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목사설교

  • 홈 >
  • 예배 · 설교 >
  • 이정현목사설교
이정현목사설교
2021 08 29 사도 바울이 간절히 사모했던 것 이정현 목사 2021-08-29
  • 추천 0
  • 댓글 0
  • 조회 802

http://www.isomang.net/bbs/bbsView/13/5959846

[성경본문] 빌립보서1:8절 개역개정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빌립보서4:1절 개역개정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고린도후서11:28절 개역개정

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디모데후서4:8절 개역개정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829, 1:8, 4:1, 고후 11:28, 딤후 4:8, 사도 바울이 간절히 사모했던 것

 

8월의 주제가 사모함 회복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사모함에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첫째 주에는 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는 제목으로, 둘째 주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는 제목으로, 셋째 주에는 우리가 무엇을 어느 정도 사모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지난주에는 고난 당하는 자가 사모해야 할 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은 성경 몇 구절 속에 나타난 말씀을 근거로 바울이 그처럼 간절히 사모했던 것이 무엇인지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도 말씀을 사모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눈을 부릅뜨고, 귀는 쫑긋 세우고, 마음은 활짝 열고, 입맛을 다시면서 주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만 한다면 하나님이 분명히 그런자에게 깨달음과 은혜와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바울이 과연 무엇을 그렇게 사모하였습니까? 빌립보서 1:8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여기에서 바울이 사모하는 것은 너희 무리입니다. 물론 이들은 빌립보 교인들입니다.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을 이처럼 사모한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고 하셨습니다. 심장은 짐승의 내장을 말하는 단어인데, 유명한 신학자 핸드릭센은 이 단어가 물질적인 것을 가르치기보다, 마음이나 감정을 나타낼 때가 더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나 감정으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던 마음을 가지고,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였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그 마음과 감정으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했기 때문이고, 또한 그 안에서 성령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바울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풍성히 부어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도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마음으로 교우들을 사모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그 성도들을 사모한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있기는 있는데,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여러분이 저를 사랑한다면, 그 증인이 누구이지요? 제 삼자가 증인이 되어야 하고, 그 증인은 적어도 2-3명은 되어야, 그것이 사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 증인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얼마나 깊이, 얼마나 간절히, 얼마나 애절하게, 얼마나 진실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지는, 내 마음을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증거하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증인이심을 자주 사용을 하였습니다(1:9, 고후 1:23, 살전 2:5, 10).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많이 증인이 되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거나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0명이 다 아니라고 해도, 하나님이 내 증인이 되어 주시면 그것은 옳고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뜨거운 마음으로, 빌립보 교인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은 사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일에 증인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사랑하는 빌립보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본문 8절 이전을 죽 살펴보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3절에서,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교인들의 관계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겁니다. AB를 생각할 때마다, B로 인하여 감사거리가 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채근식 장로님과 박원희 권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세월이 지나도 두 분은 한결같이 웃으며 신앙생활하고, 남들을 도와주고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B에게 무엇인가 잘하는 게 있고, 이쁜 것이 있고, 본이 되는 것이 있으니까,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4절에서는 내가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되 늘 기쁨으로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쁨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상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의 간구에는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비록 바울이 옥중의 고난 가운데 처해 있었을지라도, 변하지 않는 기쁨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 기꺼이 간구한 것입니다.


5절에서는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씀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빌립보 교인들이 대단하지요.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거기서 믿은 신자들 루디아, 간수의 가족들, 귀신 들렸다가 나은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서 빌립보 교회가 형성이 되었습니다. 그때가 주후 49년 정도인데, 지금 바울이 이 편지를 로마 감옥에서 쓰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주후 60년 때입니다. 그러면 빌립보 교인들은 예수를 믿을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장장 10-11년 동안 계속하여 바울의 선교 동역자가 되어 기도와 물질로 협력을 한 것입니다. 노 사도가 감옥 안에서 이것을 기억하며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다고 편지에 쓰고 있는 것입니다. 11년 동안 빌립보교회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거든요.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바르게, 열정적으로 신앙생활 했었거든요. 극심한 가난 중에도 거액의 연보를 했던 교회거든요. 작지만 큰 교회였고, 가난했지만 힘 있는 교회였고, 물질의 문제를 신앙으로 극복한 교회였습니다.

 

7절에서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고,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빌립보 교인들이 있었습니다. ‘파리의 연인에서 박신양 씨가 김정은 씨에게 말한 것처럼, ‘이 안에 너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라고 했습니다.

