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5:11-17 개역개정
-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요한복음 15장 앞부분의 말씀은 2025년 첫 주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올해의 표어가 ‘제자도를 익히고 실천하는 해’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11을 근거로 이 주제를 설교하였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중요한 제자도가 바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거한다는 말은 그 안에 항상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 안에 항상 머물러 있고, 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에게 붙어 있으면, 주님의 자양분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제자도를 따라 살 때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시는 좋은 열매가 풍성할 줄 믿습니다.
오늘은 11절에서 17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11). 여기서 주님이 앞에 있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충만히 주시기 위함입니다. 평안도 나의 평안이라고 하셨듯이 기쁨도 나의 기쁨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에게 있는 이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한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너희에게 주어 너희 안에 그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여건과 환경 때문에 오는 기쁨이기 때문에 기쁨의 근거가 사라지면 곧 그 기쁨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기뻐할 수 있고요,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아이를 낳아서, 집이나 좋은 자동차를 사서, 병이 치료가 되어서, 손자 손녀들이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벌어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여건과 환경 때문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과 여건이 사라지거나 바뀌면 기쁨 역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적인 기쁨은 일시적이며 환경적인 기쁨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주님의 기쁨은 환경 때문에 오는 기쁨이 아니고 주님 때문에 오는 기쁨이고 일시적이지 않고 영원한 것이고 상대적인 가치가아니라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기쁨은 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이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내가 지금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라’(13)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하여 ‘내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히 있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불안, 염려, 근심 걱정, 우울함 대신에 나의 기쁨이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2:2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이렇게 진술하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부활의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워 아니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그런 기쁨을 가지신 주님이 바로 자기의 그 기쁨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이 기쁨을 소유하였고 그래서 어디에 가서 사역을 하더라도 이 기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가 감옥 안에서도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님의 이 기쁨을 갖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 짧은 구절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기뻐해야 한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 기쁜 신앙생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전천후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봄, 여름, 가울, 겨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시간적으로 늘 기뻐하라는 것이지요. 아침 점심 저녁으로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강조해야 할 주제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 기쁨이 반복 강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그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2.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아 소망교회 성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한없는 사랑을 입은 자들입니다. 구원을 받았다,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전재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져야 우리가 그 사랑으로 구원을 받아 소망교회 성도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돈이나 다른 그 무엇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나를 살리신 사랑입니다. 이것은 사랑할 만한 존재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할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것은 일 순간의 사랑이 아니라 변하지도 않으며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악이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갈 길을 모르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신 이 모든 것들을 이 ‘사랑’이라는 말속에 다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이 한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내용과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크게 깊고 높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우리 주님이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7절에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에는 반드시 모델과 셈플이 있습니다. 모델과 셈플을 보여주신 것 없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랑의 셈플이시고 모델이시고 모범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처럼,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이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일시적인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했다가 안했다가 하는 행위가 아니라 연속적으로 끝까지 해야 할 일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의 모델로 말씀하셨을 뿐만아니라 여기서는 서로 사랑의 모델로 가장 큰 사랑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보다도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자기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랑이 가장 고귀하고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은 2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원문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주님 자신에게 해당 되는 말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방식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서로 사랑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주는 것처럼 강렬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6, 18).
사도 요한은 에수님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어린 제자였다고 하고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라고 합니다.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도가 가장 오래 살았는데 그 사도 요한이 주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여 이렇게 기술한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서로 사랑하자.’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되 지속적으로 사랑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 또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제자도인 것입니다.
3.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14).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그 친구에게 강렬한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여기의 말씀을 주의해 보면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하셨는데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라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의 명령대로 살아가면 주님이 그런 사람들을 향해 너는 내 친구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을 주님께서 내 친구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의 인격에 동참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에 참여하는 것이고 주님의 삶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에서만 예수님과 친구 관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기의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는 말과는 다른 것입니다. 주님을 나의 친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게 아니라 주님이 네가 나의 친구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보고 당신의 나의 친구라고 말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그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그 주님이 우리보고 나의 친구요 형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으시고 형제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 주님이 우리를 종이라고 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종은 아버지(주인)의 집에 영원히 머무르지 못하며 아버지(주인)의 뜻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버지의 집에 머물며 아버지의 뜻을 앎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종이 아니라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그들에게 다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살았고 또한 주님의 친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주인의 종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형제, 친구로 사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고 그때부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사람에게 나의 친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근거는 창세기 18:17인데, 거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 하였음으로 자신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다 알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구로 부르시는 자를 이처럼 가까이 두시고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친화적인 아름다운 관계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친구로 선택하여 주셨고 친구로 불러주시고 지금도 좋은 친구 관계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형제를 종으로 대하지 말고, 그를 벗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친화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4.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면 다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6).
먼저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주님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 관계는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제자들이 사도로 세움받은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고 우리가 성도로 세움을 받은 것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배경이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되고 또한 주의 이름으로 무엇을 기도하든지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매 없는 외식자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선택하신 목적은 곧 가서 열매를 맺게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창세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게 붙어 있음으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고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응답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론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기쁨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주님에게 있으며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1)참된 기쁨은 타락한 인간의 내부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주님이 나의 마음 속에 주셔야만 가지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영원하고 참된 기쁨은 주님이 내 안에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2)우리가 어떻게 그 기쁨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까? 참된 기쁨은 말씀으로부터 옵니다. 에수님이 앞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해 주신 목적은 기쁨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에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그 기쁨을 받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기쁨의 조건이고 얻을 수 있는 수단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기쁨은 하나님의 말씀을 타고 오는 것입니다.
3)참된 기쁨은 어디에 주어지는가요? 그것은 우리 안에 주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마음 안에 주어진다고도 말할 수 있고, 또한 교회 공동체에 주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다른 이 큰 기쁨을 제자들의 공동체에 주시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기쁘면 신자의 마음 속에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4)그 기쁨이 얼마나 주어질까요? 참된 기쁨은 충만하게 주어집니다. 이것은 삶 전체에 가득찬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내 개인의 삶 전체에 주님의 기쁨으로 채워지고 더 나아가서 내 인생 전체가 기쁨으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주님이 주시는 그 전천후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 속에 충만히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기쁨이 충만하여,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세상에 드러내며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찬송/
기도 제목/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