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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22 엡2:1-10 오직 은혜(이은선 목사)
이은선 목사 2017-10-22 추천 0 댓글 0 조회 1415
[성경본문] 에베소서2:1-10 개역개정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오직 은혜의 의미 (에베소서 2장 1-10절)

소망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연속적으로 3주간 동안 종교개혁의 세 가지 원리인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설교하는 가운데 저에게 오직 은혜를 설교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저를 초청해주신 담임목사님과 모든 성도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그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고 오늘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 의미를 실천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의 근본원리와 정신은 바로 오늘 우리의 교회가 서 있는 바로 그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근본을 잃어버리면 그 신앙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다양한 사상들과 세상의 조류들이 일어나면서 사실은 종교개혁의 근본원리들이 점점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지난 주에 오직 성경에 대해 설교하셨는데,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신학계 안에서도 오직 성경의 원리보다는 점점 세상의 여러 학문들의 영향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오직 은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인간의 모든 능력들과 노력들이 하나님의 일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어떤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오직 은혜를 외쳤고, 그 오직 은혜는 어떤 의미를 가졌으며,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오직 은혜는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 것인지의 세 가지 측면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던 시대 로마가톨릭교회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협력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중세교회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면 인간이 그 은혜와 협력하여 공적을 쌓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 종류로 구분을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창조된 은혜와 창조되지 않은 은혜라는 두 종류를 구분했습니다. 창조되지 않은 은혜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는 것, 로마서 5장 5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같은 것을 로마가톨릭에서는 창조되지 않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조하여 창조된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만드는 모든 선물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실질적인 은혜와 습관적인 은혜로 나누었습니다. 실질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역사하시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말합니다. 이러한 실질적인 은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7성례를 통해 우리에게 주입되는 은혜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렇게 은혜가 주입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주셔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습관적인 은혜가 생겨나고,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성향이 되어 우리의 속사람을 점차로 바꾸어 나가 우리들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새로운 성향의 습관적인 은혜에서는 인간들의 협력이 중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습관적인 은혜에 우리의 노력으로 협력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성화되어가면서 공적을 쌓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습관적인 은혜로 성화되어가는 사람들에게 7성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주입되어 우리들을 도와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중세의 은혜교리는 상당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가장 핵심은 하나님이 은혜를 먼저 주시면, 그 습관적인 은혜와 함께 우리가 협력하여 공적을 쌓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세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작용하는 은총과 인간이 협력하는 은총이 있다고 구분합니다.

 이러한 중세의 가르침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게 되었을까요? 루터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가장 강조한 것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 부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완전히 타락하여 인간 편에서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허물은 헬라어로 파랍토마인데 곁길로 빗나가는 것을 의미하고 죄를 하말티아인데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은 하나님의 올바른 길에서 곁길로 빗나가거나 그 목표에서 벗어난 잘못된 길로 가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죄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2절에서 설명합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우리들은 세상의 풍조를 따라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 곧 마귀의 지배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3절에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면서 세상 풍조를 따라 가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가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서 마귀의 지배를 따라가면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36절에도 아들은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고,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들인 셈입니다. 왜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인가 하면, 그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4절에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이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진노의 자녀로 있던 그 비참하고 벗어날 길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풍성하신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그 풍성하신 긍휼로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였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그 긍휼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하셔서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은혜는 아무 자격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신 긍휼과 사랑으로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둘째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지금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셔서 현재의 구원을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이 세상의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사람이요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미 천국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앉은 것은 천상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장래에 천국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의 현재의 구원과 함께 미래의 구원까지 완전하게 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구원받는 것에 대하여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앞으로 오는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8절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종교개혁 시대에 오직 은혜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 구절의 의미입니다. 루터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을 때, 그러면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오느냐? 하는 것이지요? 믿음을 내가 가진다면 그 믿음은 나의 공로가 되고, 결국은 나의 공로로 가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 구절은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혀줍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냐?에 대해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라고 말한다면 동의반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헬라에서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어 구문으로 보면 이것은 바로 앞에 있는 단어인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데, 그 믿음마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도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그것도 선물로 거저 주는 것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라고 말합니다.

