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누가복음18:13-1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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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2.2.27. 눅 18:13-14, 기도를 가르쳐주신 예수님(2)
지난번 시간에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기도를 어떻게 가르쳐 주셨는지를 알아본 것입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우겠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시간에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몇 구절을 근거로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공관복음 이곳 저곳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기도하신 내용도 많고, 예수님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내용은 더 많기 때문에, 약간은 지루하게 생각될 수 있으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말씀을 들으면, 오늘도 은혜가 될 줄로 믿습니다.
1. 예수님이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8:1-8).
이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장을 ‘불의한 재판관 비유’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과부 비유’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전자는 불의한 재판장과 의로우신 하나님을 대조하여,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후자는, 낙망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여, 응답받은 과부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둘 다 틀린 것은 아니고, 둘 다 강조되어야 할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낙심되는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1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지속성 있는 기도와, 간절한 자세로, 끈기 있는 강청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을 때라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받게 됨을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비유로 가르치고자 하신 중심 메시지가 이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시작을 하셨기 때문에 이 주제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이 과부처럼 끈질기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불의한 재판관도 그 원한을 풀어주는데, 너희 아버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응답해 주시겠다는 긍적적인 표현입니다.
로마서 12:12에 보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기독교인의 삶의 태도를 간단하게 진술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서, ‘천국을 소망하며 즐거워하고 환란 중에도 낙심하지 말고,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말씀으로 해석을 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환란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기도에 항상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응답과 은혜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비유의 핵심은 누가복음 18:6-8입니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그런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에 응답해 주었다면, 하나님께서 왜 택하신 자들의 원한의 간구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는 것입니다. 풀어주지 않겠느냐? 오래 참겠느냐?는 말은, 부정적인 말로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래서 풀어주지 않겠다, 오래 참겠다는 말이 아니라, 반드시 풀어주겠다, 반드시 속히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너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환경 속에 있다 할지라도, 환경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내가 속히 들어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끈질기게 원한을 가지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원한을 풀어주십니다.
좌절과 가난과 실망과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서, 나의 이 원한을 풀어달라고, 부르짖어 지속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 주십니다.
2. 예수님은 ‘겸손함과 죄를 고백함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18:13-14).
이 말씀은 앞에서 말씀드린 과부의 비유를 마치신 후에, 이어서 다른 비유로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비유로 교훈하신 대상자들이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18:9에,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라고 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믿고 타인을 멸시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 비유로 말씀하셨으므로, 단적으로 말해서 ‘교만한 자들’을 위한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 기도하기 위하여 바리새인과 세리가 올라갔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분리된 자들로서, 자기들만 잘 믿고 자기들만 거룩하고 자기들만 깨끗하고 자기들만 율법을 준행하고 있는자들인 척 위선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반면 세리들은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받아서 로마에 갖다 바치는 매국노 취급을 받았고 또한 그 세금을 가로채서 부를 누리는 수전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로, 항상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이며 일반적인 판단으로서는 바리새인보다 세리가 더욱 악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바리새인들은 의를 대표하는 자처럼 보였고, 반면에 세리는 부정과 불의를 대표하는 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이들이 똑같이 성전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11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이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자기의 탁월함과 우월함에 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생활이나 신앙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나는 저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모범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임을 강조하며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 사람은 지금 거짓으로, 위선적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의 의와 공로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을 무시한 것일 뿐이지 진정한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자랑거리만 늘어놓으며 하나님께 거만하게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업적을 읊조리는 기도는 종교적인 기만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혹자는 이것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넋두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기도가 아니라, 자화자찬한 독백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어서 세리의 기도가 나옵니다.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어서서 기도를 합니다.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기도는 단순하며 회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밝히며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자비의 대상이 될 자격이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기도의 모습을 비유로 가르치신 주님이, 이제 직접 이 두 사람에 대한 결론을 말씀하셨습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으로, 누가 의롭다함을 얻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사람은 결코 의롭다함을 얻지 못하였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던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은혜를 바란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고, 죄를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롭다함이 진정한 가치가 있는 의로움인 것입니다. 세리는 오로지 자기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비유의 교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겸손한 기도,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용서를 비는 기도가 응답을 받는다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세리처럼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가슴을 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 응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합심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18:19-20).
