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로마서1:1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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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 [성경본문] 히브리서11:1-3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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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 도입 ▣
오늘은 지난 15일 주일부터 시작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특별예배」의 세 번째 시간이자 마지막 시간이다. 따라서 내용이 다소 중복되거나 관점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전체적으로는 일맥상통하는 내용을 전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이 종교개혁의 의미에 대해 이미 들으셨던 말씀들의 전체적인 결론에 이르는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두 주 동안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가지고 말씀을 함께 나누었다.
1) 10월 15일: 오직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이정현 목사
2) 10월 22일: 오직 은혜(Sola Gratia)-이은선 목사
이상과 같은 내용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오늘 종교개혁 핵심 정신의 또 하나가 되는 ‘오직 믿음’(Sola Fide)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믿음장’이라고 일컫는 히브리서 11장 가운데 1-3절의 내용을 가지고 ‘믿음의 본질’(essence of faith)이 무엇인지에 대해 규명해 보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밝혀진 이 ‘믿음의 본질’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 동인이 된 말씀, 즉 롬 1:17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의미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당시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원관을 부정하고, 왜 ‘오직 믿음’이라고 했는지, 아니, 왜 ‘오직 믿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러분! 믿음의 세계는 참으로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성경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이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 했다.
▣ 믿음에 대한 이해 ▣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에 앞서서 믿음에 대한 일반적 관점의 이야기를 먼저 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보통 ‘믿음’ 또는 ‘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형용사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믿음이 ‘좋다 나쁘다’, ‘뜨겁다 차다’, ‘크다 작다’, ‘강하다 약하다’, ‘깊다 얕다’라고 한다.(cf. 마 8:26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14:31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마 15:28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런데 정말 믿음이 이런 것일까?
1. 신앙의 성경적 개념
성경에서 신앙, 즉 믿음은 단순한 인식이나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전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는 신앙의 개념을 “끈기가 있는, 심지가 굳은” 모습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라한 모습 믿음은 단지 어떤 태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총제적인 모습과 관련되어 있다(창 15:4-6, 신 26:5-9, 사 7:7-9). 그래서 이사야 7:9b에 보면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있다. 굳게 믿어야 굳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기존재를 하나님께 근거시키는 것, 다시 말하면 이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이처럼 구약에서의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었다.
신약성경에서의 신앙은 이러한 신뢰와 함께 그 신뢰의 대상에 대한 인정과 확신이며, 동시에 통찰로 파악된다. 그래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적 의미의 신앙이 전면에 등장한다(마 6:23, 막 9:23, 10:52). 요한복음에서는 이러한 신뢰와 함께 인식이 신앙의 구성적 요소로 나타난다. 또한 바울서신에서는 인격적 존재에 대한 신뢰가 신앙인데, 오직 이 신앙만이 구원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변호한다. 이처럼 신약성경에서의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롬 3:22, 갈 2:16), 하나님에 대해서(고전 1:9), 진리에 대해서(살후 2:13) 신뢰와 함께 인정과 통찰임을 말하고 있다.
2. 신앙의 요소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성경에 나타난 신앙의 의미를 종합해 볼 때에 신앙이라는 의미 속에는 지성적 요소로서의 지식(앎, notitia)과 감정적 요소로서의 동의(인정, assensus)와 의지적 요소로서의 신뢰(순종, fiducia)라고 하는 세 가지 본질적 요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의 신앙이란 그 대상을 앎(지식)으로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받아들임으로써 인정하고, 인정하므로써 신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세계에서 믿음의 대상을 신뢰하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 못하고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인정하고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는 동시적으로 같이 존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 셋 중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신뢰이다. 왜냐하면 이 신뢰를 통하여 우리 개개인은 구원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기 때문이다.
3. 신앙의 종류
성경에서는 이러한 신앙에 대해 몇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역사적인 신앙(historical faith)이 있다.
이는 어떤 영적 도덕적 목적도 가지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의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이 신앙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는 역사라도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관심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신앙은 진리를 지적으로는 받아들이나 진지하게 받지 않고 실제의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마 7:26, 행 26:27-28, 약 2:19).
둘째로, 이적의 신앙(faith of miracles)이 있다.
이는 이적이 자기에 의하여 또는 자기를 위하여 일으켜지게 될 것이라고 하는 개인의 확신을 말한다. 만일 사람이 스스로 이적을 행할 수 있다든가 혹은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면, 이는 능동적 의미에서 이적의 신앙을 소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마 17:20, 막 16:17-18).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이적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이는 수동적 의미에서의 이적의 신앙인 것이다(마 8:11-13, 요 11:22-25, 행 14:9). 이러한 이적의 신앙은 필연적이지는 않지만 구원적 신앙이 수반될 수도 있다.
셋째로, 일시적인 신앙(temporal faith)이 있다.