 오직 은혜라는 의미에서 하나 더 추가할 것은 로마서 3장 24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되었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직접적인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이라는 것입니다. 속량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대신 갚아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셔서 이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죄책에서는 풀려나게 되었고 우리의 오염된 본성의 상태에서는 이제 성령의 역사로 거룩해져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여 불의한 자였는데, 불의한 상태에서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도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1장 7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는 속량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대속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는 속량 곧 죄사함을 받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데, 그 은혜의 풍성함이 누구 안에서 실현되는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는데 있어서 오직 은혜라는 말은 이제 이러한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과 자비를 통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을 만한 조건도 없었고 하나님의 사랑에 합당한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향해 먼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신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과 자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인간 편에서의 어떠한 자격과 조건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자비하심으로써 그의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오직 은혜는 성부의 사랑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의 의를 전가시킴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시면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오직 은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셔 우리를 위한 의를 얻으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소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 4절과 5절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하여 그들에게 생겨난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였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령의 능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믿음을 은혜로 받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므로 오직 은혜는 성령님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과 성령의 믿음의 선물로 우리는 구원을 받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이 크신 은혜를 깨달았을 때, 중세의 복잡한 은혜 이론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철학이론들과 인간들의 사상에 기초한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러한 중세의 교리들을 거부하고 오직 은혜의 성경적인 구원론을 정립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 때문에 너무나 감격하였고, 그 은혜를 힘입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오직 은혜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어떠한 신앙생활의 유익을 얻게 되었을까요? 첫째로 지금까지 행위를 통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불안에서 벗어나 양심의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구원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구원이 인간 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확고한 계획과 뜻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에라스무스와의 자유의지논쟁입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무엇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1장 4-6절에서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계획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신 것이 제일 먼저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를 예정하시는데 그 시기는 창세 전이었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가요?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셨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더라도 구원받는다고 잘못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은 그와는 분명하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사랑하시는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거저 주시는 바 은혜 때문에 우리는 예정받은 그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정에서부터 나오는 구원의 계획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 15장 11에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우리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를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데, 요한복음 1장 13절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그러면 오직 은혜를 우리는 신앙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거저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을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은혜를 모르면 배은망덕하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참으로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문둥병을 고침받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병고침을 받고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마리아 사람은 병고침받은 은혜에 더하여 영혼의 구원까지 받는 더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감사에 더하여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말씀합니다. 은혜를 맛본 사람일수록 더욱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그 은혜를 사모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때를 따라 돋는 은혜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때를 따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풀어주시기에 그 보좌는 은혜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는 그곳에서부터 우리에게 은혜가 흘러나오고 있는 근원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영상을 두 곳을 통하여 보여줍니다. 하나는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성전에서부터 은혜의 강물이 흘러나오는 장면입니다. 성전에서부터 물이 흘러 나와서 점점 더 깊어져 사람이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 좌우편에는 나무가 심히 많았습니다. 47장 7-8절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부터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무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곳마다 각처에 모든 것일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흘러가면 죽었던 것들조차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서 은혜의 강물이 흐르면 흘러 가는 곳마다 이렇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예언이었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도 나타납니다. 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시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편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물이 흘러 모든 것들을 살려 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가 바로 생명수 강물이 흐르는 은혜의 보좌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할 때에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으며 풍성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로 은혜의 근원이시기에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게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은혜를 누리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면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20장 24절에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은혜의 복음을 풍성하게 체험하고 나서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은혜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그 전도의 일생은 바로 그 은혜의 복음을 체험한 결과였습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는 어떻게 종교개혁을 일으키며 유럽의 사회를 바꾸었으며 칼빈은 그렇게 제네바를 개혁하고 온 유럽에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은혜의 복음을 재발견하였고 그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였기에 그러한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다른 사람들도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대신교단을 설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고 안양대학교를 세웠던 김치선 목사님도 은혜의 복음을 체험하고 난 후에 300만 구령운동을 일으켰고 2만 8천 동리에 가서 우물을 파라고 하셨습니다. 

 넷째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위해 지음받은 사람들이므로 선한 일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엡2:10) 이것을 루터는 선물을 받아야 과업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은혜의 선물(gabe)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토대로 해서 선한 일을 하는 과업(aufgabe)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우리를 선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선한 열매를 맺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므로, 그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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