 

정리하면,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감사거리였고, 늘 기쁨으로 기도하던 대상이었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에 동참한 자들이었고, 항상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이 그처럼 사모했던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본문 구절로 가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4:1). 여기서 바울이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빌립보 교우들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와 마찬가지로 4장에서도 바울은 여전히 그 성도들을 사랑하고 사모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떤 분들입니까? 이들은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말을 마게도냐 교회에 대해서도 사용하였습니다.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9).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나 마게도냐 교회나 동일하게, 너희들은 나의 기쁨이요 영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단어는 세상적인 기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저들이 핍박과 환란 중에도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바울의 기쁨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영적인 것으로부터 온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내가 너희들만 생각하면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고, 고난 중에도 믿음으로 산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내 안에 기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현재 그에게 주어진 기쁨이었다는 것입니다.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감옥 안에 있는 사람에게 기쁨을 줌으로, 너희들이야 말로 나의 기쁨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난 면류관은 당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었던 월계관이나 연회에서 얻은 화관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미래에 하나님 앞에서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2:16, 고전 15:58) 그에게 주어질 상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면류관이라는 말은 너희가 나의 영광스러운 자랑거리이다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영광스러운 자랑거리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목회하던 성도들을 내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했던 것은, 그만큼 성도들을 기쁨으로 삼았고 자랑거리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는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서라는 말은 굳게 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원래 병사가 전쟁 중에 적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초소에 굳게 계속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본 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어려운 상황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Calvin). 그들은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어야 했으며, 그것은 주 안에서만 가능 했습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 굳게 서고, 그리고 진실되게 설 수 있는 것은, 항상 주와 동행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어떤 어려움과 환란과 핍박이 닥쳐와도,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라, 주 안에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41절에서 바울이 사모했던 형제 자매들은, 빌립보교인들이며, 그들은 바울의 기쁨이요 자랑이었으며 영광이요 면류관이었습니다. 이는 한마디로 바울은 그 형제자매들을 깊이 사랑하고 사모했다는 말입니다.

 

다음 성경 구절은 고린도후서 11:28절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바울이 무엇을 사모했는가라고 물으면, 저는 이 말씀을 근거로 바른 교회를 사모했다라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 바른 교회를 그처럼 사모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8절 앞부분을 보면, 대략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단의 내용을, 한 마디로 바울의 고난의 목록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어디에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지, 그 목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고를 넘치도록 했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했고,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의 위험을 당하였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 짧은 몇몇 구절에 나타난 그의 고난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가 오로지 복음을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고 헌신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28절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라고 말합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했던 일들 외에도라는 말인데, 이것을 유명한 크리소스톰이라는 설교자는 뒤에 남아 있는 것들이 지금까지 열거했던 것보다 더 크다라는 말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 고난의 목록들은, 앞으로 나열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새발의 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열거한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무겁고 큰 것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매일마다 무거운 쇠덩어리 같은 것이 자기를 짓누르는 데, 바로 교회를 위한 염려라는 것입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에 대한 염려가 자기를 누른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교회를 염려하였는데, 그러면 바울이 그렇게 염원했던 바른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첫째, 그가 생각했던 바른 교회는, 교회가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1:16-17). 둘째,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즉, 지혜, 지식, 성령을 통한 능력을 체험하기 원하였습니다(3:16-17). 셋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소명에 부응하여, 선한 열매를 맺음으로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였습니다(고후 13:7-9, 1:10).

 

결국 바울은 교회가 박해를 받아도 신학적으로 타협하지 않기를 바랬고, 다툼이나 내부 분쟁으로 인하여, 교회의 본래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랬고, 거짓 교사들이 유혹해도, 그런 것에 휩쓸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를 바랬고, 성령을 능력을 경험하여, 신앙생활에 좋은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지금까지 당했던 고난과 시련보다, 바로 이런 바른교회를 갈망함이 더 간절하며 크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지금까지 당했던 고난의 무게보다, 건강하고 영적인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사모함이 더 컸다는 얘기입니다.

