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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8 22 고난 당하는 자가 사모해야할 일 이정현 목사 202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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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야고보서5:13-18절 개역개정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5:13-18, 고난 당하는 자가 사모해야 할 일

 

어떻게 보면 인생은 고난과 즐거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난이 닥쳐왔을 때는 어떻게 살고, 반대로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야고보는 인생을 살다가, 고난을 만나거나 즐거운 일을 만날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생활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바른 삶이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본문 첫 구절에서 이런 질문에 분명히 답을 주고 있습니다.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인생을 살다가 고난을 만나면 그 때는 기도하고, 즐거운 일을 만나면 그때는 감사하며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

 

고난과 기도를 연결시키고, 즐거움과 찬송을 연결시켜서 문제의 답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기도하기가 쉬운가요? 아니면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며 찬송하기가 쉬울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후자가 더 쉬울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고 합니다. 다시말해서 고난을 당할 때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엎드려 기도하는데,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쾌락과 기쁨과 교만에 빠져서, 쉽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은 어자피 이 두 가지, 즉 고난과 기쁨이 순간순간 교차하여 지나가는데, 고난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며 사시고, 또한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의 때와 즐거울 때가 분명히 구분되지 않고, 겹쳐서 올 때도 있고, 어느 한쪽이 강하게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기도와 찬송을 병행하며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어서 고난의 일종인 병든자에 관하여 말합니다. 고난을 당한 자 중 한 부류가 병든자로 보고, 병든자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고난이나 병든 것을 서로 같은 의미, 비슷한 의미로 보고, 혼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고난이나 병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종교마다 고난을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따라서 각 종교마다 그 대처 방법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는 고난과 고통이 닥치면, ‘전생의 죗값이다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고난과 고통을 당연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가난하게 태어났으면 가난하게 살고, 불구나 병을 가지고 태어났으면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게 흰두교의 사상입니다.

 

불교는 고난과 고통이 인간의 욕망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욕망을 없애면 인간의 고통과 고난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을 죽이기 위하여 자꾸 속세를 떠나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슬람교는 고난이 알라가 정해준 운명이라고 봅니다. 이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알라에게 도전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알라신에게 도전하지 말고 운명대로 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는 아니지만 이 세상의 보편적인 다른 사람들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합니까? 그들은 대부분 고난을 힘든 불행 덩어리로 생각을 하고, 그것 때문에 염려, 근심, 걱정을 하거나, 극도로 실망하거나, 아니면 먹고 마시며 쾌락에 자기의 몸을 던지기도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찾아왔냐고, 한탄하며 좌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고통을 전생의 죗값이다’, ‘욕망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정해진 운명이다’, ‘불행 덩어리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살피며 기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며, 실제로 하나님께 간청함으로 그 문제를 극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면, 세상 사람들처럼 그런 마음과 자세로 고난을 이해하지 말고, 기독교적인 생각으로 고난을 이해하고, 야고보가 가르쳐 준대로 대처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야고보 선생이 고난을 당하는 자, 즉 병든 자에게 가르쳐 준 그 대처 방법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방법과는 완전 다른 것이고, 이것이야 말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이 구절에서 병든 자를, 혹자는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연약한 자를 말한다고 하지만, 그것보다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이나 도덕적으로 약한 자에게 기름을 붓지는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병든자는 육체적으로 질병에 걸린자를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했는데, 여기의 장로는 감독이나 목사와 동일한 명칭으로써(15:6, 22, 20:17, 21:18, 1:1, 1:5, 7, 벧전 5:1-4) 교회의 대표를 의미합니다(Calvin, Robertson). 그래서 병든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해서, 같이 기도해야 하며, 교회 지도자들은 병든 자를 방문하여 위로하며,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살전 5:14).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다음에 나오는데, 그것은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바르다는 말은 유대인이나 이방 사회에서의 공통적인 풍습으로서, 종교 의식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의술적인 수단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1:6, 10:34).

 

