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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25 - 자비와 양선의 사람 이정현 목사 2019-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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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갈라디아서5:22-23절 개역개정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5:22-23, 자비와 양선의 사람

 

8월의 주제가 자비와 양선인데 다른 목사님들을 통하여 주제에 맞는 말씀들을 잘 들으신 줄 압니다. 저도 오늘 8월의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갈라디아서 5장 이 말씀을 근거로 자비와 양선의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남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셨던 자비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사람들은 무자비한 성품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세계를 마구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담의 후손들인 가인과 라멕의 경우를 통하여 이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과 그 재물은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의 예배는 받으시고 자기의 예배를 받지 아니하신다고, 화를 내며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자기 혈육인 동생을 별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이렇게 무자비하게 죽인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이 타락 이후 얼마나 무자비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더 읽다 보면, 우리는 더 놀랍고 비참한 무자비한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가인의 후손 중 라멕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어느날 이 사람이 자기 아내들에게 이렇게 자랑삼아 이야기합니다. “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이 자기 아내들에게 강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했다는 듯 자랑삼아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내가 죽였다,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적어도 7명 이상을 이렇게 죽인 것 같습니다. 라멕은 단순히 자기 마음에 상처를 주었다고 상대편의 목숨을 경시하며 죽인 것입니다. 살인을 밥 먹듯 하면서 조금도 뉘우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인간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들어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두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전 남편을 살해하여 토막내서 이쪽 저쪽에다가 유기한 고유정이고, 다른 하나는 투숙객이 요금 4만원을 주지 않는다고 그 방에 들어가서 살해하고 토막을 내서, 그 시신을 한강에 유기한 장대호입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별거 아닌 것 때문에 무자비하게 살해했다는 것과 토막 살인 죄를 지었음에도 죄에 대한 뉘우침이나 부끄러움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사건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은 무정하고 무자비한 시대입니다. 정과 이해와 용납과 용서와 이타적인 마음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명 경시시대인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인데,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래도 너희들만큼이라도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긍휼자비라는 말을 연결해서 각각 어떤 뜻을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어려분 어렵고 힘든 사람,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추운 겨울에 두 다리가 없이 너무 남루한 옷을 입고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를 놓고 꽁꽁 언 땅바닥에 엎드리어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누구든지 불쌍하다, 무엇이라도 좀 도와 드려야 되겠다, 호빵 하나라도 사 드리고 싶다는 생각은 다 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불쌍한 현장으로 보고 들음으로 갖게 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긍휼은 조금 다르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상대편이 그렇게 불쌍하지도 않고 큰 어려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 성품 자체가 도와주고 싶고 거절하지 못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조금이라도 어려움을 당하거나 힘든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그 마음이 발동이 되어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긍휼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에서 지나는 더 고차원적인 마음이 자비라는 것입니다. 자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긍휼의 마음을 합하여 거기에 사랑까지를 더한 이웃 사랑의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걸하는 자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이나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길 수 있으나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그 사랑의 마음까지 담아서 그를 도와주고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와 양선은 어떤 차이가 있겠습니까? 자비가 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긍휼이 여기는 내적인 면이라고 한다면 양선은 선을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머물지 말고 양선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자비가 마음과 성품의 문제라면, 양선은 선을 행하는 행위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두 단어를 같이 병행하여 사용을 하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근거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자비와 양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 앞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34:6). 하나님이 자신에 관하여 나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어느 누구의 진술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진술인 것입니다. ‘나는 자비롭고 인자가 많은 하나님이라.’

 

신명기 4:31에도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03편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더 나아가서 8절 이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7절에 가서는 이렇게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라.” 구구절절이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이 풍성하시다고 노래하고 있으며,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히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3:22에서는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하심으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는 이유가, 그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무궁하시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찬송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라’(고후 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진 표현입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위로의 하나님이시니 찬송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단적으로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5:11). 여기서 하나님이 가장 자비하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흘러넘친다는 뜻입니다. 다시말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항상 충만하시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같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한 인물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겟습니다.

 

