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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6 배곧소망교회 부흥회첫째날 이종전 교수 설교 -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훈
이종전 교수 2018-09-17 추천 0 댓글 0 조회 1406
[성경본문] 에베소서5:14 개역개정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907년 대부흥운동과 교훈

에베소서 5:14

 

이 종전 교수

 

I. 1907년 대부흥운동이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1907년 부흥운동은 빠지지 않고 언급한다. 특별히 성장을 중심으로 한국교회사를 살펴본다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이 운동이다. 하지만 부흥운동이 어떤 사람의 기획이나 선동에 의해서 일어나거나 진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운동으로 해석하지만 사실 운동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역사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운동으로 기획해서 전개할 수 있는 것이 부흥운동이라면 아마 부흥운동은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운동도 기획한 경우 크게 결과를 얻지 못한 것도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도 다르지 않다. 누구도 이 운동을 기획하지 않았고, 이 운동을 일으키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준비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해서 역사의 주인공으로 감당하도록 하시는 섭리를 통해서 일어나게 하신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제로 1907년 대부흥운동을 말하지만 이 운동의 출발은 1907년에 평양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그해 1월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집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역사적 출발점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어떤 한 사건이나 한 사람에 의해서 계획되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과 배경이 분명하게 있고 역사로 나타나는 것은 그 과정의 정점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1907년 대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있었던 감리교회 선교사들의 수양회를 기원으로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1907년 부흥운동이 비록 평양의 장대현장로교회에서 폭발했지만 정작 그 시작은 장로교회가 아닌 감리교회 선교사들의 수양회로부터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장로교회 선교사들이 1907년을 기점으로 하여 부흥운동을 계획해서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1903년 원산에서 있었던 감리교회 선교사들의 수양회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회 선교사인 화이트(Miss M.C. White)양을 초청하여 1주간 동안 기도와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 마침 이 집회에는 1898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파송을 받아 와서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로 강원도 북부지방에 활동하고 있었던 하디(Dr. R.A. Hardie)가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하디는 강원도 북부지방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의지와는 달리 선교의 효과를 얻지 못한 채 실의에 빠져있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원산 수양회에 참석하던 중 은혜를 체험하면서 위로와 함께 용기를 갖게 되었다는 소문이 평양주재 장로교회 선교사들에게도 전해졌고, 이 소식에 고무된 평양에서 사역하고 있던 선교사들이 평양에서도 수양회를 준비하여 같은 은혜를 체험하기 원하였다.

초기 한국교회사에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할 만큼 기독교회가 크게 성장한 곳이다. 마펫 선교사에 의하면 1899년 이후 평양에 있는 교회들이 크게 성장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 평양의 분위기를 힘 있고 활력이 넘치며 자립적이고 영향력 있는 최고의 상태였다고 한다. 또한 1903년 평양에 있는 장로교회들에서 세례를 준 통계에 의하면 1,104명이 세례를 받았고, 1063명이 학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당시 평양 장대현교회는 주일 오후에는 1,400여 명이 집회에 참석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와 함께 선교사들은 부흥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들도 더욱 힘을 얻어서 선교사명을 감당하기 원했다.

이러한 이유로 19068월 평양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원산에서 크게 영향을 끼친 하디 선교사를 평양으로 초청하여 한 주간 동안 집회(Bible Conference)가졌다. 하디의 설교와 간증을 통해서 참여했던 선교사들은 많은 은혜를 받았다. 이렇게 은혜를 받은 선교사들은 이어서 서울로 와서 연례회의에 참석을 했는데 이때 마침 뉴욕에서 온 존스턴(Howad Agnew Johnston)이 인도하는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존스턴 목사는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부흥의 불길에 대한 소식도 전하면서 한국교회의 분위기도 고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연결되면서 선교사들이나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같은 은혜로 충만하기를 원했다. 즉 그들은 기도하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부흥의 역사와 은혜가 나타나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중 190612월 선교사들은 특별기도회를 한 주간 가졌다. 이 기도회에 이어진 것이 190712일에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동계사경회였다. 이러한 과정을 본다면 소위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사경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다.

