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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04 16 온유하신 주를 본 받으라 이정현 목사 202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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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1:29-30절 개역개정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3416일 마 11:29-30, 온유하신 주를 본 받으라.

 

4월의 주제가 온유와 순종인데, 부활절 관계로 지난 두 주일에는 부활에 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온유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 나머지 두 주일에 걸쳐서는 순종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성경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은 온유하신 분이라고 표현된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온유하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는 분명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고 하셨고 구약성경에도 그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은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전체 4단계로 나누어서 온유에 대한 말씀을 살펴봄으로 함께 은혜받고자 합니다.

 

1. 온유란 무엇인가?

 

온유를 히브리어로 아나우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이는 자기를 하나님의 비천한 종으로 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에 대하여 노하거나 교만한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사실 온유는 겸손과 거의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도 온유와 겸손을 함께 언급하고 있기도 합니다(3:12, 11:29, 4:2).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교만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겸허하고 동정심이 많은 것을 말합니다. 결국 온유한 자는 하나님과 이웃과의 양쪽 관계가 다 원만하고 좋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라는 말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중용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동양과 서양철학을 통틀어서 사람들의 성품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하는 덕목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힘과 부드러움이 결합된 것을 의미합니다. 분노 속에서도 마음속에 평온함과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중용이란 어원은 왕이 반란을 일으킨 신하에게 보복을 행사할 수 있으나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온정을 베풀었다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고 합니다. 죄를 따라서 갚지 아니하고 그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온유라는 것은 부드러운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온유란 변화 받은 기질을 말합니다. 모난 성격이 주안에서 부드럽게 변화 받은 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태어날 때부터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의 생명 안에서 변화 받지 않으면 그 속에는 이기심, 질투심, 고집 등이 남아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들어 쓰실 때 착한 사람만 쓰시는 것이 아니고 주안에서 변화되어 온유하게 된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혈기 방자한 모세를 광야에서 40년을 지나게 하시어 그의 기질을 온유하게 만드시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 출애굽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헬라어 온유라는 단어도(프라우테스) 결국 야생마를 길드려 유순한 말로 바꾸어 주인이 명마로 사용하는 데 사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옛날 철학자의 말도 일리는 있지만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온유의 정의를 이해하고 그 기준에 맞추어 온유를 배우고 그리스도의 온유를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2. 성경에서 온유의 본이 되신 분은 모세와 예수님이시다.

 

구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을 꼽으라면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을 때(12)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이를 비방했습니다. 아마도 모세의 본처인 십보라가 죽고 대신 함 족속의 후예인 구스 여자를 취하여 새로운 아내로 맞이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장차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아름다운 연합 관계를 본보기로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같은 깊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미리암과 아론은 그를 비방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건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세의 리더십 자체에도 도전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라고 하며 강하게 도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신의 분노와 혈기로 대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12:3)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로 비방하는 자들 앞에서도 긍휼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보다 그 온유함이 월등히 뛰어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온유했던 모세도 인간인지라 신 광야에서는 물이 없어 원망하는 무리 앞에서 혈기에 찬 지팡이로 반석을 2회나 내리쳤던 적이 있습니다(20). 모세의 온유함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는 뛰어나지만 역시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온유함과 대조적인 장면도 성경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아서 내려 올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고 있을 때 모세는 그들에게 십계명의 두 돌판을 집어던져 깨트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온유했던 모세가 어찌 이렇게 화를 분출하는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이것은 온유함 중에 모세가 보였던 공의로운 의분이었던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강렬한 대처, 말씀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던 그들이 말씀을 받기도 전에 우상 숭배하는 그들의 모습에 모세는 의분을 가졌던 것입니다. 십계명의 돌판을 그들을 향하여 던져서 깨트린 것은 너희들이 먼저 이 계명을 어겼다는 상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에게 부드러운 면 뿐만아니라 의분을 분출했던 면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가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은 바로 모세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 온유함을 본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모세의 온유함에는 부드러운 면과 함께 강인한 면도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온유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신구약을 통틀어 유일하게 온유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온유하심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이 되어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분은 온유하신 성품을 가지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몇 구절만 소개하겠습니다.

 