시펀 51편은 다윗의 시로서,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의 전쟁 중인 어느 날 다윗이 왕궁의 지붕을 거닐고 있었는데 어느 여인이 저 아랫집 옥상에서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신하들을 시켜서 저 여인을 데려오라고 해서 동침을 했습니다. 죄를 짓고 얼마 뒤에 그 여자 밧세바가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서, 집에 가서 며칠 쉬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계획은 자기의 죄를 가리기 위한 하나의 술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충성스러운 신학 우리아가 집에가서 자지 않음으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우리아를 가장 치열한 전쟁터에 앞장서는 사람으로 보내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후퇴하게 하므로 우리아를 그 전쟁터에서 죽게 합니다. 남의 아내와 간음을 한 것도 큰 죈데 그걸 숨기기 위해서 그녀의 남편까지 죽였다는 것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단순히 거짓말한 죄, 남을 미워한 죄, 보통 평범한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벼운 죄를 이야기한 게 아니고, 간음을 하고 살인 교사죄를 지은 아주 중한 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죄를 지었을 때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찾아와서, 비유를 통해 그의 범죄를 지적하자 다윗은 곧장 회개하게 됩니다. 다윗이 회개하는 장면을 시편 51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다윗은 과거 자기의 업적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공로를 세웠으니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오로지 주의 인자와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를 도말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2절에서는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여달라고 기도하며, 7절에서는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말하고, 9절에서는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달라고 기도하며 그리하여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들어 달라’(12)고 참회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사 용서하시고 그의 영혼을 회복하시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 죄의 댓가로 육체적인 아픔과 고통은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다윗에게 무궁한 자비와 긍휼을 베푸셨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며 눈물로 밤마다 자기의 베개를 적시며 회개하는 다윗을 용서해 주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2장에 보면(17),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셔서,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들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시고 신실하신 분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자기의 자비하심과 신실한 대속 제물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연약하여 하나님을 멀러 떠나 있었고, 우리는 다 죄인이라 죄에따라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이라 영원한 형벌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는데, 그런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 대신에 십자가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는데, 이것을 십자가로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한량없는 자비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자비를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느날 아침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고 계시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는데,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런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땅에 쓰셨습니다.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더 이상 묻지를 않았습니다. 이어서 주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니까 모두가 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다 나가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여자보고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하시니까, 그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8:1-11). 이 여자는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대로라면 죽어 마땅하지만, 예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저들의 돌팔매질을 막아주심으로, 가련한 한 여인의 생명을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 가련한 여자는, 예수님의 무한하신 그 자비하심 덕분에 자기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성경 여러 군데에서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하신 모습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아들 예수님도 자비하신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모두에 대하여 자비하고 양선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6장에서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교훈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있습니다.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라고 하셨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 말씀하시기를,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와, 심지어 악을 행하는 악인들에게도 자비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누가복음 636절에,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입니까? 우리가 정말로 소망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들입니까? 그러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를 본받아, 자비와 양선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비유로 사람들을 교훈하셨던 적이 있습니다(10). 어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물건을 다 빼앗기고, 온몸에 매를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제사장이 와서 그를 보고는 불쌍히 여기지만 그냥 지나갑니다. 조금 후에 한 레위인이 지나가면서 역시 그 사람을 보고, 그도 불쌍히 여기기만 그냥 지나갑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천대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면서 그를 발견합니다. 쓰러진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풉니다. 그 사람의 상처를 포도주와 기름으로 씻어주고 나귀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려가 계속 치료를 받게 합니다. 부비가 더 덜면 오는 길에 그것까지 갚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기까지 비유를 말씀하시고 율법사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이냐?’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자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이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도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똑같이 네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고통 받고 시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냥 보고 불쌍하다는 마음만 갖지 말고, 실제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자비와 양성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는 보고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 사랑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이렇게 실천하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임으로,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넘어 긍휼히 여기고, 긍휼의 마음을 넘어 자비와 영선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재판정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미국 뉴욕의 즉결 재판소에서, 빵을 훔치다 붙잡혀 온 한 노인이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물었습니다. “왜 남의 빵을 훔친거죠?” 노인은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며칠은 굶다보니 너무나 배가 고파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보던 판사는 당신에게 벌금 10불을 부과하겠소라고 선고하였습니다. 물론 벌금 10불을 낼 돈이 노인에게는 없었고, 돈을 내지 못하면 노인은 징역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판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지갑에서 돈을 꺼내며 당신의 벌금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당신처럼 굶주리며 거리를 헤매는 사람이 있는데도, 나는 때마다 배불리 먹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굶긴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는 방청석을 향해 혹시 여러분 중에 나 같은 죄인은 없습니까?”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의 모자를 돌렸습니다. 단번에 벌금의 몇 배가 되는 돈이 걷혔고,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어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정말 일용할 양식이 없는 노인에게 주의 자비를 베푼 판사와 방청객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병든 자에게, 헐벗은 자에게,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감옥에 있는 자에게, 고통 중에 있는 자에게, 장애인들에게, 사회적 약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자비와 양선이, 곧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천국이 주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자비와 긍휼은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를 비롯하여 소망교회 모든 성도들이 참 교회임을, 이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자비와 양선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합시다. 행함과 실천으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성도임을 만방에 알릴 수 있도록 합시다.

 

구역의 식구들이 어려움 속에 있다면 찾아가서 위로하고 기도해 주고 작은 봉투라도 하나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내 주위의 사람이 큰일을 만나서 근심 걱정 속에 있다면 정성을 다하여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장님들이 계시면 사원들의 어려운 사정을 일일이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유치원과 선교원 선생님은 아이들의 집에 마음 아픈 일이 있으면 찾아가서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중병으로 치료받고 있는 한 분이 병원비가 없어서 걱정하고 눈물짓고 있는데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비와 양선을 몸소 실천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무자비한 세상 속에서 자비와 양선의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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