이렇게 평양의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그러한 은혜를 받기를 원하여 여러 날 동안 철야기도회를 했다. 그 연장선에 동계 사경회가 준비되어있었던 것이다. 부흥운동 자체를 기획한 것은 아니지만 사경회를 준비하면서 큰 깨달음과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했던 것이다. 19071월에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집회의 정확한 성격과 명칭은 남자를 위한 동계 사경회”(the Winter Bible Training Class for Men)였다. 또한 이 사경회는 장대현교회가 독자적으로 개최한 것이 아니라 주변 지역에 흩어져있는 교회들이 함께 참여하여 겨울 두 주간동안 약 800여 명이 함께 모여서 성경을 배우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게는 400여 교회가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1907년 사경회에는 특별히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약1000명이 넘는 회중들이 사경회에 참여했다.

이 사경회는 평양의 모든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4개 장로교회 선교부가 연합으로 계획한 것으로 특별히 남자들만을 위해서 2주간의 일정의 프로그램이었다. 따라서 이 사경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각 교회에서 선발된 대표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이들은 지방에서 사경회에 참석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평양시내의 신자들은 이 사경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다만 저녁 집회는 평양의 신자들도 참여할 수 있게 했는데 그것이 6(주일) 저녁부터 평양의 남자 신자들 참석할 수 있게 했다.

평양에 사는 남자신자들에게 저녁집회 참석이 허용이 되자 엄청난 상황이 만들어졌다. 사실은 남자들만 허용한 것도 장소의 협소함 때문이었는데 남자들에게 집회 참석이 허용되자 여자들의 불만이 커졌다. 결국 여자들을 위해서는 평양의 네 군데 장소를 마련해서 별도의 집회를 해야 했고, 학생들을 위한 장소도 숭실학교 예배실을 빌려서 별도로 집회를 했다. 장대현교회는 최대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1,500명 정도였다. 매일 저녁 장대현교회당에는 더 이상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와 깨달음과 회개로 이어지는 은혜의 충만함이 1907년 대부흥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회개운동과 함께 더욱 발전해갔다. 따라서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지칭되는 이 운동은 회개와 기도운동이라고 하 수 있다. 그만큼 깨달음의 역사가 나타났고 변화된 생활을 동반시켰다. 이렇게 외적으로 나타나는 변화에 사람들은 더 고무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운동은 각 교회와 학교, 신학교로 확산되어갔고 여자들을 위한 사경회(Women's Training Class of the Presbyterian Mission)가 별도로 열려야만 했다. 316일부터 두 주간 동안 이번에는 지방에 있는 여자 신자들을 위한 사경회가 역시 네 개 장로교회 선교부가 주최했다. 여자들이 먼 길을 와서 두 주간씩 머물면서 사경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시대가 아니었음에도 550명이나 참석해서 은혜를 사모했다.

이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은 이미 남자 사경회에서 있었던 일들과 그 분위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기대와 사모하는 마음이 컸다. 이미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회개와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왔다. 그만큼 깨달음도 컸고 은혜도 충만할 수 있었다. 또한 사모하는 마음의 간절함은 애절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는 단순히 은혜를 체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까지 매였던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각급 학교들로 이어져갔다. 이 부흥운동은 평양시내의 장로교회들은 물론이고 평양의 숭덕하교, 숭실학교가 중심이 되어서 부흥운동의 여파를 전달했다. 이 학교들은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방학이었다. 그렇지만 방학임에도 집에 돌아가지 않고 학교에 남아있던 학생들이 은혜에 동참했다. 또한 새학기가 시작되지 직전에 방학중의 자습을 테스트하는 시험기간 동안 매일 오후 네 시에 집회가 있었다.” 이 집회를 통해서 학생들은 큰 변화를 일으켰는데 동반되는 현상은 역시 같았다. 회개와 기도 이 두 단어는 이때 일어난 부흥운동의 특징이라고 해도 결코 틀리지 않는다.