이는 양심의 자극이나 감정적인 감동을 일으키지만 중생한 심령에 뿌리박지 못한 종교적 진리들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이것이 일시적인 신앙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것은 영속적 신앙이 없어서 환난이나 핍박의 시대에 그 자체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13:20-21). 일반적으로 일시적 신앙은 감정적 생활에 기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오히려 개인적 기쁨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넷째로, 참된 구원적 신앙(true saving faith)이 있다.
이는 그 자리를 마음에 두고 중생한 생활에 그 뿌리를 박고 있는 신앙을 말한다. 이 신앙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며 죄인의 심령 속에 하나님에 의해 야기되는 잠재성(potentiality)이다. 이 신앙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서 일어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진실한 신뢰의 신앙을 말한다.
▣ 본문해설 ▣
오늘 본문말씀에는 이러한 신앙, 즉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가장 정확하게 소개되어 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믿음, 즉 신앙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 믿음의 ‘본질’을 아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본질’(本質)이란 “사물이나 현상을 성립시키는 근본적인 성질”을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나 현상을 알려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즉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본질에 대한 지식(앎)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본질에 대해 동의(인정)하게 되고, 나아가 신뢰(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을 일컬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이 믿음과 만물의 근원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장 4절부터는 창조 이후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 믿음을 삶의 근거로 붙들면서 살아 왔는지를 길게 진술하고 있다.
이처럼 오늘 본문은 믿음이란 것은 의인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요 근거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믿음이 곧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실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상’(휘포스타시스)이란 말은 ‘실체’(Essence) 또는 ‘본체’(Being)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상은 실체인데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말한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서 1장 3절로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11:1의 ‘실상’이라는 말은 히 1:3절에 나오는 ‘본체’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히 1:3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3)
이게 무슨 말씀인가? 히브리서는 그 시작이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히 1:3에서는 이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본체’와 ‘형상’의 관계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본체’란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 자신’을 말한다. 그리고 ‘형상’이란 본체인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본체가 형상이고 형상이 본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아들이시고 아들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요 14:8-10에서 빌립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는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 14:8-10)
그런데 이 히 1:3의 ‘본체’가 곧 11:1의 ‘실상’과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원어에도 보면 동일한 단어(휘포스타시스)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본체가 형상이고 형상이 본체이듯이 실상이 본체이고 본체가 실상이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러한 관계를 정리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그러면 믿음은 바라는 것의 본체이기도 하고, 바라는 것의 형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본체요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형상을 무엇이라고 했는가? 본체와 동일한 존재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동일한 존재가 어떤 존재라고 했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즉 믿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는 말씀에 이어서 그것을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 여기서 ‘증거’(엘렝코스)라는 말은 ‘확신한다’, ‘틀림없다’, ‘확실히 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본체’가, ‘실상’이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본체’와 ‘실상’은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한다, 틀림이 없다, 확실히 안다는 말이다.
사랑하는 여려분!
이것이 믿음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처럼 믿음의 본질이란 단순한 우리의 인식이나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히브리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는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 11장 다음인 12장으로 넘어가면 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이 말씀을 영어성경 가운데 ‘The Holy Bible’과 우리말 공동변역 성서에 보면 “믿음의 주”를 “믿음의 근원”이라고 했다. 근원이란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근원이요 본질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믿음의 근원과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롬 1:17에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 보다 더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이 말씀은 바울이 하박국 2:4를 인용해서 한 말씀인데, 이 말씀에 의하면 의인이 사는 근거는 믿음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의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의는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인이 살 수 있는 근거로서의 믿음은 복음으로 비롯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은 “오직 의인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의인이 살 수 있는 근거로서의 복음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복음 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고, 이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며, 이 복음이 의인을 살게 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 복음에 대해서 증거하기를 롬 1:2 이하에서 “이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다. 그렇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바로 이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가 의인이 살 수 있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자들이 외치기를 ‘오직 믿음’으로 라는 것이었으며, ‘오직 믿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개혁자들의 이 외침은 ‘오직 예수’만으로 라는 것이며, ‘오직 예수’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요한복음에서는 집중적으로 이렇게 증거 하고 있다.
요 6:3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요 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요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
요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결어 ▣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 우리의 믿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믿음의 근원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믿음의 근거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시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만질 수 없는 실상이요 볼 수 없는 증거이지만, 그 분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으며, 지금도 존재하고 계시며, 영원토록 존재하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믿음의 본질이요, 우리 삶의 희망이요, 우리 구원의 완성이다.
여러분!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참으로 소중한 시간들을 만나고 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붙였다. 그는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오직 성경과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지난 2주 전부터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하면서 진정한 종교개혁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러한 시간은 단지 우리의 인생 속에서 한시적으로, 아니면 특별한 계획에 의해서만 만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의 온 삶을 통해 날마다 계속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찍이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 가르쳐 주신 그 내용과 정신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남은 생애를 이 지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 믿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주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인정하며 신뢰해야 한다. 성경은 이렇게 증거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삶, 이것이 우리가 이 시대 속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바로 계승하며 또한 누리는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오직 믿음’의 진정한 의미이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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