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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3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이정현 목사 2017-12-03 추천 0 댓글 0 조회 1603
[성경본문] 이사야40:27-31 개역개정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사 40:27-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간절하게, 때론 애처롭게 쳐다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독수리처럼 하늘을 비상하게 될 것입니다. 걸어가도 달려가도 피곤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공연한 소리가 아니라, 진리임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이 같은 인생의 무거운 짐에 눌려 있을 때, 마음은 괴롭고 답답할 때, 아무도 도와 줄 사람이 없어 보일 때, 매사가 우울하고 만사가 귀찮을 때, 내 사정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생길 때,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들 때, 우리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올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모하는 마음과 주의 집중하여 말씀을 들음으로, 인생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을 찾아서, 멋지고 생동감 있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야곱과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여기의 야곱과 이스라엘은 개인을 말하기보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시대에는 이미 야곱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의 야곱과 이스라엘은 그 나라와 민족을 가리켜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로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들,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음성입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정은 여호와가 알지 못해, 우리의 원통함을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아.’ 내 사정을 어떻게 하나님이 알아, 내 원통함을 어떻게 하나님이 해결해줘. 내 인생의 역경과 고난과 힘든 것과 원통함을 하나님이 전혀 돌보시거나 굽어 살펴보시지 않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조금 살다보면 세상에 쉬운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시험과 리포트에 질려서 빨리 졸업했으면 했는데 학교를 졸업하니 직장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렵게 취직은 했으나 눈칫밥 먹는 것, 상사의 잔소리가 싫어서 직장을 뛰쳐나왔더니 그래도 월급 받아먹던 때가 좋았던 것 같습니다. 빨리 시집이나 갔으면 해서 일찌감치 결혼 했는데, 지독한 신랑 만나 말 못할 고생도 어지간히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좀 나을까 싶어 교회에 갔었는데,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른 것이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 밖에서 만난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 안에서 만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발을 빼자니 그렇고, 그대로 있자니 속이 끓어 오릅니다.

사업을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서 실패하기도 하고, 친구와 동업하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보증 잘 못 서서 망하기도 하고, 대박을 꿈꾸다가 가까운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잘 되다가 한 순간 교만하여 다 말아먹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이런 사정을 누가 알아줍니까? 나의 억울한 일들을 누가 나서서 해결해 줍니까?

믿는 자들이 모여 신앙 간증하는 집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목회 생활의 답답함을 눈물로 하소연했습니다. 목회가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한 여자 집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분이 혹시 목회가 어렵고 힘들다고 말한 저 목사님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해서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만 힘든 줄 아십니까? 우리는 더 힘듭니다.” 목사도 힘들고 교인들도 힘들고 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모든 영적 이스라엘들에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고뇌가 있습니다. 풀지 못한 숙제가 있습니다.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데,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있는지 뜻 모르는 눈물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갑니다. 다 아픔과 원통함과 억울함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그런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아야 합니까? 하나님은 피곤하지 않으시고,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며”

원통하다, 하나님도 내 사정 모른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묻고 계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이 말은 “알고 있잖아, 들어 본 적이 있잖아”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알면서 모르는 척,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그렇게 시치미를 떼고 있다는 말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곤치도 아니하시며 곤비치도 아니하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명철이 한이 없다는 진리입니다.

사람은 유한합니다. 사람은 능력, 지식, 수명, 관용 등 모든 면에서 유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이 세상과 온 우주는 모두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창조하시고, 온 세계를 유지하시면서도 그분은 피곤을 모르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음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지성과 감성 속에 늘 자리 잡고 계셔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할 때에 우리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이 영원한 줄로 알 때, 우리는 주제파악에 실패하고 분수에 지나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 되심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우리가 온 세상의 주인인 줄로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마침내 의미 있는 생애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릴 때, 앞이 캄캄하여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을 때, 위급한 상황이어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때, 죽고 싶은 생각 그 외에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을 때, 여러분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 여러분의 귀에 익숙한 하나님, 그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에 파송된 한국인 선교사들에게 26대의 자동차를 선물하신 은퇴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스즈끼라는 분이십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위급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고 첫 글자인 ‘하’만 외쳐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은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가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도와 줄 마음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종종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도울 마음도 있으시고 우리를 도울 능력도 있으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시편 55, 56, 57편은 다윗의 시인데, 이 시들의 배경은 다윗이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 다닐 때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군사를 풀어서 다윗을 죽이려 했을 때, 다윗은 그 창과 칼을 피하여 이곳저곳으로 도망 다니게 됩니다. 광야로 도망갑니다. 동굴 속으로도 숨습니다. 심지어 적국인 블레셋으로도 피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과 절망과 고통 중에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하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그 와중에서도 감사하며 찬송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을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으로, 나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실 분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함으로 새 힘을 얻으라고 하셨습니다.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지금은 소년이라도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는 시대입니다. 젊고 싱싱하고 건강한 소녀들과 젊은이들도 피곤해 하고 넘어지고 자빠지는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속에서라도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앙망’이라는 단어는 참 좋은 말입니다. 원문의 뜻은,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고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who hope in the Lord)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한글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에, 앙망이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앙망이라는 단어는 ‘배고픈 짐승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갈망한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모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찾기 위해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이 앙망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낱말이 사모함과 갈망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앙망해야 합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시편 73편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2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늘과 땅에서 내가 사모할 대상은 주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함과 동시에, 그분의 말씀을 사모한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사모한다, 주의 법도를 사모한다, 말씀을 사모한다, 계명을 사모한다, 주의 법을 사모한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라고 했습니다. 너무 갈급히 찾은 나머지 내가 피곤하다고 했으며,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헐떡이며 찾는, 갈망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잠 29:3) 지혜를 사모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셋째, 마음의 정결을 사모해야 합니다. 잠언 22장 11절의 말씀에 보니까,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넷째,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딤전 3:1).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성도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주님처럼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결국 이것이 감독의 직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감독이 하는 일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달리말해 감독의 직분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로마서에서는 은사의 종류를 7가지, 즉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와 중복되는 은사도 있지만, 이 같은 은사들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런 은사들을 이야기하면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셨고, 또한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큰 은사를 사모하면 하나님이 제일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사로 충만해서, 그 은사를 잘 활용함으로,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 바울은 의의 면류관 쓸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6)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벧후 3:12)고 하였습니다.