이사야 40:11 말씀입니다. “그는 목자처럼 그의 양 떼를 먹이실 것이요 자기 팔로 어린양들을 모아 그의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와 함께 있는 것들을 유순하게 인도하시리라.” 장차 오실 메시야는 목자처럼 양을 먹이시고 자기 팔로 어린양을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유순하게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은 이사야 42:2-3 말씀입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음성을 높이지 아니하며 그의 음성이 길거리에서 들리지도 않게 하리라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그는 심판을 진리로 가져오리라.” 이 구절은 그의 음성을 높이지 아니하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는 온유하신 메시야의 성품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메시야의 고난을 말하는 이사야 53:7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억압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여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그가 어린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또 털 깎는 자들 앞의 양이 말 없듯이 그가 자기 입을 열지 아니하는도다.” 이 구절은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것으로 그가 고난을 당하여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말씀들은 물론 온유라는 직접적인 단어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실 메시야의 온유함을 잘 표현한 말씀들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야는 온유하신 성품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이같은 예언의 말씀을 따라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29). 주님은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면서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녀를 자유의 몸으로 보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남들처럼 돌맹이를 들고 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모세의 율법을 강조하여 이런 여자는 죽여야 된다고 목소리 높여서 주장하지도 아니했고 오로지 온유한 마음으로 그녀를 불쌍히 여겨 정죄하지 아니하고 자유의 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자기를 향해 온갖 수모와 멸시를 퍼붓는 저 군중들, 멸시와 희롱을 퍼붓는 저 대제사장과 장로들,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밑에서 주님의 옷이나 제비 뽑고 있는 군병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알지 못하고 저렇게 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사야 53:12의 예언에서 그가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셨다고 하신대로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마치 중용의 의미에서처럼 자기를 향해 반역을 일으킨 자들을 왕이 용서하는 것처럼 주님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온유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온유하신 주님이 분노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성전 청결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성전 안에 돈을 바꾸는 사람들과 짐승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로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난장판이 되어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쫓아내시고 상을 엎으시면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신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21:13). 이것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가장 의분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예수님이 가장 온유하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각자에게 온유와 거리가 먼듯한 이런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한마디로 이것이 자기를 위한 본노인가 아니면 정의와 남을 위한 분노인가의 문제입니다. 자기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본노이고 정의와 남의 유익을 위한 분노라면 그것은 온유한 자의 강한 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의 부드러운 면과 강직한 면이 한데 어우러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와 주님의 공통 분모가 있는데 부드러운 것도 있고 때와 상황에 따라서는 공의와 의분을 갖고 강력하게 대하는 것도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서 대면하면 비천하고 너희에게서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이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공손함으로 너희에게 권고하노라”(고후 10:1). 앞부분을 보면 바울이 양면성-이중적인 얼굴로 고리도교인들 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바울을 적대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대면하여서는 비천하고 비굴한 모습으로 대하다가 막상 그들을 멀리 떠나 있으면 강하고 담대한 어조로 대하였다고 비난을 한 것입니다(고전 2:3). 본문에서 바울은 이에 대해 해명을 하면서, ‘나는 너희들을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공손함으로 권고한다고 한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예나 지금이나 너희들과 함께 있을 때나 떠나 있으나 항상 그리스도의 온유함으로 너희들을 권고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품고 계셨던 그 온유함이 바울에게도 있어서 그 온유함과 공손함으로 너희를 대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목회를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주님의 온유하심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셨고 고통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아니하셨으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의탁하셨느니라”(벧전 2:23). 베드로는 주님이 군병들에게 고문과 모욕과 멸시와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지켜본 자로 이렇게 생생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의 악행대로 갚지 아니하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셨습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나 그것을 갚지 않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 이것이 곧 주님의 온유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록 열정적으로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행태를 비판하시고 그들을 말씀으로 공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기도 하셨지만 그분의 마음은 온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도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그분은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상처를 치유해 주시며 그리고 마음이 약한 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자상하신 주님이시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는 복음을, 눈먼 자에게는 다시 보게 함을, 포로 된 자들에게는 자유를 주신 분이시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 보이셨던 분이십니다.

 

3. 온유는 우리가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선함, 부드러움, 온유는 내적인 것이요, 영적인 것이요, 우리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문제입니다. 내면의 온유가 어떻게 외부로 보여질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고 외쳤는데, 온유함 역시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바울 역시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3:2)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행위로 보여 주어야 하듯, 온유함 역시 보여주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보일지니라’(3:13). 온유함을 속에 가지고만 있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보여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서신입니다(고후 3:3). 고로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말씀을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것들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성도들의 책무입니다. 선한 행위로, 일로, 빛으로, 열매로, 향기로 그 무엇인가를 볼 수 있도록 해 주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사람들에게 영적인 것을 보여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속에 온유함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을 이제부터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바로 잡아줄 때 온유해야 하고(6:2),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온유함으로 일깨워주어야 합니다(딤후 2:25). 형제들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4:2, 3:12). 우리는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하며(3:2), 온유함으로 선한 행실에서 나오는 행위로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3:13). 바레트라는 유명한 주석가는 기독교인의 가장 특징적인 덕목은 온유라고 하면서 이것을 삶으로 나타내야 참 신자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볼 때 자신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온유라는 것입니다. 물론 넓은 면에서는 사랑을 보고 다르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크리스챤에게서 온유한 성품을 볼 때 자신과 다른 무엇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무리 새벽기도를 다니고 교회 직책을 맡았어도 성도에게서 온유함을 보지 못한다면 자신과 다른 것이 없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즉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보일 때는 크리스챤의 온유한 성품을 보았을 때입니다. 복수해야 할 때에 복수하지 않고, 화를 내야할 때 화를 내지 않고, 인내할 수 없을 때 인내하고, 참을 수 없을 때 참을 수 있는 것을 보면 기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안에 있는 온유한 마음을 말과 행동을 통하여 이웃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온유는 성령의 열매이다.