한편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여기의 기도할지니라를 기름을 바르는 것보다 원문에서는 더 강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은 병자를 방문하여, 치유의 방편으로 기름을 바를 수는 있으나(의술 행위), 그것보다 더 간절히 병자의 나음을 위하여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그 병낫기를 위하여 의학적인 힘도 사용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서 진료도 받고 약국에 가서 약도 먹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사들과 약사들에게 그런 은사를 주셨고, 그 은사를 사용하여 아픈자들을 치료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일반 은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강조해야 할 것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치료자 하나님, 여호와 라파라고 하셨음으로, 그분에게 직접 간구하여 그분에 의해서 나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특별은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병든 사람은 이 두 가지 은혜를 다 간구하되, 병원이나 약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더 의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병든자의 치유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했는데, 15절과 16절에서는 그 기도가 어떤 기도여야 하는지를 덧붙여 이야기합니다.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병자를 위한 교회 지도자들의 기도가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믿음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너희들의 죄를 서로 고백하는 회개의 기도가 되어야 하고, 또한 의인의 간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결국에는 간구나 회개기도나 의인의 간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봅니다. 아무리 믿음의 기도라 해도,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의 기도가 어찌 의인의 간구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기도는, 정결한 마음의 기도여야 하고, 그것은 곧 의인의 간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의심하지 말고, 믿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에서,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1:6-8)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도 여러번,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서는 치유를 위한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죄와 병의 연관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병이 죄의 결과라는 사상은 성경에서 여러번 나옵니다(28:22, 2:5, 9:2). 그러나 모든 병과 연관시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아닙니다(11:4). 단지 병이나 고난은 근본적인 면에서 볼 때, 인류의 범죄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해서 말하면, 병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말하면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온 것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병의 원인은 죄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몸을 잘못 관리하여 병이 들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염병에 감염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분명히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죄와 병이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고해성사를 뒷받침하는 성구로 말하지만,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설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지, 신자가 신부에게 죄를 고백함으로 신부로부터 보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죄를 신부에게 고백했다면 신부도 신자에게 자발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서로 죄를 고백하는 것이 되는데, 사제는 신자에게 전혀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고해성사를 뒷받침하는 성구가 아니라, 단순히 병 낫기를 위하여 강제가 아닌 자발적으로 서로 죄를 고백함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의인은 죄가 없는 사람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용서받은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의인은 절대적으로 죄가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많이 있어도 참되게 하나님께 회개하여 용서받은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의 기도를 의인의 간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와 병든자가 함께 기도하였을 때, 죄 용서를 받을 수 있고 또한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15-16절에서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낫게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병든자와 식구들이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를 들으사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치료자라고 하셨습니다. 능치 못함이 없는 대 의사가 되십니다. 사람을 온전히 창조하신 분이신데, 부서지고 연약한 부분을 어찌 고치지 못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기도할 뿐이지만 치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님께서 병든자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까지 고난을 당하는 사람, 특히 병든 사람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함께 믿음으로 죄를 서로 고하며, 의인으로 간구 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일으켜주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제 그는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를 예로 들어, 지금까지의 말씀을 확고히 입증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두 구절을 통하여, 야고보의 메시지를 더욱더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다는 말은, 엘리야도 다른 일반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괴로움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왕상 17:11, 19:3, 10:26). 이는 엘리야가 위대한 선지자로서 초능력적인 자질을 소유하여 비를 그치고 내리게 하는 역사를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타인들과 동일한 괴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인간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도 자기의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은 의인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엘리야의 수많은 역사 가운데서 비를 멈췄다가 오게 한 경우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엘리야의 기도가 자연의 현상까지 변동시킨 사실을 드러내어 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사실을 예증한 것입니다(왕상 17-18).


그의 기도는 간절한 기도였고(17), 반복하는 기도였습니다(18). 여기 간절히 기도했다는 말은, ‘기도로 기도했다는 말인데, 기도하는 행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다시 기도했다는 말도 기도를 반복 강조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엘리야의 실제적 기도를 본다면, 이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할 때,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왕상 18:42). 이런 자세로 일곱 번을 번복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기도는 정말 간절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간절히 사모했던 기도였습니다.

 

이러한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을 받아 비를 그치게도 하고 내리게도 하였습니다.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대단히 크게 나타났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의 기도에 자연현상까지 변화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를 통하여, 확실하게 기도 응답의 예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에게 강하게 던지는 메시지는, ‘고난을 당한 자는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살라, 그리하면 주께서 구원하시고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 중에 여러 사람이, 몸이 불편하여 병원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노환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도 있습니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중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의학으로 잘 치료되지 않은 병으로 고생하는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수술을 받고 치료 중에 있는 사람도 있지만, 수술조차도 받을 수 없는 안타까운 분들도 있습니다.

나을 수 있는 가능성보다 낫지 못할 가능성이 더 많아, 가슴아파하며 인생을 비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으려고 초초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예약일을 기다리는 형제자매도 있습니다.

 

건강문제가 아니라, 경제와 자녀와 여러 가지 얽혀있는 관계의 문제로 고난을 당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과 고통을 만났을 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대처하지 마시고, 믿는 사람답게 기도하는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말합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고난)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그리하면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내가 엘리야를 통하여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엘리야처럼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자비를 사모하고, 기도응답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찬송/ 471

 

기도제목/ 고난당하는 자가 사모해야 할 것은 주의 능력이며, 기도응답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사모하고 갈급해 하오니, 나에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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