일곱째, 병 고침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38:9-14/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한 기도입니다. “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울증, 무기력증, 포기증, 좌절증에 빠진 사람이나,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와 인간관계와 건강 때문에 지치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를 사모하시고, 마음의 정결을 갈망하시고, 선한 일을 사모하시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시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병고침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 사모해야 합니까?
1)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듯이 해야 합니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갓난아이들이 배고프면 얼마나 애절하게 어머니의 젖을 찾습니까? 얼굴에 핏줄을 세우며 울고 조릅니다. 엄마의 젖을 그처럼 바라는 것입니다.
 
2)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 목마른 사슴이, 포수가 그 샘가에서 엽총을 겨누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워낙 목이 마르니까 그 물가로 나오듯이, 이런 갈급함이 시편 기자에게 있다는 고백입니다.
 
3)메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리듯 해야 합니다.
욥 29:23/“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몇 개월 몇 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땅들이 타 들어갑니다. 그런 땅들이 혹은 식물들이 입을 헐떡이며 단비를 기다리듯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얘기입니다.
 
4)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시 130:6/“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휴전선 근처에서 군인들이 밤새도록 보초를 서는데, 오후 5시 정도에 산에 올라가면, 밤을 홀딱 새고 아침에 내려옵니다. 그 파수꾼들이 아침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밤새도록 경계근무를 서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그것처럼 신자들이 주님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경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또 갈망하면 됩니다.
예)어마 제비가 먹이를 물고 와서 새끼에게 줄 때...입을 제일 크게 벌리고 덤벼 드는 놈에게...
 
그러면 앙망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만족, 여호와의 좋은 것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세상적, 정욕적인 것으로 만족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마치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수처럼 우리를 만족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사모하는 영혼에게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올라가게 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새 힘을 주십니다. 이 새 힘은 피곤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하고, 뿐만 아니라 낙심하고 좌절하여 주저앉아있는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새 힘만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어려운 환경은 문제가 안 됩니다.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 힘을 얻으면 지치지 않습니다. 낙담하지 않습니다. 자빠지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달음박질 하여도 고단치 않습니다.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독수리처럼 올라갈 수 있습니다.  갑자기 천기가 험악하여져서 뇌성이 나고 소낙비가 내리게 되면 공중을 날아다니던 모든 새들은 비를 피할 만한 처마와 같은 곳을 찾아 분주하게 피합니다. 그러나 독수리는 오히려 힘찬 날개를 치며 올라 시커먼 먹장구름을 뚫고 창공 위로 날아 빛나는 태양과 화창한 하늘로 나아갑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왕입니다.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는데, 몇 m나 오를 것 같습니까? 최고로 높이 오르면 4000m까지 오를 수 있답니다. 백두산보다 더 높고, 구름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독수리는 장애물이 있어도, 폭풍우와 구름을 뚫고 높이 높이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직장, 학교, 개인사업, 가정, 교회, 기타 등등에서 피곤하십니까? 원통하십니까? 억울하십니까? 죽고 싶으십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피곤을 모르는 분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능력과 힘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그분께로부터 능력과 힘을 얻는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분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우러러 쳐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반대말은 ‘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의 반대 개념도, 자신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의 명예, 나의 부, 나의 육적인 미, 나의 부귀영화를 앙망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정말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예배의 태도, 기도의 소리, 찬송 소리가 남다를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간절하게, 때론 애처롭게 쳐다볼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게 될 것입니다.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독수리처럼 하늘을 비상하게 될 것입니다. 걸어가도 달려가도 피곤치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냥 공연한 소리가 아니라, 진리임을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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