예수님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1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 본문을 교회의 ‘권징’과 연결을 합니다. 권징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법과 교회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합당한 벌을 가하는 것입니다. 이 권징은 상자 안의 썩은 사과 하나가 있을 때, 빨리 그것을 제거해야, 다른 사과가 썩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면 권징에 앞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그 사람의 신앙을 바로 세우는 매우 중요한 일이 권징인데, 이렇게 중요한 일을 시행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마태복음 18:19-20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두 구절은 교회의 권징과 연관하여 성도들이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합심’(쉼포네오)인데 이는 서로 뜻을 같이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오케스트라의 심포니(symphony)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두 세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말은 교회가 시벌이나 해벌을 할 때, 정말 온 교우들이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진지하게 구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권징이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극단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교회안에서 누가 크게 죄를 지은 사람이 발견이 되면, 당회가 모여서 그 사람의 죄를 다 조사를 해서 당회에서 그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데 어느 정도 벌을 주어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결정이 되면 그것을 교회 앞에 공포를 합니다. 그리고 그 시벌 기간이 다 끝나게 되면 다시 당회가 모여서 시벌 당한 사람이 참으로 회개하고 시벌 당한 사유가 없어졌는지를 확인하고 당회의 결의를 거쳐 해벌을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같은 일련의 권징 과정속에서 교회가 합심해서 서로 기도해서 시벌도 하고 해벌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들이 모이든 교회 전체가 모이든 이런 일을 앞두고 하나님의 뜻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합심헤서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시벌이든 해벌이든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하더라도 여럿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문제의 해결점을 가르쳐 주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리해야 개인이든 교회든 건강하게 세워진다는 말씀입니다.
4. 예수님은 ‘타인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눅 6:27-28, 눅 11:5-8, 눅 23:28)
예수님은 중보기도를 많이 하셨을 뿐만아니라, 또한 중보기도 하라고 가르쳐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하여 기도에 관한 우리의 좁은 지식을 더욱더 폭넓고 깊게 가질 수 있습니다.
1)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27-28에,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민족만 사랑함으로써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레19:18)을 제한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런 잘못을 완전히 거절하시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당하게 대하고 폭행을 한다 해도 복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저주하는 자’와 ‘모욕하는 자’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입니다. 무례한 자들에 대한 크리스찬의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악을 선으로 정복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핍박자, 원수를 위한 중보기도는 부름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땅한 행위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는 말씀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주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인은 그들을 위해 중보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인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벧전 3:9)라고 함으로, 주님의 교훈을 반사하고 있습니다.
2) 이웃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눅 11:5-8).
여기에 세 명의 친구가 나오는데, 한 친구 집에 밤중에 여행 중에 있던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배가 상당히 고팠던 것 같습니다. 자기 집에는 대접할 것이 없어서 다른 친구 집에 찾아가서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처음에는 집의 문도 닫혔고 아이들도 다 자고 있음으로 줄 수 없다고 얘기하다가 친구의 간청함에 그 소용대로 주었다고 합니다.
떡을 빌리려 간 친구는 그것을 자기가 먹기 위함이 아니고, 밤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친구는 찾아온 친구를 위하여 떡 집 친구에게 간청을 한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마름과 주림의 자리에 대신 서는 예를 통해, 주님은 우리도 이웃을 위하여 중보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3) 주님은 너희와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가셨습니다. 온 몸은 이미 피투성이 된 채, 십자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쓰러지고 또 쓰러지셨습니다. 군인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을 끌어다가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오면서 조롱도 하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으로 하염없이 울면서 주님을 따라오는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였습니다. 주님이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는 그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우선 주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고, 나는 이 사명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으로 나를 위하여 눈물로 동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로 인하여 동정을 받을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씀은,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며 슬피 울며 가슴을 치던 이 여인들의 동정의 대상을 바꾸라는 얘기입니다. 주님에게서 너희와 너희 자녀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왜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셨을까요? 또한 왜 울며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환난의 때가 다가오는데, 그때가 되면 아이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를 대비하여 부모들은 자신과 자녀들을 위하여 울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고 자녀들은 부모의 기도를 받아야 할 당연함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한 가정은 환난의 때를 이길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적 타락과 세속적 문화의 범람으로 인해 갈 바를 알지 못하는 현대의 청소년들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사역은 현 시대를 볼 때 긴급히 요청되는 사항입니다. 비록 자신들의 육적인 자녀가 아니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 있는 신앙의 어린 자녀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우는 것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처럼 주님은 누가복음의 세 본문을 통하여 모욕하는 자들을 위하여,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너희와 자녀들을 위하여 울며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곧 이웃을 위하여 중보기도 할 것을 교훈하여 주신 것입니다.
결론
오늘도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크게 네 가지 사항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기도할 때,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회개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치 세리처럼 ‘가슴을 치며 나는 죄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응답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히 교회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는 교회가 앞서 합심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예수님은 타인의 유익을 위하여 중보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특히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이웃의 필요를 위하여, 자녀를 위하여 울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이 내용을 마음에 담고, 한 주간도 여호와의 낯을 간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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