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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에 끼어 어떻게 살것인가?
이정현 목사 2017-06-18 추천 0 댓글 0 조회 5725
[성경본문] 빌립보서1:19-30 개역개정

19.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빌1:19-30, 둘 사이에 끼어 어떻게 살 것인가?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자기는 지금 이곳에서 풀려나서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아니면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아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바울이 살고자 했으면 왜 살고자 했으며, 죽을 것을 각오했으면 왜 죽을 것을 각오했겠습니까? 바울의 각오와 결심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약 감옥에 갇혀 있다면, 다 석방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무런 법적인 잘못이 없고, 오로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있다면, 더더욱 하루 빨리 출옥하여 자유로운 몸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교우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가 이곳에서 구원 받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감옥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게 될 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무엇을 통하여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느냐 하며는,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고, 또한 성령의 도와주심으로 인하여 출옥하게 될 줄로 알았다고 했습니다(19). 그래서 기도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출옥할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날을 바라보며 지금도 전과 같이 여전히, 나는 담대히 복음을 전하므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기 원한다고 말합니다(20). 존귀하다는 말은 ‘크게 하다.’는 뜻입니다. 자기는 작아지고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크고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의 신발끈을 매어주는 자도 될 수 없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먼저 나신 분이라고 하셨듯이, 바울도 자신은 낮추고 그리스도를 높이고 크게 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구원 받게 될 줄로 확신하지만 그날까지 가만히 놀고만 있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전처럼 여전히 복음 전파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25-26절 말씀을 볼 때, 바울은 살아서 빌립보교회를 다시 방문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 ‘내가 살 것과’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것을 확실히 안다.’고 했고, 26절에서는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라는 말을 써서 분명이 그는 감옥에서 나가서 빌립보 교회를 방문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서 너희에게로 가서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동일한 구절에서, 바울이 자유를 얻어 성도들을 만나 무엇을 하겠다고 하였습니까? 25절에서는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라고 했고, 다음절에서는 ‘주님 안에서 나로 말미암아 너희 자랑이 풍성하게 하려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는 곧 내가 너희를 방문하므로, 너희 믿음의 진보가 있기를 원하고, 기쁨이 있기를 원하고, 아울러 너희의 자랑이 풍성하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풀려나서 너희에게로 감으로, 이런 유익이 너희에게 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모로 생각해 본 결과 내가 사는 것, 내가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4절입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서 자유를 얻어 살 것만을 생각하지 않고, 죽는 것도 각오하고 있고, 그것역시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대부분 몸이 아프면 낫기를 원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빨리 집에 오고 싶어 하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석방되기를 원하고, 죽게 되었으면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자가 석방되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고, 비록 다 죽게 된 자라 할지라도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이곳에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말의 의미는, 바울은 지금 이곳에서 순교하더라도, 내 영혼은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임으로 그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내 편에서 생각하면 내가 사는 것 보다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주와 함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사는 것보다 이것을 더 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을 선택할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서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바울도 그렇지만 사람은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살고 죽는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어느 편을 선택해야하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고 했고, 정확하게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서 사는 존재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 부분의 결론으로, 나는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하면서,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하나,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내가 좀 더 사는 게 났겠다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떠나다는 말은 ‘풀다, 풀리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문제를 풀다’, ‘노예에서 풀리다’, ‘출항하다’, ‘장막을 걷다.’라는 문장에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을 때는, 죽음을 인생의 모든 문제가 풀리는 날로, 죄의 노예에서 풀리는 날로, 이 세상 항구에서 저 세상으로 출항하는 날로, 또한 이 세상 장막을 걷는 행위로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23절과 24절에서는 ‘더 좋은 것’과 ‘더 유익한 것’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더 좋은 것보다 더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유익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더 재미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성숙한 신자가 되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보다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고, 세상의 좋은 것보다 영원히 유익한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중에 믿는 사람조차도, 자기가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주님을 믿었지만 닮아야 할 주님은 닮지를 못하고, 세상을 닮아서 이상한 크리스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울을 본받아서, 좋은 것보다 유익한 것을 선택하여 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27절 이하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구체적으로 권면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권면을 27절 상반절에 두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한 권면이고,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이 말씀의 해석과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사실은 ‘오직’이라는 말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오직이라는 말은, 이 한 가지는 꼭 지켜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말은, ‘진지하게, 가치 있게, 수준에 걸맞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함부로 인생을 살지 말고, 또한 무의미하게 살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걸맞게 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영 선수에게는 거기에 걸 맞는 옷이 있고, 신랑 신부에게는 거기에 걸 맞는 옷이 있고, 중년 신사에게는 거기에 걸 맞는 옷이 있듯이, 기독교인들에게는 거기에 걸 맞는 기독교인의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하라’는 말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다.’라는 뜻입니다. 로마에 큰 전쟁에 하나 있었는데,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권력 싸움이었습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고 전쟁에 승리하였습니다. 이에 승리한 옥타비아누스가 이 전쟁에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빌립보에 이주하여 살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공을 세운 자들에게 살기 좋은 땅을 배분하여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보는 군인도시였고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심이 대단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고, 시민의 의무를 다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황제를 존중하고 숭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은 로마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로마인처럼 살았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걸맞게 자부심을 가지고 하늘나라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빌립보 시민들이 대부분 로마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로마의 가치관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존중하고, 복음을 가치 있게 여기고, 그 복음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바를 철저하게 실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곧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전쟁에 승리하기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싸우듯이, 미식 축구에서 상대팀 선수에게 밀리지 않기 위하여 선수들이 어깨를 맞대고 나아가듯이, 우리 모두도 일심동체가 되어서 복음을 위하여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빌립보교회 내에 불협화음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서로 한 마음이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복음전파를 위하여 협력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함께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교인들이 어떤 일에 대해서도 대적하는 자들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나에게 들려오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대적자는 황제를 숭배하는 빌립보 시민일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리 예수를 믿는 너희를 핍박 하고 학대한다 하더라도, 너희들은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겁니다. 우리는 복음의 전사이고 그리스도의 전사이기 때문에 어떤 일 앞에서, 누구 앞에서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믿지 않는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의 표적이 되고,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은 어떤 일을 만나든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럼으로 믿음으로 의연하게 당당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절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을 의지하고 꿋꿋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29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가지 은혜를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그를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존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하면 ‘주님을 계속해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왕으로, 주인으로, 반석으로, 선한 목자로 지속적으로 고백하며 섬길 수 있는 것은 분명 크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가 결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예)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주님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않으면 베드로는 절대로, 주님을 구세주로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변함없이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두 번째는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고난도 은혜요 신자의 특권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고, 고난을 통해 우리를 낮추기도 하시고, 고난을 통하여 더 겸손한 자리에 가게도 하십니다. 이렇듯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겸손을 배우게 되면 그 고난은 은혜로 남지만, 그렇지 못하면 고난은 원망과 자기학대로 남을 수 있습니다. 바울처럼 감옥에 갇혀서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이고, 교인들이 감옥 밖에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은혜를 말한 바울은 이제 1장 마지막 구절에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은 곧 사단과의 영적 싸움입니다. 과거에도 이 싸움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이 영적 전쟁을 할 것입니다. 

