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다니엘6:10-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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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11. 그 무리들이 모여서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을 발견하고
12. 이에 그들이 나아가서 왕의 금령에 관하여 왕께 아뢰되 왕이여 왕이 이미 금령에 왕의 도장을 찍어서 이제부터 삼십 일 동안에는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니 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확실하니 메대와 바사의 고치지 못하는 규례니라 하는지라
13. 그들이 왕 앞에서 말하여 이르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왕과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 하니
제공: 대한성서공회
단 6:10-13, 다니엘의 감사
서울소방방재본부에 소속된 119구급대는 1년이면 약 30만 번을 출동한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는 1년 동안 29만 2천 번 이상 출동을 해서 21만 2천명을 구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구조된 사람들 중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사를 표현사람은 100명 중 3명밖에 안 된답니다. 위험한 상황 속에서 구조를 받고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감사하지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는 ‘감사가 실종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지 말고 이 세대사람들과 구별되게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기독교인들의 감사는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게 되고 더 큰 감사거리를 가져다줍니다.
감사를 하되, 형식적인 감사, 다시 말해서 감사헌금 안할 수는 없고, 하자니 아깝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애들 용돈 주듯이 몇 푼 넣어서, 봉투에다가 ‘하나님 다 아시지요’라고 써서 헌금하는 데, 하나님 진짜로 그 마음을 다 아십니다. 형식적인 감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감사헌금을 하되 의무적인 마음으로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이니까 인사치레는 해야지, 내가 명색이 교회의 집사인데, 권사인데, 장로인데, 체면치레는 해야 된다고 생각하여 헌금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식적인 감사와 의무적인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구약의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어떤 감사였습니까?
1. 다니엘의 감사는 환경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감사할 수 없는 환경 중에서 감사했습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바벨론 나라로 포로로 잡혀간 사람입니다. 바벨론이라는 포로지에서 종살이를 해야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 은혜로 다니엘은 높은 국무총리의 자리에 앉아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 온 한 사람이 이렇게 높은 자리에 앉아 지혜롭게 나라를 다스리다보니까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신들이 다니엘을 죽이기 위하여 계략을 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이런 계획을 말하는데, 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겉포장을 잘해서 말하기를, ‘지금부터 30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왕은 좋게 여겨서, 조서에 도장을 찍어 전국 120개의 도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비롯하여 같이 포로로 잡혀온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모진 시련 속에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겨오고 있으며 그 하나님께 기도하고 왔는데, 이제 앞으로 30일 동안은 자기들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당시 바벨론의 왕권이나 군사력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들은 왕의 이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니엘은 특별히 왕 바로 밑에서 일하는 국무총리이기 때문에 왕의 명령을 지엄하게 우선적으로 받들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다니엘은 왕의 명령을 따르나요, 아니면 하나님께 계속하여 기도하나요? 다니엘이 만약 이 시점에서 왕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되면 그는 사자굴 속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환경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계속하여 기도합니다. 그것도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10). 이것은 분명 다니엘이 처한 환경을 초월한 기도요 감사였습니다. 기도하면 죽지만 그래도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면 국무총리라는 자리가 날라가지만 그래도 그는 무릎 꿇고 하나님께 감사기도하였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인간이 생각해 볼 때 감사할 수 없는 환경인데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환경이 좋아지고 소득이 많아지고 모든 것이 넉넉하고 풍성해지면 감사를 하는 척하다가, 환경과 여건이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면 감사하는 일은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포프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입술로만 하는 감사는 부분적인 감사로서 힘이 없고, 이랫다저랫다 자주 변하는 감사는 위력이 없다.’고 했습니다.
시편기자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고 하셨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란 믿음과 행위가 일치된 감사를 말합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가 따라오지 않으면 참된 감사가 아닌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믿음과 행위로 감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충북 영동군 학동리에서 농사를 짓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수확의 계절 가을이 되었습니다. 그 해의 농사는 풍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을겆이를 할 때 쯤 태풍이 몰려왔습니다. 태풍으로 인하여 이 성도의 논에 누렇게 익은 벼가 80% 정도가 쓰러졌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써 얼마나 낙담이 되고 상심이 컸겠습니까? 그래도 쓰러진 벼 이삭을 세워보겠다고 논으로 나가서 한 포기 한 포기 쓰러진 벼이삭을 모아서 묶어두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동네 사람이 ‘아이쿠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벼가 다 쓰러졌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의 논의 벼가 쓰러지지 않고 내 논의 벼가 쓰러졌으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직도 쓰러지지 않은 20%가 있으니 감사합니다. 또한 쓰러진 것도 일으켜 세울 정도로 넘어지게 한 것을 감사합니다.’ 이런 감사를 환경을 초월한 감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감사기도하면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 환경을 초월하여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감사기도하였습니다.