이 부흥운동은 평양신학교가 개학하면서 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평양신학교는 4월부터 개학을 했는데 바로 직전에 여자들을 위한 사경회가 끝났다. 신학교가 개학을 하자 전국 각지에 흩어졌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미 방학 동안에 평양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다. 또한 가깝게는 부흥운동이 각 교회로 확산되는 과정을 통해서 직접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것은 1906년 가을에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학기를 맞이할 때 즉 1907년 봄학기를 시작하면서 매일 저녁 한 시간씩 기도와 함께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었다. 이 집회는 전교생이 모두 참석해야 하는 것으로 개학과 동시에 매일 저녁 모임을 가졌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죄를 일일이 회개하면서 은혜를 체험했다. 이렇게 충만함은 결국 수업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부흥운동은 평양을 넘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중심에는 선교사들의 사역이 있었다. 이길함(Graham Lee) 선교사는 선천, 헌트(William. B. Hunt) 선교사는 대구, 소안론(W. L. Swallen)은 광주, 길선주는 의주와 서울로 각각 흩어져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전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의 사경회가 끝난 후 217일부터 3주간 동안 서울에서 3개 장로교회 선교부가 연합하여 사경회를 개회했는데 이때 강사는 평양에서 은혜를 크게 체험한 길선주 장로였다. 길선주 장로가 자신이 체험한 신앙을 바탕으로 회개를 촉구했을 때 실제로 회개하는 일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부흥운동은 대구 등 지방으로 더욱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현상을 동반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평양대부흥운동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폭발하여 인근의 장로교회들을 통해서 확산되면서 전국적인 운동을 발전했다. 이 운동의 발전과 환산의 중심에 선 것은 장로교회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이 운동은 장로교회에만 국한하여 영향을 미쳤거나 장로교회만 성장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확산의 중심에 장로교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이 시기에 장로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만 있는 것은 아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한국교회 부흥의 출발점 내지는 계기로 해석하지 않고 과정의 현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1907년에 시작된 부흥운동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초청을 받아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전국적으로 이 운동의 여파가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또한 1907년을 기점으로 하여 장로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19066월까지 장로교회의 배찬회원이 12,506명이었는데 이듬해인 19076월에 15,097명으로 29%가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원입 교인수는 44,587명에서 59,787명으로 34%가 증가했다. 이렇게 볼 때 장로교회 신자수는 190654,987명에서 1907년에는 73,844명으로 역시 34%의 성장이 있었다.

그러나 평양대부흥운동이 남긴 것은 양적인 성장만이 아니다. 한국교회 안에 극복되지 못하고 있었던 도덕적 의식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특별히 회개를 동반한 은혜를 체험하면서 죄에 대한 의식이 분명해졌고, 회개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이끄시는 대로 회개하기를 기뻐했다. 그렇게 되므로 교회가 화복한 공동체로 발전했고, 선교사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많이 힘든 부분이었지만 부흥운동과 함께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신자들은 물론 선교사들도 자신이 피선교지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피선교지의 사람들과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서로가 잘못된 것들을 깨닫고 회개함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대부흥운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깨달음, 회개, 기도, 성령의 강권하심이다. 대부흥운동을 말하면 일반적으로 성장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1907년 대부흥운동은 백락준이 평가한 대로 내부적으로 비기독교인들을 개종시키는 운동이었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기독교 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되찾게 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성장에 미친 영향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기독교 내부의 변화와 영적 성장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러한 동의는 필자만이 아니라 최소한 한국교회사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곧 신자들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자신들에 대한 문제를 깨닫게 되면서 깨달음의 기쁨과 함께 회개가 일어났다. 깨달음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했고, 그 두려움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했으며, 주님으로부터 그 죄를 용서받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을 깨달음에 이은 회개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로 이 회개운동은 한국교회 내의 도덕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집회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전달되었고 신자들은 실제로 철저하게 깨달음과 뉘우침을 통해서 회개했다.

이와 함께 깨달음, 회개에 이어지는 것은 기도였다. 특별히 한국교회만 가지고 있는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은 새벽기도와 통성기도이다.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새벽기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매일 365일 새벽기도를 하는 교회는 없다. 하지만 평양대부흥운동과 함께 한국교회 안에는 새로운 전통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새벽기도회이며 통성기도이다. 새벽기도를 매일 교회적으로 하는 교회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새벽기도는 1907년 대부흥운동과 함께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큰 소리로 하는 통성기도는 역시 독특한 신앙의 문화를 형성시켰다. 이러한 현상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요인을 새벽기도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게 했을 만큼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II. 1907년 대부흥운동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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