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목사설교

  • 홈 >
  • 예배 · 설교 >
  • 이정현목사설교
이정현목사설교
2019 2 3 - 순종, 기쁨과 자유 그리고 축복의 길 이정현 목사 2019-02-03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102

http://www.isomang.net/bbs/bbsView/13/5536018

[성경본문] 요한복음9:1-12절 개역개정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9:1-12, 순종, 기쁨과 자유 그리고 축복의 길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갈릴리 지방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런데 가끔 주님은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지역으로 내려오실 때가 있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은 초막절 행사를 마치고 안식일에 예루살렘 어느 거리를 걷다가 맹인 한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이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자기 부모의 얼굴을 본적이 없고, 형제들과 예루살렘 성전과, 기타 사물들을 아직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낮이나 밤이나 항상 캄캄한 세상을 살았던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삼중고의 인생을 살았던 헬렌 켈러는 자서전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들을 수 없다는 것보다, 말할 수 없다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 내가 볼 수만 있다면...” 헬렌 켈러의 이 말을 통하여, 보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 날 때부터 불구자가 몇 명 나오는데, 본문의 소경과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있고, 사도행전 14장의 루스드라에 사는 앉은뱅이가 있습니다. 날 때부터, 처음부터 소경이요 앉은뱅이였다는 것은, 당시 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자였다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이렇게 불편함과 고통과, 남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비참하게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눈을 뜨고 일어나 걸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맹인을 만났을 때, 제자들이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 유대인이 가지고 있었던 죄와 고난의 관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일단 유대인들은 사람이 이 땅에서 고난과 환란을 당한다는 것은 죄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의 결과로 고난과 재앙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단계로 생각하는 것은 그러면 그 죄가 누구의 죄인가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인가 아니면 그 부모의 죄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 조상들의 죄인가? 지금 제자들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제자들은 나면서부터 맹인이 되었다고 하니까, 자기의 죄보다는 그 부모나 조상들의 죄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아 보입니다.

 

구약 성경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겠다’(5)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부모의 죄로 자식들이 고난과 환란을 당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31장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29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30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아버지가 신 포도주를 먹었는데 그 아들의 이가 시리다는 말은, 아비의 죄가 아들에게 미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이해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신 포도주를 먹는 자마다 이가 시리다, 곧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는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남쪽 유다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도 유다백성들은, ‘아비가 신 포도주를 먹음으로 아들의 이가 시리다고 얘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이 포로지로 끌려 온 것은 조상들의 죄 때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분명하게 한 번 더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2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3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4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18:2-4). 분명한 것은 범죄 한 그 영혼이 그의 범죄로 인하여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출애굽기에서는 부모의 죄가 후대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하시고,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에서는 자기의 죄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둘을 어떻게 잘 조화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죄와 고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고난과 환란과 질병이 죄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12장의 미리암, 5;14, 고전 11:30).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욥기, 4:13, 고후 12:7)라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벌로서 오는 고난도 있지만, 연단과 또 다른 목적을 위한 고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병도 죄로 인한 것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 사람의 신앙성장과 더 큰 축복을 위한 질병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부터 주님이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질문을 받으셨을 때,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 맹인이나 그 부모가 죄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 맹인이 이렇게 된 것은 그를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맹인에게 역사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권능으로, 이 사람을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면, 이제 그 하나님이 이 사람을 치료하여 다시 보게 하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맹인의 원인을 질문했으나, 주님은 이 맹인의 맹인된 목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날 때부터 이 사람이 맹인이 되었는가를 물었으나, 주님은 하나님께서 이 맹인을 통하여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의 누이들이, 자기 오라버니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에게 기별을 하였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11:4). 나사로의 병과 죽음은, 그와 그 조상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복음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루심으로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밤이 되면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개인이 죽는 것이 밤인데, 그때가 되면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개인의 죽음 때까지 자기를 보내신 이의 일을 직접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위에서도 한 강도를 구원하셔서, 오늘 밤에 낙원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밤이 오기 전까지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살아 있는 동안에 온 힘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9:10)고 했습니다. 여러분 죽기 전에 교회의 일이 손에 잡히는 대로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죽을 때 헌신하지 못하고 충성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말고, 목숨 붙어 있을 때(인생의 밤이 찾아오기 전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밤이 갑자기 올 수 있습니다. 봉사하고 싶고 헌신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날이 갑자기 오는 것입니다. 밤이 되면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지금은 아직 낮이니까,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일을 한다고 하시면서, 맹인을 치유하는 사역을 하시는 것입니다. 조금은 독특한 방법으로 맹인을 치료합니다. 땅에다 침을 뱉아서 침과 흙을 이깁니다. 반죽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주님이 이런 행동의 하는 날이 언제입니까? 14절에 보면 분명히 안식일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는 규칙을 정해 놓았습니다. 안식일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환자는 치료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보통 환자를 고쳐 주는 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환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 맹인을 낫게 하는 것은 유대인의 눈으로 볼 때 안식일을 어기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반죽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전병을 구워 먹기 위하여 밀가루를 반죽하는 것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39개 사항 중 하나를 어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눈에는 예수님이 침과 흙을 이기는 것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쨋던 예수님은 침과 흙을 반죽해서 그것을 맹인의 눈에 발라줍니다. 마치 하나님이 태초에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드셨듯이, 이제는 흙과 침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 준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이어 아주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그 맹인이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발라준 그 진흙을 물로 씻었더니, 그 순간에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뱉은 침에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까? 아니면 그 흙에 효력이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실로암 물에 효력이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인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도 보면 이와 비슷한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아람 나라의 군대장관 나아만 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이유는 자기의 문둥병을 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선지자를 찾아갔더니 선지자는 나와 보지 않고 자기 밑의 종의 보내서, ‘요단 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해진다고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아만 장군은 화를 내면서, 선지자가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요단강보다 더 깨끗한 물이 많다고 하며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신하의 간청으로 요단강에 가서 목욕을 일곱 번 하였더니 그 순간 그의 살이 어린 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답니다(왕하 5:10-14). 여러분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물에 효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나아만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역사하셨으나, 신약의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이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심으로 낫게 된 것입니다. 나아만은 7번 몸을 씻어 나았지만, 맹인은 단 한번만 씻음으로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 편에서, 즉 이 맹인 편에서 생각해 본다면, 자기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치유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거나, 예수님의 그 행동을 거부했다면, 이 사람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그대로 수용하고 믿고 즉각적으로 따랐기 때문에,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맹인을 보냈고, 그 맹인은 주님의 명령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 사이에, 믿음과 순종이 있었음으로 대단한 이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과 맹인의 철저한 순종이 일으킨 놀라운 역사였습니다.