2. 다니엘의 감사는 절망 중에 감사한 것이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진정한 감사가 없고 감사의 위력도 상실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은 더 많아지고 풍성해지는데, 왜 감사는 점점 더 사라져 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상황에 따라 감사의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황이 좋아지면 감사하고 상황이 나빠지면 원망 불평하는 것은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믿는 자라고 한다면 상황이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나쁠 때도 절망 중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처한 지금의 상황은 좋았습니까 아니면 나빴습니까? 지금 굉장히 안 좋은 상황입니다. 기도를 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의 상황이고 기도하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사람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지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뒤를 보아도 절망이고 앞으로 보아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분명 다니엘의 상황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도 다니엘은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앞에 놓인 사자굴을 보면서도 그는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명이 지금 풍전등화와 같음을 알고도 그는 하나님께 하루 세 번이나 감사기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분열왕국 시대 때 남쪽 유다의 제4대 왕이 여호사밧이었습니다. 이 왕이 남쪽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하루는 모압 족속과 암몬 자손과 마온 사람이 연합하여 침략해 왔습니다. 연합군의 군사력은 대단했기 때문에 유다백성들이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께 엎드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이때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만 신뢰하라고 말하고, 찬양대를 세워서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찬송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저 진영 가운데 역사하셔서 그들을 다 죽이게 됩니다. 땅에 엎드려진 것이 시체뿐이요 하나도 피한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대하 20:21-24). 이 같은 전쟁의 위기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사밧과 그의 찬양대는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며 나아갔을 때, 하나님이 승리를 안겨주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이 환경을 초월하여 감사하지 않으면, 절망이 찾아올 때 결코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조건 때문에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환경 때문에 감사하는 것도 아니라 절망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절망 중에도 진실로 감사할 수 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하박국 선지자가 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하박국 선지자에게 ‘내가 바벨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 하박국 선지자는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릴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또 뼈가 썩는 것 같은 충격 때문에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당시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는, 의인은 많은 고난을 당하는데 어찌 악인들은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하나님이 이 백성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창자가 떨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은 두려움 가운데 있으면서 하박국은 이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감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 고백은 상황이 좋을 때, 모든 것이 평탄하게 잘 되어갈 때 나온 고백이 아닙니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되면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할 거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것이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 것이고, 밭에는 식물이 없을 것이고, 우리와 외양간에 짐승이 없을 것이나, 나는 그래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물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감사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절망 중에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독실한 남자 성도가 혀 암에 걸려서 여러 달 치료를 받았으나 점점 악화되어 혀를 잘라야 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하기 전에 의사가 환자에게 ‘이 수술을 하고 나면 이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수술실 분위기는 침울하였고 의사들과 간호사들 모두는 긴장된 모습으로 환자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때 환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답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이렇게 절망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3. 다니엘의 감사는 결과를 생각지 않는 감사였습니다.
다니엘은 고달픈 포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착실하게 믿었던 결과가 사자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찾을 때 흠과 티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게 살았고, 늘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는데, 그 결과가 사자굴에 들어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믿음의 결과가 처참하였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의 감사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감사입니다.
교인들 중에는 얻어진 소득과 되어 진 결과를 보고 감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음 달 사업이 대박나면 감사하겠다거나, 자녀들이 이번에 수능성적 몇 점 이상이 나오면 감사하겠다거나, 이번에 딸냄이가 취직을 하면 감사를 하겠다거나, 이번에 부모님 수술이 잘 되어서 건강하게 퇴원하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결과를 따지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잘되면 감사하겠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의 감사는 결과를 생각지 않는 감사였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은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차기 왕을 스코틀랜드의 국왕이었던 제임스 6세를 왕으로 세웠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그 유언을 따라 제임스 6세를 데려다가 영국의 왕으로 세웁니다. 그 사람을 영국에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국교가 성공회였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개신교가 성행했었고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중에 철저하게 신앙생활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불렀습니다. 이들 두 종교단체가 제임스 1세를 만나서 종교적인 문제를 의논하려고 했습니다. 영국 국교회 대표가 먼저 왕을 만났고 후에 개신교청교도들이 왕을 만났습니다. 이때 청교도들이 교회의 개혁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왕이 이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을 만난 자리에서 ‘주교가 없는 나라는 국왕도 없다.’라는 말을 함으로 완전히 성공회 편이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왕에 대하여 큰 실망을 하였습니다. 이때의 청교도들은 갈팡질팡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 투쟁을 하자는 입장이고 다른 한편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나른 나라로 가자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결국 청교도들은 일부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영국 남쪽 해안에 있는 사우스 햄프튼항을 떠나 화란으로 갔습니다. 1607년 화란의 라이든 시에 집결하여 신앙생활을 하였고 자녀들은 라이든 대학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대학 신학부에 새로운 조직신학 교수 한명이 들어왔는데 ‘아미누스’라는 교수입니다. 이 사람은 칼빈의 견해를 부정하고 자기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11년간의 화란 생활을 정리하고 아메리카로 가기로 한 것입니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암스텔담 항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는데 2개월이 걸렸습니다. 배가 미국 해안에 거의 접근했을 때는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행선지와는 거리가 먼 동북부 해안에 간신히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안전지대가 아니어서 다시 항해하여 1620년 11월 21일 프리마우스에 도착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397년 전입니다.