 

온유와 관계된 잘 알려지고 유명한 성구가 세 곳이 있는데 먼저는 팔복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5:5). 완악한 마음으로 욕심을 부리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부드럽고 겸손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음은 사랑을 설명하면서 온유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사랑과 온유함을 동일 선상에 놓고 있습니다.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온유하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는 온유는 성령의 열매라는 설명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성령에 의해 온유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팔복의 온유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와 사랑으로서의 온유가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팔 복 중의 온유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헬라어 프라우스라는 단어를 쓰고 사랑으로서의 온유는 크레토스를 쓰고 있습니다. 헬라어가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단어 의미는 같다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불신자와 기독교인을 구분하여 기독교인만이 온유하여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고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말할 것도 없이 성령님의 역사로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고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아가페이기에 온유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합해 보자면 팔복의 온유와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와 사랑으로서의 온유는 다 같은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없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온유는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나누어주는 기준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를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온유하게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을 때 나타나는 자연적 열매 중의 하나가 온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매일 그의 다스림 속에서 살아갈 때 나타나는 열매가 온유입니다.

 

훌륭한 세계적인 교회의 지도자들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크렌머에 대한 후대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켄터베리의 주교인 크렌머와 충돌하여라. 그리하면 너는 영원히 그의 친구가 되리라.’ 크렌머와 의견충돌을 하든지 아니면 대들며 싸움을 하더라도 그가 너희를 온유함으로 대할 것이니 결국 너는 그의 영원한 친구가 되고 말 것이라는 속담입니다.

 

중세의 성자 버나드는 그의 눈이 비둘기같이 온유하였다고 했고 사람들이 보나벤츄라를 보면 아담이 범죄하지 않은 것 같다고 표현을 했고 키프리안도 교회 정치가로서 권위를 존중하며 온유를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이 정말 역사 가운데 온유하게 살았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온유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곧 성령의 다스림과 인도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통치 아래서 온유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성령 충만의 결과로 온유한 열매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자연인들의 지식과 경험과 노력으로는 온유해질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성령의 온전한 통치가 있을 때라야 비로서 온유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 때에 성령이 주시는 열매로 온유를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인 온유함이 있습니까?

만약 온유함이 있다면, 그 온유함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온유한 자는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습니다(1:21). 우리 마음에 온유함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와 자세가 다른 것입니다. 말씀 그대로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단단한 길가 밭이 아니라 부드러운 옥토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을 아멘으로 그대로 받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접붙여진 말씀 곧 능히 너희 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21)고 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수용성이야 말로 온유함에 대한 척도입니다. 점잖은 노신사는 복음을 거절하고, 천박한 무뢰한은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누가 온유한 자입니까? 마음이 부드럽고 온유한 자가 말씀을 잘 받아들입니다.

 

둘째, 온유한 자는 주님께 와서 배우는 자입니다(11:29). 완악한 자들은 세상의 대가들을 찾아서 배우는데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지만 주께 와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무엇이든지 주님께 와서 주님께 배우려고 합니다. 유유상종. 온유한 자는 온유하신 주님께 끌리는 법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예의바르고 겸손하지만 주님을 거부하는 자들은 전혀 온유한 자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높은 사람, 지식이 많은 대학교수 돈이 많은 부자가 주님께 배우려고 주 앞에 나온다면 바로 그 사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셋째, 온유한 자는 자신의 기분, 자존심이 상하고 다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즉각 반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해를 입을 때, 상처를 입을 때 누군가에게 당할 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온유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남에게 받는 비난, 모독, 오해, 수치, 욕설, 심지어 죽이려 하는 것까지도 기쁨으로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완악한 자는 그런 일이 있으면 이를 갈고 복수를 다짐하겠지만 온유한 자는 도리어 자신을 성찰하며 수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무반응입니다. 오해를 풀겠다고 설득하지 않고, 변명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조급해 하거나 분해 하지 않습니다. 대신 진리가 상하고, 하나님이 모독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꺼지지 않는 분노를 발하기도 합니다. 완악한 자들은 자신이 상하는 것, 자신이 당하는 것, 자신이 입은 손실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하나님, 교회, 진리가 입는 손실, 손해, 모독에 대해서는 무덤덤합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그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가장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의 모든 교우들은 온유한 자가 되어 진리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소망의 식구들은 날마다 주님에게 나와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소망의 성도들은 자기의 기분이 상하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모함을 받고 해를 입을 때라도 화를 내지 않고 보복하지 않으며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온유함을 본받아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온유를 추구하라’(딤전 6:11)고 하셨고, ‘너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겸손과 온유로 옷 입으라’(3:12)고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에스겔서 36:26에는,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하셨는데,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어 굳은 마음을 제하시고 부드러운 마음, 즉 온유한 마음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에 충만하여 온유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찬송/

기도 제목/ 온유한 주님의 성품을 닮게 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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