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 교우들에 대한 간절한 호소
이정현 목사
201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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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빌립보서2:1-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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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빌2:1-4, 빌립보 교우들에 대한 간절한 호소
원래 저의 설교 계획은, 5월 말부터 시작을 해서, 매 주일마다 빌립보서 전체를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1장부터 시작해서 4장 끝부분까지 조금 조금씩 계속해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몇 분들에게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 보았더니, 몇몇 분이 매 주일 바울 얘기만 하니까 조금 지루한 감이 있다고 해서, 2장까지만 하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3장과 4장을 이어서 설교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지금까지 몇 주에 걸쳐서 빌립보서 1장을 살펴보았습니다. 1장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문안하고요, 이어서 바울과 빌립보 교우들과의 끈끈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말하고, 그리고 바울의 매임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말씀과,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울은 죽음과 현실 사이에 끼어서 사는 존재로 오로지 주의 복음만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면서, 너희도 복음에 합당하게 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오늘은 1장에 이어서 2장 처음부분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에 대한 권면의 말씀인데, 이 권면은 간절한 호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빌립보 교우들에 대한 간절한 호소’라고 정했습니다. 너무 중요하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듯 권면하고 있으므로, 바울의 마음을 생각하며 이 말씀을 귀담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1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장이 네 가지 조건절로 되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만약 너희에게 권면이 있다면, 위로가 있다면, 교제가 있다면, 또한 긍휼과 자비가 있다면’이라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문장은 조건절이 아니라, 이유절로 되어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너희에게 그리스도의 권면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위로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교제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긍휼과 자비가 주어지고 있기 때문에’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본문 1절을 조건절로 번역을 했지만, 2절 이하의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하여 설명하려면, 조건절로 해석하기 보다는, 이유절로 해석하는 것이 더 작당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본인은 1절을 이유절로 보아서, 그 이유 때문에, 2-4절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절의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에, 2-4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우들에게 1절이 주어졌고, 또한 계속하여 주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네 단어, 즉 권면, 위로, 교제, 긍휼(자비)을 주목해야 합니다. 과거의 교회이든 현대의 교회이든 그 교회가 주님에 의해 세워진 교회라면, 그 교회 안에는 이 네 가지가 항상 풍성해야 합니다.
첫 번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라고 했는데, 이는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로와 격려와 힘이 주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교회에 힘과 위로와 격려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지치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좌절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주님을 통하여 교회에 위로와 격려와 힘과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의 ‘사랑의 무슨 위로’는, 하나님이 말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늘 가까이서 돌봄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위에는 항상 하나님의 넓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한없는 위로와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령의 무슨 교제’는, 성도들이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할 수도 있고, 성령님과의 교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교제를 통하여 성령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긍휼과 자비’라는 말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어나는 애정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악 됨에도 불구하고 멸망되지 않고 이렇게 은혜 가운데 살 수 있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깊은 애정과 항상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네 가지가 빌립보교회에 있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힘과 위로와 격려를 주고 계시고, 하나님의 한없는 위로와 평안을 주고 계시고, 성령님과의 끊임없는 교제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깊은 애정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그 교회에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기 때문에, 2절 3절 4절의 사람이 될 것을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 위에도, 우리 교회 위에도 하나님은 지금도 앞으로도 이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힘과 격려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내가 새 힘을 주시리니, 독수리가 날개침 같을 것이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으며 달려가도 곤비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한없는 위로와 평강으로 함께 하실 것이며, 성령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성공적으로 우리를 성화의 길로 인도해 가실 것이며, 또한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받고, 앞으로도 계속 받을 사람들이라면, 어떤 신앙 공동체, 어떤 성도들의 모임을 만들어야 할까요? 빌립보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너희는 마땅히 이런 성도,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2, 3, 4절에서 각각 한 가지씩 얘기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하나가 되라.’고 하십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2절은 하나의 뜻을, 네 번에 걸쳐 약간씩 다른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 뜻을 합하며.’ ‘ 한 마음을 품어.’라고 했습니다. 하나가 되라는 말은, 같은 조직체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또한 단순한 의견일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소망교회라는 한 조직체 안에 있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인가요? 우리가 아파트 전도하는 일에 의견일치를 보았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인가요?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라고 할 때에는, 마음이 같아야 한다는 것이고,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하고, 뜻이 하나여야 하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음, 한 뜻, 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둘이 모이든 수백 수천 명이 모이든 한 마음을 가져야 되고, 한 뜻을 향하여, 같은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달에 3개 아파트가 사전점검일이 있는데, 우리교회가 이때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8월말부터 입주가 시작이 됩니다. 그러면 3개 아파트는 10월 말까지 계속 입주를 하게 됩니다. 이때 어떤 분들은 시간을 내서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도하는 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적든 많든 전도 물품을 구입하는데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박모 김모 집사님 부부가 200만원, 그리고 김모 권사님이 13만원의 전도 물품 구입비를 헌금해 주셨습니다. 혹 어떤 분들은 전도하는데 수고한다고, 현장을 찾아와서 위로와 격려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까지도 못하시는 분들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전도를 위하여 힘써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사랑으로 수고하고 애를 쓰는 것을, ‘우리는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소망교회의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전도하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하고 무관심하다면, 또한 나는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 건강이 없다, 나는 전도 방법을 달리한다며 전혀 협력하지도 않는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나누어지거나 분리되지 않으신 것처럼, 제자들도 하나로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 받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목표를 향하여 계속 가야 하는 것입니다. 가다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고 싸우고, 결국에는 갈라서고 분리되고 당을 짓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빌립보교회는 당시 국제도시인 빌립보에 위치해 있었고, 교인들도 다양했을 것입니다. 아시아 출신의 여성 사업가 루디아도 있었고, 그리스 태생의 여성도 있었고, 로마 사람 간수의 가족들도 있었고, 낮고 천한 여종도 있었고, 그 외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교회의 형편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이었기에, 이기심, 편견, 질투를 버리고 하나가 되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유력한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이런 저런 일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그들을 향해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은, 그들이 교회 일을 하면서 주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이런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거듭 간절히 호소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라.
