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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 평생감사
이정현 목사 2017-11-12 추천 0 댓글 0 조회 899
[성경본문] 데살로니가전서5:18 개역개정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살전5:18, 평생감사

올해도 어김없이 감사의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절인데 지난 1년 동안 나 개인과 가정과 가족들과 교회와 직장과 사업장과 이 나라 이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기독교인들은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감사란 무엇입니까? 감사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다양하고 많은 은혜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의에 따르면 감사를 하려면 그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여건과 환경을 하나님이 다 조성해 주셨습니다. 땅도 주시고 물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부모님도 주시고 생명을 부지할 수 있게 해 주심으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 때 비로소 그 은혜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 때 거기에 감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건강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라는 사실을 알면 그 사람은 감사하게 되지만, 그것이 왜 하나님의 은혜이냐, 내가 좋은 것 먹고 운동을 해서 건강하지-라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감사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감사는 은혜를 은혜로 알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는 인생의 보물찾기와 같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국민학교 때 소풍을 가면 거의 반드시 보물찾기를 했습니다. 구역을 정해 놓고 선생님이 흰 종이에다가 연필, 지우개, 공책 등등을 적어 놓고 그것을 꼬깃 꼬깃 접어서 숨겨둡니다. 아니면 흰 종이에다 번호만 1, 2, 3번 이렇게 적어 놓습니다. 돌 밑이나 나무 위에나 풀덤불 속에 감추어 둡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보물을 숨길 때에는 아이들이 찾지 못하도록 골탕 먹이기 위해서 숨겨두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찾을 수 있도록 하되, 평범한데 숨기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찾아다닙니다. 하나만 찾아야 되는데 어떤 애들은 두 개씩도 찾고 어떤 애들은 하나도 찾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아이들을 다 모아 놓고 선생님은 그 보물에 적힌 대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줍니다.

보물찾기에는 교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로 하여금 그동안 안 보던 곳을 좀 보게 하는 교육입니다. 그동안 익숙한 곳만 보지 말고 이제는 다른 곳도 좀 보라는 얘기입니다. 밝은 곳을 보았다면 이제는 어두운데도 보고, 늘 중심만 보았다면 이제는 주위도 좀 보고, 높은 곳만 보았다면 이제는 낮은 곳도 좀 보고, 먼 곳만 보았다면 이제는 가까운 데도 좀 보고, 땅만 보았다면 이제는 하늘도 좀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보물찾기를 하는 것은 시야를 좀 더 넓게, 구석구석 보라는 교육을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 옆에 가까이 보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엉뚱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다 인생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혹자가 감사는 내 인생의 보물찾기라고 했습니다. 내 삶의 구서구석 모든 주변의 영역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곳에서 분명히 보물을 찾듯이, 감사거리가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 모든 부분에 은혜라는 보물을 숨겨두셨는데, 우리의 눈을 들어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그 은혜의 보물을 찾을 수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게 되면 우리는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대한 고맙다고 반응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베풀어주신 은혜가 없어도 하나님의 존재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 영광스럽고 거룩하심, 만물의 주권자되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보통 찬송하게 되는데, 그런데 성경에서 상당부분 이 찬송을 감사와 동의어로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찬송과 감사 또는 감사와 찬송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많은 부분에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하기도 하지만, 베풀어주신 것 없어도 그저 하나님의 영화로우심과 거룩하심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감사는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감사에 근거하여 있습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좀 특별하셨습니다. 그분은 갈릴리 선교에 실패하셨을 때도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마11:1-24). 주님이 갈릴리 온 동네를 다니며 전도하셨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세례요한 보다 더 큰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시면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셨고 아울러 교만한 가버나움을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은 열심히 전파하셨지만 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기도하신 것입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장).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배격하고, 고작해야 세리와 죄인 같은 평판이 좋지 않은 몇몇 사람만이 그를 따른 것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상황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결핍 가운데에서도 주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감사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 뿐만아니라 예수님은 5천명이 넘는 군중들을 앞에 두고,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마 14:19, 막 6:41).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여기의 축사는 감사라는 뜻입니다. 그 작은 음식을 들고 주님은 하나님께 감사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시체를 앞에 두고 감사기도 하셨고(요 11:41), 잠시 후면 악당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달릴 것을 알면서도 주님은 감사기도 하셨고(마 26:26-27) 부활하신 후 엠마오 도상에서 음식을 드시면서 역시 감사기도 하셨습니다(눅 24:30).  