이들이 프리마우스에 도착한 때는 늦가을이었습니다. 곧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그해 겨울과 봄 사이에 44명이 사망하였습니다. 이들은 먼저 통나무를 베어다가 예배당을 짓고 학교를 짓고 그리고 자기들의 집을 지었습니다. 기아와 영양실조로 대다수가 폐결핵을 앓아 죽은 것입니다. 1621년 봄에 한 인디언의 방문으로 그들과 교제하게 되었고 인디언들은 옥수수 제배방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1621년 가을 첫 수확을 얻어서 농작물과 생선과 과일을 차려놓고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풍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변변찮은 수확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 우리 손으로 농사를 지어서 첫 수확을 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환경을 초월하여 감사했고, 청교도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감사했고, 청교도들은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구원 받은 것으로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감사를 잃게 하는 문화”라는 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가슴 뭉클하며 때로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이 있는 글입니다.
‘산소 호흡기 안 달고도 숨 쉬며 의식이 있고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지….’ 힘겹고 고된 삶을 살면서 날마다 다짐하는 나의 생각입니다. 만 6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보니 무엇을 보아도 즐겁지 않고 뭘 먹어도 맛을 모릅니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나는 감사할 수가 있을까요. 사람들 앞에선 웃고 있지만 항상 제 눈가엔 눈물이 묻어납니다.
있어야 감사하고 무언가 받아야 감사하는 이 시대, 우리에게서 감사를 빼앗아 가는 문화적 원인을 생각해봅니다. 현란한 불빛에선 한 자루 촛불이 초라하듯 예쁘고 잘생긴 외모의 인기인들만 보면 자신의 건강은 안 보이고, 멋진 집과 자동차만 보면 자신이 초라해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세상 속에서 감사보다 범죄가 늘고 있는 뉴스를 보며 탄식합니다.
예쁘고 잘생긴 것만 추구하는 세상 문화가 교회 안에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신앙생활이나 진리 탐구는 사라져가고, 가볍고 예쁜 것을 선호하는 시대라서, 예수님이 오셔도 맞출 수 없는 까다롭고 개인주의적인 교회 문화로 변해 가는 것이 마음 아픕니다. 모든 것이 다 있다고 감사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지만 감사하는 본인에게도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금세 싫증내고 금방 없어지는, 인내가 존재되어지지 않는 환경에서 감사는 인사일 뿐입니다. 유전공학으로 송아지를 우량 소로 키우고, 하우스 재배로 항상 채소와 과일을 먹다보니, 인내의 결실은 점차로 사라져 그에 따르는 감사도 그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삶이 행복입니다.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평범하고도 특별한 감사를 아는 사람입니다. 기쁨과 설움을 같이 하고 서로 함께 살게 하심을 감사하며 만족스런 남편과 아내가 아닐지라도, 훌륭한 부모와 똑똑한 자녀가 아니더라도 그들을 인해 감사하는 생활은 감사가 메마른 현대에 필요한 활력소입니다.
없어도 혹독한 절망 속에서도 감사하는 이들은 인생 승리자들입니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해마다 돌아오는 추수 감사주일! 우리는 무엇을 감사하며 언제까지 감사하고 있는지…. 그 무엇보다 감사가 축복이며 천국입니다.
이틀 전 병원에 입원해 계신 연로하신 권사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이 권사님은 연세가 많으시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도 그날은 정신이 맑으셨고 말씀도 또박또박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권사님 사도신경을 외우실 수 있지요?’ 그랬더니, 권사님이 사도신경을 드문드문 외우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제가 ‘권사님 사도신경을 그대로 믿으시지요.’ 그러니까, ‘그럼요 믿지요.’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제가 한 가지 더 질문을 했습니다. 며느리 이름이 뭐지요. 며느리 이름도 곧장 말씀하셨습니다. 권사님이 이렇게 정신이 또렷하신 적이 없었는데, 너무 분명하게 대답을 하셔서 제가 또 물어보았습니다. 아드님 이름이 뭐여요? 그런데 애석하게도 아드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르쳐 드렸습니다. 채근식 장로님.
아들 이름을 가르쳐 드리니까 연신 권사님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권사님 뭐가 그렇게 감사해요?’ ‘숨 쉴 수 있어서 감사하고, 밤에 잘 잘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다 감사합니다.’
저는 권사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임정식 권사님은 본인의 아들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사도신경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자기 몸에서 난 채근식 장로님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은 기억하였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까지 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누워계시면서 대소변 다 받아내는 분이고, 언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지 모르는 분인데도, 숨 쉴 수 있는 것, 잠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기도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하고, 다 감사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라고 감사하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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