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하박국3:2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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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제공: 대한성서공회
부흥, 가슴 뛰게 하는 소망
하박국 3:2
김 대진 교수
“부흥”, 우리는 이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부흥”은 우리 교회와 우리 모든 지체들의 소망과 기대,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 교회들이라면 “부흥”에 대한 소망은 더욱 간절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교회는 적어도 세 번의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첫 번째는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입니다. 두 번째는 1930년대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는 해방 후, 한국사회와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일어났습니다. 세 번의 부흥운동은 각각 특색이 있습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철저한 회개와 성경공부를 통한 부흥이었고, 한국교회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흥이었다고 한다면, 1930년대 부흥운동은 일본에 의한 무단정치 상황 속에서 신사참배와 창시개명, 한글사용금지 등과 같은 모든 주권이 사라졌던 시대에 방언과 신유, 예언과 같은 신비적 성향의 부흥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1970년대와 80년대에 한국교회에 임했던 부흥은 말 그대로 기하급수적인 양적 부흥이었고, 1907년도 부흥운동과 달리 교회와 목회자들이 부흥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부흥”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와 능력을 경험했던 한국교회는 다시금 한국 땅에 부흥의 역사가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하고, 교회의 부흥을 위해 온 힘을 다하자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더욱이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교회에 나타난 성장의 정체 혹은 감소 현상을 오랫동안 겪게 되면서 한국교회의 목회자를 비롯한 신자들은 “부흥”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부흥해야 합니다. 흥해야 합니다. 온 세상, 민족과 열방 가운데 우뚝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더러운 사단의 나라가 망했다고 하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하나님께 대항함으로 쫓겨나 공중의 권세를 잡고 하나님의 창조물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했던 그 어둠의 권세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부흥”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흔히 사람들은 부흥이라고 말하면 양적인 성장을 생각합니다. 교인이 많아지고 그래서 더 크고 넓은 예배당을 건축하는 것, 이것을 부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흥이라는 말에는 양적인 성장의 의미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흥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부흥에 대한 본질적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숫자적으로는 많이 성장을 하고, 큰 교회도 건축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부흥이 일어나지 않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숫자도 적고, 교회도 볼품이 없지만 참된 부흥을 경험하고, 그러한 부흥을 지속하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흥”을 주제로 한 3일 동안의 정기 기도회 가운데 먼저 하박국 3:2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이 우리 조국교회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의 부흥을 소망하는 것처럼 하박국 선지자 역시 이스라엘의 부흥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선지자는 “부흥”이라는 분명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선지자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부흥”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선지자가 말하는 부흥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1. 부흥의 의미
하박국 선지자는 본문에서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의 간구의 핵심은 이스라엘의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간구하는 이스라엘의 부흥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당시 이스라엘의 역사적 상황을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라 밖으로는 앗수르를 물리치고 새로운 근동지역의 패권자로 등장한 바벨론이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곧 이스라엘을 공격할 지경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퇴색하고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부패한 시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임박한 멸망의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의 공포가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바벨론의 공격이 아니라 영적인 부패였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의 공격의 원인이 바로 이스라엘의 영적 부패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우상을 섬기며, 온전하지 못한 삶을 통해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의 도구였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부흥을 요청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가 말하는 부흥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회복”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다스릴 때처럼 강력한 나라, 바로 그것이 선지자가 간구하는 부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국력의 회복이 아닙니다. 다윗의 나라가 강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부흥은 단지 과거의 영광의 시간을 회복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회복”의 의미를 가집니다.
동시에 부흥은 “단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회복은 “단절”은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회복하고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듯이 끊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은 모든 것이 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결국 죄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를 끊지 않으면 결코 회복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죄와 단절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부흥이라는 말에는 “회복”과 “단절”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의 방향성은 교회 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부흥에 대하여 간과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흥은 단순히 이방인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신앙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 공동체의 외적인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기존의 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돌아서서,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부흥은 단지 외적인 성장이나 교회의 발전, 양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다스리심,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거짓되고 불의한 삶으로부터 돌아서서,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의 삶의 가치관을 집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2. 우리에게 부흥은 어떤 의미인가?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부흥이 가지고 있는 회복과 단절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찾아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에도 부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그 부흥을 위해 기도와 헌신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부흥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째, 회개입니다. 부흥운동은 곧 회개운동입니다. “회개”란 “돌아서는 것”입니다. 시선과 관점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부흥은 죄의 단절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은 회개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한국의 상황을 바라볼 때 회개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도박, 마약, 음주, 음란, 부패, 거짓말, 낙태, 동성애 등이 심각한 상태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는 비단 비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사회이든 교회이든 결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부흥은 곧 회개를 의미합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그리고 우리 개인적으로 지나온 삶에서 잘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 연합입니다. 부흥운동은 분리된 것을 하나 되게 만듭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을 파괴합니다. 하나인 것을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자마자 인간에게 나타난 현상은 하나님으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진정한 부흥은 흩어진 것을 하나 되게 만듭니다. 나뉜 것을 하나 되게 만듭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주가 하나이듯” 모든 것이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꿈꾸는 부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합하고, 하나 되게 하는 일입니다.
셋째, 변화입니다. 회개를 통한 죄의 단절이라는 부흥의 의미는 곧 이어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삶이 변하고, 사고방식이 변하고, 언어가 변하고, 생각의 체질이 변고, 삶의 구체적인 행동이 변하고, 문화가 변해야 합니다. 죄의 단절은 곧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해지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은 변화를 그 열매로 나타내야 합니다. 회개를 말하면서도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모습을 바꾸어야 합니다. 죄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모양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본질이 변해야 합니다. 언어가 변하고, 관점이 변하고, 행동이 변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우리에게 허락하셨던 세 번의 부흥운동은 우리의 조국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힘들고 고단하고 피곤했던 시대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 능력을 경험하게 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선교사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먼저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도자들의 회개는 곧 교회 공동체의 회개로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역사는 곧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기록된 것처럼 은혜를 받으니까 사람들이 서로의 것을 통용하며, 서로의 죄를 자복하며, 흩어졌던 마음들이 하나가 되며, 나아가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은 암울했던 한국의 현실에 빛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부흥운동을 통해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한국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 희생하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입니다.
“부흥”은 단순히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위한 구호나 외침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는 부흥은 그저 교회만의 아니면 그리스도인들만의 점유물로 그것도 아니면 우리들만의 잔치로 끝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는 또다시 부흥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부흥을 허락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흥을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의 영적인 부흥과 삶의 변화만이 어두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부흥”이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식어진 우리의 심장이 다시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로 인해 소망으로 뛰어야 합니다. “부흥” 그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속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고 현실화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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