주님의 이런 기도를 가리켜 신약학자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사람은 ‘주님의 이런 감사는 완성에 대한 얘기이며 현실화된 종말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며는 주님은 이미 이 일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들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을 통하여 이미 5천명을 먹이고 12광주리가 남은 것을 바라보며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로마 병정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죽을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을 생각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감사는 완성에 대한 얘기이며 현실화된 종말론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그분의 이런 감사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은혜와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통하여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복입니다. 구원을 비롯하여 구원 이후에 누릴 수 있는 모든 은혜와 사랑과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은혜를 누릴 수 없고 또한 감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사시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본문을 통하여 감사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감사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또는 추수감사절 때,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때 감사할 수는 있는데,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바울이 가능하지 않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말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성령에 의해 내 삶이 다스림 받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는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의 반대는 원망 불평인데, 살다가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은, 성령충만하심으로 내가 다스림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고, 나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이 사실을 철저히 믿는 사람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또는 구석구석에서 삶의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보는 것으로 감사하고, 내가 듣는 것으로 감사하고, 내가 느끼는 것으로 감사하고, 내가 만지는 것으로 감사하고, 내가 소유한 것으로 감사하고, 나와 관계된 모든 일들로 인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무엇인가 감사거리를 들어 하나님께 감사를 하려면 일단 부정적인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잘못된 생각들을 마음에서 제외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달리말해 부정적이고 불평불만의 요소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뽑아내지 않고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의용 교수가 ‘감사일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 보면 감사의 눈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감사 색맹에게는 감사할 거리가 아예 안 보인다. 감사 약시는 감사를 보고 싶어도 잘 안 보인다. 감사 근시에게는 눈앞의 감사만 보인다. 감사 원시는 남의 감사는 보이는데 자기 감사는 잘 안 보인다. 감사 난시는 감사를 보기는 보는데 흐릿하고 선명하지는 않다. 감사 짝시는 한편의 감사만 보인다. 감사 착시는 감사의 핵심을 잘 모지 못한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감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감사 색맹, 감사 약시, 감사 근시, 감사 원시, 감사 난시, 감사 짝시, 감사 착시들은 감사거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여 결국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좋지 않은 눈은 고쳐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원망 불평 부정적인 것들을 제거하여 이제는 감사라는 안경을 끼어야,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에서 감사 거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감사의 안경을 착용하셔서 일마다 시마다 때마다 감사거리를 찾아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시고, 이만한 건강 주신 것 감사하시고,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도 감사하시고, 식욕을 주셔서 이만큼 소화할 수 있게 된 것도 감사하시고, 예배의 자리로 나와서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자리로 나올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하시고, 부족하고 못난 부분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을 주셔서 가정을 이루게 해 주셔서 감사하고, 우리 교회 건강한 교회, 평안히 든든히 서가는 교회되게 하심을 감사하고, 내 옆에 좋은 구역식구들, 좋은 친구들, 믿음의 동역자들을 붙여주심도 감사하고, 우리 교회 좋은 장로님들 세워 주셔서 감사하고, 일상적인 모든 환경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인생의 3중고를 겪었던 여인이었습니다. 보지를 못했고 듣지를 못했고 말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실리번 선생님의 도움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뛰어난 성적으로 그 대학을 졸업하고 훌륭한 강연자와 문필가가 되었습니다. 미국 내는 물론 세계 5대륙 35개 나라에서 장애인을 위한 강연과 대중 연설을 했고,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발하거나 참혹한 전쟁을 반대하는 강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눈이 멀게 된 때부터 하버드 대학의 학생이 되기까지 자신의 삶을 기록한 “내가 살아온 이야기”(1903)가 있고, 같은 해에 “낙관주의”를 썼고, 1908년도에는 시각장애인의 세계를 남다른 감수성과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펼친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저술했고, 대 공황기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준 수필집인 “사흘만 볼 수 있다면”(1933)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그녀의 수필집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날,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실리번 선생님을 찾아서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폴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겠다. 둘째 날, 먼동이 트며 밤이 낮으로 바뀌는 웅장한 기적을 보고나서 저녁에는 보석 같은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겠다. 셋째 날,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큰 길 가에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볼 것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네온싸인이 반짝거리는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나를 이 사흘 동안 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다시 영원한 암흑의 세계로 돌아가겠다.”

헬렌 켈러는 3일만 볼 수 있다면, 나는 이렇게 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일 동안 보게 해 주신 그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것들을 우리는 지금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얼마나 큰 은혜이고 축복인줄을 안다면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헬렌 켈러가 우리에게 이런 충고를 남겼습니다. ‘내일이면 귀가 안 들릴 사람처럼 새들의 지저귐을 들어보라. 내일이면 냄새를 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꽃향기를 맡아보라.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라.’ 그러면 그 속에서 반드시 감사거리를 찾을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유대 랍비문학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모든 제사가 그칠 것이나 감사의 제사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백은 그칠 것이나 감사의 고백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감사하는 이 감사는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 하늘나라에서도 계속 됩니다. 

17세기의 시인이었던 조지 허버트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게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를 놓치면 우리인생의 모든 축복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만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요새는 사람들의 마음이 많이 완악하여져서, 감사를 모르고 오히려 원망 불평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학생들이 스승에게, 선생님은 선생이 되어가지고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냐고 반문하는 시대입니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부모님은 부모가 되어서 나에게 뭘 해 주었냐고 반문하는 시대입니다. 교회에서 교우들이 목사에게 목사님은 목사가 되어서 나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해 주었냐고 불평하는 시대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냐고 대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보물찾기를 하듯이 여러분 인생의 구석구석을 찾아보십시오. 수많은 감사거리가 곳곳에 보물로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없는 게 아니라 찾지를 못한 것입니다. 내 삶속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한량없이 많습니다. 그 수와 양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서도 그것을 찾아내어 감사하고 있으며 감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어 하나님께 입술로 감사하고, 그것을 찾아내서 하나님께 찬송으로 감사하고, 또 그것을 찾아내서 하나님께 정성스럽게 물질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평생 감사해야 하는 것은, 평생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 순간에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의 심장은 하루 동안에만, 자그마치 10만 3천 9백번을 뛴답니다. 우리 몸속에 있는 혈액은, 하루에 무려 2억 6천 8백 8십만 km를 달린다고 합니다. 우리가 들이마시고 내 쉬는 숨은, 하루에만 2만 3천 번이나 된답니다. 여러분 이렇게 심장을 많이 뛰게 하고, 혈액이 먼 거리를 달려 주고, 폐가 쉴세 없이 호흡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나를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무슨 수고를 해서, 내가 무슨 노력을 해서,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심장을 뛰게 하고 피를 온 몸에 돌리고 숨을 쉬게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나를 붙잡아 주시고, 1분도 쉬지 않으시고 항상 유지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최고의 신앙고백이자, 평생 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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