빌립보교우들은 바울의 이런 모습을 보기도하였고, 듣기도 하여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성도들 역시 이런 고난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1. 바울은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했습니다. 죽음과 삶 사이에 끼어 있고,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과 성도들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 사이에 끼어 있고, 더 좋은 것과 더 유익한 것 사이에 끼어 있다고 말합니다.

둘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오로지 내 몸에서 예수만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그러나 성도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그것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토록 자기가 좋아 하는 것을 위해 살지 않았고, 타인에게 유익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유익이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고 구역식구들에게 유익이 되고, 학생들에게 유익이 되고, 자녀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내가 좋아하는 취미나 스포츠나 시간이나 모임이나 물질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 있는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하여 살기보다, 남에게 유익한 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권면한 말씀을, 오늘 우리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라.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걸맞게 자부심을 가지고, 하늘나라 시민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가르치는 바를 철저하게 실행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는 말은, 한 마음으로 함께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다음달부터 EG The One 아파트와 한라 1차 아파트에 가서 전도해야 합니다. 무더운 여름철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전도해야 합니다. 여름철 휴가도 끼어 있습니다. 전도 현장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도 있고, 전도 물품을 준비해 주는 사람도 있고, 또한 전도 물품을 구입해 주시는 분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직접 나가서 전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전도 물품 구입비를 헌금해 주시거나, 전도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거나, 음료수라도 사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한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여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복음의 전사이고 그리스도의 전사이기 때문에, 어떤 일 앞에서, 누구 앞에서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믿으십시오. 비록 복음을 전하다가 대적자들을 만난다 하더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복음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쉬지 말고 이 영적 싸움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날마다 영적 전쟁에 승리함으로, 복음에 합당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 군인들이 사랑하는 고국으로 개선행진을 하며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런던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돌아오는 군인들을 기다렸습니다. 영국의 상하의원들이 모였고, 영국의 귀족들이 길 양쪽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영국의 여왕도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군인들의 개선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육군이 지나가고, 이어서 해군과 공군과 해병대가 지나갑니다. 마지막으로 작은 한 부대가 지나가는데, 영국의 여왕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상하의원들도 일어났고 귀족들과 모든 시민들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작은 부대를 향하여 한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작은 부대는 상이군인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습니다. 전쟁터에서 싸우다가 팔과 다리를 잃어버리고, 어떤 사람은 눈을 잃어버리고, 몸의 일부를 잃어버린 상이군인들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모든 삶이 끝나고, 역사의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누가 과연 박수와 칭찬과 존경을 받을까요? 여기의 상이군인들이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가 자기 몸의 일부를 잃었던 것처럼,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았던 성도들이 아닐까요? 복음을 전하다가 자기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진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고난이 있어도, 복음에 합당하게 삶으로, 주 앞에서 칭찬 받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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