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보실 때,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저를 보고 ‘참 잘 생겼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아파트 청소하는 할머니는 볼 때마다, ‘아저씨, 잘 생겼다.’고 ‘어디가냐’고 묻곤 합니다. 그러면 저는 ‘할머니 감사합니다. 저 교회 갑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할머니기 그 말을 듣더니, ‘그래, 교회만 안 났으면 한 가닥 할텐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 믿고 교회 다녀서 목사가 되어서 한가닥 하고 있는데, ‘교회만 안 나가면 한가닥 할텐데’라고 말한 할머니의 말씀을 저는 잘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를 보고, 온화하고 인자하고 지적이고 매사에 똑 뿌러지게 생겼답니다. 이것은 주로 나에 대한 내면을 평가하는 말이겠지만, 사실은 다릅니다. 온화하고 인자하다는 말을 듣기 보다는,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사람, 지나가면 찬바람이 쌩쌩 분다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매사에 지적이고 똑 뿌러진다는 것도, 조금은 맞지만은 저도 두루뭉술하게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길을 가는데 여러분 중에 누가 술을 잔뜩 먹고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가고 있어서, 제가 가서 부축하려고 하는데, 부인 집사님이 나타나서, ‘이 인간이 똑 처먹었어. 빨리 타.’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저는 목사로써 참아 다가갈 수가 없어서, ‘저 집사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가, 얼마나 괴로우면 저렇게 술을 마셨을까’-이렇게 생각하고 애써 외면하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때가 있었습니다.
선후배 목사들과 제자들을 통해서는 주로, ‘가르치기도 잘하고 목회도 잘하는 목사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신학대학에서 정식 교수로 있으면서, 교회를 개척하여 이렇게 성장시킨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두 가지의 일을 하기가 쉽지 않지만, 20-30년 동안 이 두 가지 일을 잘해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사실 다른 것보다 이 말, 이런 평가를 듣는 게 제일 기분이 좋습니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중요합니다. 물론 그 평가가 나름대로의 근거 있는 객관적인 평가일 때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족들로부터, 교우들로부터, 직장 사람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자들이 되시고, 더더욱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에서 이제,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다른 교회성도들이 우리를 볼 때,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우리 주위에는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교회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또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우리 가정을 보거나, 우리 교회를 볼 때, 어떻게 평가하겠습니까? 선하고 좋은 긍정적인 평가를 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안 좋은 부정적인 평가를 할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인간적인 면으로만 보거나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거기에는 여러 파가 생길 수가 있지만, 너희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볼 때, 여기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었던 파벌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파당 문제에 대한 결론으로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일꾼’은 가장 낮은 노예의 신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배 밑창에서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노를 젖는 하급노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낮추면서, 겸손한 태도로 자기를 이렇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일꾼’은, 그리스도에게 종속되어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이나 돈, 명예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꾼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너희들에게 속한 것도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하여 있는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밀’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하는 것입니다(골2:2). 다른 말로, ‘천국의 비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들에게만 천국의 비밀을 나타내고, 다른 사람에게는 숨겨졌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3:11). 또 다른 말로는, ‘계시된 진리’를 말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비밀을 ‘천국의 비밀’, 또는 ‘계시된 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맡은 자’는, 집 안 일의 관리자를 말합니다. 집 안의 행정이나 재정을 관장하는 지배인이나 관리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일꾼이라는 단어보다, 보다 조금 높은 중간 관리인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일꾼’이나 ‘맡은 자’는, 주인 앞에서는 동일한 종의 신분인 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결국 이 둘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나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같다는 것입니다. 일꾼이 비밀을 맡은 자이고, 맡은 자가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바울 일행은 고린도교우들에게 자기들을 이렇게 보아달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청지기와 일꾼에게는 학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인물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언변이나 세상적 지혜, 돈이나 명예가 중요한 게 아니라, 충성심입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이나 명칭, 신앙 연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충성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충성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1장 1절에서는, ‘성실’이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충성이라는 말과 성실이라는 말은 같은 뜻이라고 봅니다.
충성은 주님의 대표적인 성품이십니다. 평생에 걸쳐 주님은 충성스러운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장 5절에,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가리켜 충성된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계시록 3장(:14)에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면서,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주님을 일컬어 충성되다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으로 충성을 하였고, 주님은 아들로 충성을 다하셨다.’고 했습니다(3:5-6). 여러 성경들을 볼 때에, 주님은 이 땅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하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충성의 대명사입니다.