 

날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하였는데, 자기를 나아 준 부모도 보지 못하였고, 형제자매들도 보지 못하였고, 예루살렘 성전도 보지 못하였고, 한 번도 성전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지도 못하였고, 친구들과 산천초목도 보지 못하였는데, 이제 감격 중에 보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좋았겠습니까? 캄캄한 암흑의 세상에서 자유와 해방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남들 의지하지 않아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 병신 소리 듣지 않아도 됩니다. 무엇보다 나 때문에 부모님의 가슴에 엉어리진 한을 풀어드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순종이 견고한 성벽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순종이 이적을 가져옵니다. 순종이 기쁨과 자유를 가져옵니다. 순종이 축복을 가져옵니다. 순종이 치유를 가져옵니다. 순종이 회복을 가져옵니다. 순종했더니 문제가 한 순간에 풀렸습니다. 순종했더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좋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할렐루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자 깨끗함을 받은 사람이 돌아와서 보니까, 예수님은 안 계시고 이웃 사람들만 죽 모여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 걸인을 보자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이곳에 앉아서 구걸하던 사람이 분명히 맞다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눈 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 사람이 나서서 내가 바로 그 맹인이라고 얘기함으로, 이 곳에서 구걸하던 사람이 맞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놀라며 더 가까이 모여들면서,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10)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고쳐주셨는지, 내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말한 것입니다. 과거의 거지신세와 맹인이었던 나를 주님이 어떻게 치료해 주셔서, 지금은 새롭게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벅찬 감격으로 진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자신을 고치신 방법과, 그 과정, 그리고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설명한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역사를, 주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신 이 사건을, 맹인은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전파하였습니다. 이 사람도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하신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파한 것입니다. 그분이 내게 어떻게 하셨고, 내가 어떻게 순종하였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사실대로 말한 것입니다.

 

결론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매일 길 안내를 해 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에게 구제금을 던져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에게 좋지 못한 시선을 보내며 맹인이라고 병신이라고 놀리고 그를 하찮게 취급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길바닥에 앉아서 구걸을 하든 안하든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무심하게 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맹인에게 선하게 대해주는 사람이나 악하게 대해주는 사람이나 아니면 무관심한 사람들을 다 보면서, 매일매일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지켜보며, 마음아파하고 속상해 하는 그의 부모와 형제자매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를 낳아서 기른 부모라 할지라도, 다른 것은 해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눈만큼은 고쳐줄 수가 없었습니다. 본인도 그렇지만 그 부모들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밤마다 구석진 곳에서 눈물 흘리며 살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들 가정에 기쁨과 자유와 해방과 평안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주님이 그 맹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침을 뱉고 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라주면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서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가서 씻으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안내해 주지 않으면 찾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여 가서 자기의 눈을 씻었더니 그 즉시로 나았습니다. 눈이 떠여졌습니다. 빛 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였더니, 눈이 떠여졌습니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부모님의 얼굴도 볼 수 있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뛰어가서 하나님께 예배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주님을 뵙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그와 그 가정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자유와 해방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빛이 들어와서 어두움이 물러갔습니다. 이제는 볼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캄캄한 암흑의 세계는 지나가고 밝고 희망찬 세계가 도래하였습니다. 주님이 순종하는 사람에게 이 같은 은혜와 사랑과 복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로열패밀리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황제나 왕의 가족’, 또는 특정 사회에서 귀빈 대접을 받는 사람의 가족을 말합니다. 북한에서는 김정은의 가족들을 말하고, 남한에서는 대기업 총수의 가족들을 로열패밀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로열패밀리가 나옵니다. 어느날 예수님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겁니다. 이때 예수님이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이냐고 하시면서, 진정한 예수님의 가족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다”(8:21). 예수님의 가족,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늘나라 로열패밀리가 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주어지는 복중에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 땅에서 재벌가의 로열패밀리가 되는 것도 엄청난 복인데,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예수님의 로열패밀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신앙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순종하지 않으면 신앙인이 아니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맥도날드라는 사람은 순종이야말로 모든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문이든지 간에-경제, 정치, 교육, 전쟁, 결혼, 진학, 건강, 진급, 인간관계, 사업-그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맹인이 눈을 떠서 기쁨과 자유와 해방과 평안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말씀에 순종하여 그런 은혜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19 2 10 - 하나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한 아브라함 운영자 2019.02.10 0 1130
다음글 2018 1 27 -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운영자 2019.01.27 0 1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