이름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이 이름은 예언적인 의미가 있는 것으로, 먼 훗날 하나님이 이 민족을, 사방팔방으로 흩어버리시겠다는 일종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4절 중반절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후의 집이, 어떻게 멸망할 것인지를 선포한 말씀입니다. 예후는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악한 왕이었던 아합의 집을 멸한 후, 그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를 전멸시킨 사람입니다(왕하 10:19-24).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예후를 칭찬하시고, 그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왕하 10:30). 예후는 나쁜 왕과 우상들을 타파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의 자손이 4대에 걸쳐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따르지 못하고,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떠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그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4대만에 즉,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가랴의 죽음으로 그 가문의 부귀영화가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앞에서도 밝힌 대로,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6개월 만에, 살룸의 반역으로 죽고, 여기서 하나님의 예언대로 예후의 후손은, 4대만에 끝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또 ‘내가 그날에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이스르엘의 골짜기는 전쟁의 마당을 연상시키는 말로서, 우상숭배자 아합의 집이 여기서 진멸되었고, 예후의 집도 여기서 진멸 된 것 같이, 앞으로 이스라엘의 권세도 꺾이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예언대로 9장 17절 말씀처럼,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고멜 사이에서 둘째 딸을 낳았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그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로루하마’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긍휼 혹은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기왕이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이름이면 좋을 텐데,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로루하마로 지어주셨습니다. 이 이름 속에도, 예언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백성은 그들의 심각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도 이 말을 인용한 적이 있는데, 특히 베드로의 이 말씀은 유명합니다. ‘전에는 너희가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9:25, 벧전 2:10). 오늘 우리도 과거에는, 긍휼과 사랑을 받지 못하였던 로루하마였으나, 이제는 긍휼과 사랑을 입은 루하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호세아의 둘째 딸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한 자기계시를 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너희를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호세아가 고멜을 통하여 셋째 아들을 얻는 장면이, 본문 8-9절에 나옵니다. “8 고멜이 로루하마를 젖뗀 후에,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징계가 점점 더, 심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첫째는 이스르엘, 둘째는 로루하마, 셋째는 로암미인데,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는, 단순한 징계를 선포하신 것으로 본다면, 로루하마는 하나님의 은총이 떠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고, 로암미는 더 심하게, 이제는 너희들을 이방인 같이 취급하겠다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더 이상, 내 백성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원문을 근거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네 편이 아니 되리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은 본래 이스라엘의 구주요, 피난처요, 반석이요, 소망이요, 아버지이십니다(시 118:6, 124:1-2). 하나님이 모세보고 ‘이들은 내 백성’이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고(레 26:12, 출 6:7),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서도 이 말씀을 자주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나는 네 편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호세아의 세 아들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따라, 점점 더 확실하게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방으로 흩어버리시겠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너의 편이 아니고, 너는 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점점 더 강도 높게, 철저히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정반대의 말씀을, 10절 이하에서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11 이에 유다 자손과 이스라엘 자손이 함께 모여, 한 우두머리를 세우고 그 땅에서부터 올라오리니,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로다. 2:1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이 구절의 말씀은 심판 뒤에 있을, 회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왕국 자체는 멸망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택한 백성만큼은, 회복시켜 주신다는 소망스러운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그 자손들을 긍휼히 여기심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포로 중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고, 포로지에서 해방되어 귀환할 것이며, 한 국가로 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한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한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또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받는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의 한 우두머리는 메시야를 말한다고 보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하나님 나라가 형성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10절 이하의 말씀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는 멸망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남겨 주시고, 그들을 번성케 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한 나라가, 이어가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거에 긍휼과 사랑을 받지 못하던 자가 이제 또 다시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얻는 자가 되었습니다. 로루하마가 루하마가 되었습니다. 루하마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베푸는 사랑과 긍휼처럼,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베푸는 지극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시편 103:13절에,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30장에도(: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6장 18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특별한 백성으로 취급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과거에는 당신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너는 내 백성이요, 나는 네 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암미가 암미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 같이 큰 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그분이 내편이 되어 주시고, 나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이라고 한다면, 이것처럼 복되고 행복한 관계가 어디 있겠습니까?
본문의 말씀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호세아는 음탕한 여자를 데려다가 결혼을 해서, 부정한 자식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음탕한 고멜은, 타락하고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의 세 자식은 타락의 결과,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적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입니다. 고멜과 그의 자식들이, 이처럼 죄악 되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호세아는 그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의 거국적인 죄로 인하여(1:2하,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행음함이니라)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볼 때,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잘 어우러진 면을 보게 됩니다.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죄악 된 이들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다함이 없고 변치 않으며, 영원한 사랑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빗나간 자식 때문에, 평생을 고통과 눈물 속에서, 애태우며 보내는 나이 많은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자식은, 노름으로 부모의 가산을 다 날려 버렸습니다. 폭력으로 전과도 있습니다. 이혼을 하고 혼자서, 술에 찌들어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식이라고 그 아들을 데리고, 노모가 파지를 주우면서 겨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못해 이웃집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그런 자식 잊어버리지. 그러다가 병나서 일찍 죽겠어. 그런 자식 없는 셈 쳐.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어? 그만 잊어버리게.” 이 말을 듣던 노모가, 잠깐 시름에 잠기더니, 이렇게 대답을 하더랍니다. “나도 잊어버리고 싶어. 그런데 그 자식이 자네 자식이라면, 나도 벌써 잊어버렸겠어.” 그런 놈도 내 자식이니까,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겁니다.
음탕한 저 고멜과 같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부패하고 타락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아닌 우리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있게 해 주신 것,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왠 말인가 왠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그 사랑 얼마나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가리라.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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