우리도 그 주님을 본 받아,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충성해야 하겠습니까? 하나입니다. 섬김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김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꾼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함으로 잘 섬기고, 이웃은 사랑함으로 잘 섬기고, 교회에는 충직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으로 섬기는 것입니까? 기도로 섬기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수요기도, 금요기도, 릴레이기도에 참여하여, 기도로 우리 가정을 비롯하여, 교회와 이 민족과 전 세계를 섬기는 것입니다.
물질로 섬기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건축헌금을 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교회를 사랑하는 운동에도 동참해 주셨습니다. 통장에 있는 여유 자금에서, 퇴직금을 돌려서, 집을 담보로, 적금대출을 해서, 마이너스 통장에서, 정말 마음 중심으로 이 운동에 동참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물질로 교회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몸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와서, 식당에서 봉사하고, 차량부에서 봉사하고,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새가족 부원으로, 헌금위원으로, 청소로, 섬기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전부 몸으로 섬기는 이들입니다. 너무너무 귀한 섬김의 손길들입니다.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목사들이나 교사들과 구역 인도자들은 다 말씀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칠 때, 성실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충성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로 섬기고, 물질로, 몸으로, 말씀으로 섬김으로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굴림하고 억압하고 명령함으로 일을 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섬김으로 충성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직분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더,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집사들보다는 권사님이, 권사님보다는 안수집사님들이, 안수집사님들보다는 장로님이 더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곡식이 익으면 익을수록 더욱더 고개를 숙이듯이, 오래 믿고 신앙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욱더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자세로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 주시면서,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들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들도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처럼 높고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분이,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섬기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겸손히 남을 섬겨야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에 충성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일꾼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기 때문에, ‘천국의 비밀’, ‘계시된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복음 전파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분배하는 일입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맡겨주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것입니다(칼빈).
맡은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 말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충성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2:1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먼저 죽을 때까지 하라는 말씀입니다. 충성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하고,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고 일편단심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에는, 죽을힘을 다하여 충성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충성의 정도를 말하는 것이고, 충성의 농도를 말하는 것으로, 옅으면 안 되고 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충성하는 것입니다. 혹시 교회를 섬기다가 어려움이 오고 시험이 오고 환란과 핍박이 와서, 끝까지 있는 힘을 다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은 주님이 버가모 교회를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 버가모는 네 개의 중요한 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제우스와 아테네, 디오니수스, 아스클레피우스입니다. 그러니까 온 천지에 이런 신을 섬기는 신전들이 있었고 주민들은 매일 이런 신전에서 제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도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숭배가 성행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주의 이름을 붙잡고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주님이 그 사람을 이렇게 칭찬을 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내 충선 된 안디바가 죽을 때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와 타협하지 않고 비록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어도,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함경도 어촌에 한 소년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40척의 고기잡이 배가 한척도 돌아오지를 못하였습니다. 폭풍으로 인하여 모두 침몰된 것입니다. 소년의 가족은 그 많던 재산을 피해자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빈손으로 그 동네를 떠났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소년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어 카나다 선교사의 가정에 머슴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년은 그 집안의 온갖 궂은일들을 다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제일 어려운 것인 맨손으로 빨래하는 것이었답니다. 힘들기는 했지만 나무도 하기도 하고, 가정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했답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가끔 이 소년을 시험에 보기도 했습니다. 보일만한 곳에 돈을 놓아두고, 그 돈에 손을 데는지 데지 않는지를 관찰해 보았는데, 이 소년은 절대로 그 돈에 손을 데지 않더랍니다. 정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은 시키는 대로 모든 일들을 성실하게 잘 감당하였습니다.
선교사는 그 소년을 서울로 데려와서 교육을 시켰습니다. 공부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었습니다. 이 소년이 한국에서 제일 첫 번째로 미국에서 구약학 박사를 받은 김치선 박사입니다. 서울역 맞은 편 대우빌딩 뒤편에 있는, 남대문교회 초대 담임목사를 지냈고, 우리교단을 설립한 사람입니다. 눈물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입니다.
김치선은 어린 나이에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충성을 했고, 공부할 때도 성실했고, 목회를 하면서도 신학교를 운영하면서도 충성을 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하고 성실했던 그를, 하나님이 평생 동안 아름답게 사용하신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안디바와 김치선 목사님처럼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우리 주님과 바울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에 끝까지 끝까지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오늘 장로로 취임을 하시는 민병일 장로님은, 죽도록 충성하여, 하나님 앞에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으시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며, 많은 것을 맡아 다스리는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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