저와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많이 받았다면,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받을 것을 확신하다면,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소망교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누어지지 말고 주님 오실 때까지 한 마음, 한 뜻, 같은 사랑으로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절에 이어 바울이 3절에서 간절히 호소하는 것은,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또한 지속적으로 받을 사람은,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툼과 허영’에서 다툼은, 개인의 이기적 야망에서 나오는 행위를 말하는데, 이는 다른 사람을 깔아 문대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허영은 이상이 결여된 공허한 상태를 말하는데, 충실하지 못하여 텅텅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결국 다툼과 허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허세를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자랑하면서 다툼과 허영을 부렸고, 헬라인들은 이 세상의 지혜와 문화를 가지고 다툼과 허세를 부렸지만, 기독교인들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다투고 허영을 부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루터는 다툼과 허영이라는 이 두 말을, ‘다른 사람을 때려눕히고, 자신을 일으켜 새우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자신을 높이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때려눕히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이런 행위는 분명 교회가 하나 되는데, 심각한 방해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것은, 분명 빌립보교회 안에 이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잘 못된 마음과 행동을 바로 잡아 주고픈 생각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악을 고치는 것이, 곧 겸손한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겸손은 한 마디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남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남을 좀 더 존중하고, 남에게 더 감사하고 남을 더 배려하는 것이,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인 것이고, 그럴 때 서로간의 다툼과 허영은 사라지고,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 3절을 거꾸로 말하면,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길 때 겸손한 것이고, 겸손해야 다툼과 허영을 극복할 수 있고, 그래야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 하라.”고(벧전3:8) 하셨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항상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몇 곳의 성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겸손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음으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15:9)고 하셨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기”(엡3:8) 위함이라고 말씀하셨고, 디모데전서 1장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하셨습니다. 빌립보 교우들에게 겸손하라고 권면하는 바울은, 그 이전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혹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큰 죄인으로 볼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바울처럼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여기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더 감격 하는 것입니다.
3절의 이 말씀을 2절의 말씀과 연결하여서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자만은 하나 됨을 깨뜨리나, 참된 겸손은 하나 됨을 강화할 수 있다.’ 우리 모두 겸손하여 똘똘 뭉쳐서 하나 됨을 지켜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마지막 간절한 호소가 4절에 나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다른 한글 성경에는 4절을 이렇게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각기 이기적 마인드로 자기 유익만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해야 한다.’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라.’ 한 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자기 이익, 자기 실속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자기처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만 챙기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성경을 따라야 하는데, 오늘 성경에서는 보편적 삶의 방식을 따르지 말고, 너희는 타인의 유익을 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입술로만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삶의 방식을 성경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이익과 실속을 챙기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이익만을 챙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 실속을 챙기는 것처럼 남의 이익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형편과 처지를 서로 살펴보아야 하고,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주어야 하고 남에게 유익한대로 일을 처리하라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남의 것을 갈취하여 자기 것을 삼으려고 하는 것은 이 권면(성경)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산다할지라도,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의 유익을 생각하고 이웃의 실속을 생각하며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 마지막 부분에,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말씀은, 원문에는 2절 앞부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2절 뿐만 아니라, 3절과 4절에 다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2절에서는 ‘하나 되어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뜻이고, 3절에서는 ‘겸손하여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뜻이고, 4절에 ‘서로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살기만하면, 자기가 너무 기뻐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기쁨은 ‘내면의 기쁨, 영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빌립보 교우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주를 섬기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겸손하게 살고, 서로 돌아보며 살아갈 때, 바울의 내면에서 울어나는 영적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주님에게도 기쁨이 될 것이고,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결론
칼빈이라는 사람은 ‘교회가 잘 되어가고 있다는 주요 표시’로, ‘상호 협의와 형제간의 조화’로 보았습니다.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같이 교회 일하고 봉사하는 것이 있을 때, 그 교회가 잘되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 은혜로운 교회, 잘되는 교회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주의 일에 힘쓰는 교회입니다. 우리교회는 서로 싸우지 말고 당을 짓지 말고 분리되지 말고 항상 하나로 존재하여 멋지게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입니다. 항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JOY 선교회라고 있습니다. 영어의 JOY는 Jesus first, other second, you third라는 말의 제일 앞 글자를 딴 것입니다. 크리스찬은 결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주님보다 앞세우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래야 기쁨이 있다는 예기입니다. 주님을 항상 첫 번째로 두고, 다른 사람을 두 번째로 두고, 나를 세 번째로 두면 교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항상 겸손한 식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돌아보며 남의 유익을 위해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사람들입니다. 주 안에서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의 이 관계는 이 세상에서 끝나는 관계가 아니라 저 천국에까지 이어집니다. 주위 형제가 먹지 못할 때, 이웃이 헐벗고 있을 때, 자매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서로돌아보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바울의 간절한 호소대로 삶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 겸손한 공동체, 서로 돌아보는 공동체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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