 

마지막 성구는 디모데후서 4:8입니다. 다같이 읽어 보겠는데, 읽으면서 바울이 무엇을 사모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이 사모했던 것은 의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자기에게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시겠다고 하신 의의 면류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서신을 보내면서 엄중하게 명령을 합니다. 너는 때를 얻든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4:2), 너는 인내하며 말씀을 가르치고 권면하라, 이제 세상은 악하여 바른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귀를 막고, 오히려 허탄한 이야기만 따를 것인데,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5)고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때가 악한 시대이니, 너는 정신을 차리고 복음전파의 직무를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이런 권면을 하신 후에 바울은 자기 얘기를 합니다. 이 이야기는 바울이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과도 같은 진지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전제는 희생 제물에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제사인데, 포도주를 붓는 것이 마지막 의식이라고합니다. 그것처럼 자기의 사역을 제물로 생각하고, 지금의 이 시즘은 제물 위에 마지막 포도주를 붓는 시간이라고 보아서, 나의 떠날 시각이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떠날 시각이 가까웠다란 말은 선원이 배를 바다로 출항시키기 위하여 정박해 놓았던 배의 로우프를 푼다는 의미입니다. 혹은, 나그네가 다음날 새로운 행진을 하기 위하여 자신이 거처하던 장막을 걷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본 절은 바울 자신의 생명이 이 땅에서 끝나는 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죽음의 시간, 이제 순교의 시간이 가까이 왔다는 말입니다(1:23).

그러면서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회고하며 세 가지를 당당하게 확실하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했는데 이는 마치 전장에서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는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써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영적으로 싸우는 선한 싸움을 이제 끝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는데 이것은 마라톤 경기에서 정해진 경주 코오스를 완주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을 다 마쳤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경주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말과, 그 진리를 후대에 넘겨주었음을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모든 것을 최선을 다하여 마쳤으므로, 오직 남은 것은 면류관을 기다리는 일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면류관을 의의 면류관이라고 한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수여되는 면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비 되었다’(따로 남겨두다, 보존하다)고 했음으로, 앞으로 준비하실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의의 면류관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면류관을 받는다는 소망이, 그에게 늘 용기와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사모했던 것이 바로 이 면류관이었습니다. 주께서 그 날에 주실 이 의의 면류관을 그렇게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내 눈의 눈물을 닦아주시면서, 주께서 주실 그 면류관,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시면서, 주께서 주실 그 면류관, 그동안 고생했다며 품에 안아주시며, 주께서 주실 그 면류관을 바울은 사모하였습니다.

 

결론

 

오늘은 네 개의 성구를 통하여, 바울이 무엇을 그렇게 사모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빌립보서 1:84:1을 통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그처럼 사랑했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내가 그들을 사모하는데, 하나님이 내 중인이라고 했고, ‘그들은 바울의 감사거리 였고, 지금까지 복음에 동참했던 자들이고, 바울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울의 기쁨이요, 자랑이었으며, 영광이요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들을 깊이, 진실하게, 진하게 사랑하고 사모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이처럼 사랑하고 사모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을 이처럼 사랑하고 섬기고 사모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우리가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들을 그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나의 기쁨이요, 감사거리요, 자랑이요, 영광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다고, 이것은 사실이며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개의 성구 중 세 번째가 고린도후서 11:28인데, 이 성구를 통해서는 바울이 사모했던 것이 무엇이라고 밝혀주었나요? 바울은 모든 교회들을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건강하고 바른 교회 세우기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고난과 고통을 당해도, 내가 당한 이런 고난보다, 주님의 교회를 사모함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 건강하고, 바른 교회 세우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는 것과, 지금 말하고 있는 교회를 사랑하라는 말과는,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성도 사랑과 교회 사랑은 같은 뜻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앞의 것은 지협적인 것이나(빌립보, 마게도냐), 뒷의 것은 조금 더 광의적인 의미(모든 교회)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시고, 또한 건강한 교회, 바른 교회를 세워 나가시고, 그런 교회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디모데후서 4:8을 근거로 해서는, 바울이 의의 면류관을 사모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다 갔으며, 믿음을 지킴으로 이제 후로는 의의 면류관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 날에 주 앞에 섰을 때, 내 눈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내 상처를 보듬어 주시며, 나를 품에 안아 주시며, 주께서 씌어주실 그 면류관을 사모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기도 제목/ 바울이 사모했던 것을 통하여, 우리도 배울 것을 배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도들과 교회와 천상에서 받을 면류관을 사모하며 살게 해 주시옵소서.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2021 09 05 목사다운 목사 운영자 2021.09.05 0 594
다음글 2021 08 22 고난 당하는 자가 사모해야할 일 운영자 2021.08.22 0 6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