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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를 살려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심 (눅 7:11-17)
이정현 목사 2012-06-10 추천 0 댓글 0 조회 797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의 죽음에는 더 큰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저는 고2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초등학교 6학년이던 막내 여동생이 제일 슬프게 울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절망과 슬픔이었습니다. 그리고 장가가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는 ‘이제 고아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에 절망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을 세 번 살려주셨습니다. 죽은 지 4일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주셨고,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으며, 오늘의 본문 속에서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기사는 앞의 두 사건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앞의 두 사건은 누이의 간청과 아버지의 간청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은 아무런 간청이 없었음에도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살려주셨다는 것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비애에 젖은 한 죽음의 행렬이 나타납니다. 한 청년이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과부입니다. 남편을 여의고 이제 외아들마저 잃게 된 것입니다.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는 여자입니다. 이 아들은 이 어머니의 희망이자 살아가는 목적이었습니다. 나아가 어머니의 전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외동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슬픔, 절망, 비애, 고통, 마음의 아픔은 비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본문에는 나인성이 나오는데, ‘나인’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즐거운, 귀여운’이라는 뜻입니다.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32km, 나사렛에서는 동남쪽으로 9km 가량 떨어져 있는, 갈릴리 근방에 있는 큰 성입니다.
이 성에서 초상이 나서 상여를 매고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 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성 밖으로 내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그 문이 정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 정해진 문으로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랬습니다. 옛날 서울 장안에서 사람이 죽으면, 신당동 부근에 있는 광희문(=시구문, 屍驅門)이나 서소문을 통해 시체를 장안 밖으로 내갔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지체하지 않고 곧장 매장을 시켰습니다. 이 성의 많은 사람들도 청년의 죽음을 슬퍼하며 상여 행렬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었고, 비통과 애통의 행렬이었습니다. 달래주거나 해결해 줄 수 없고, 진정으로 위로해 줄 자가 없는 행렬이었습니다. 석가모니나 공자나 소크라테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장사지내려 가는 행렬과 정 반대로 나인성 안으로 들어오는 행렬이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나인성까지 좇아온,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행렬이었습니다. 조금 전에도 가버나움의 백부장의 하인을 낫게 함으로 기쁨과 생명이 넘치는 행렬이었고, 삶에 활력과 희망을 주는 행렬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의 만난 것입니다. 한 행렬은 나인성에서 밖으로 나오는 행렬로, 죽음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과 낙망의 행렬이었고, 다른 한 행렬은 나인성 안으로 들어가는 행렬로서, 생명과 기쁨과 행복과 희망의 행렬이었습니다. 이 두 행렬이 한 지점에서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식의 죽음으로 인하여 큰 슬픔에 빠진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의 마음과 동화가 되신 것입니다. 주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에도, 먼저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동정이 발동이 되어, 그를 치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하신 것은 주님의 위로였습니다. 그 눈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말씀입니다. 그의 내면에 흐르는 심한 고통의 눈물도 닦아주시며 위로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주님이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셨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관이나 시체에 손을 대면 부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관을 만진 손으로 다른 것을 만지면 그것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관에 손을 댄다는 것은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율법적인 사실보다는 사랑의 마음으로 관에다 손을 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죽은 이 사람이 청년인 줄 알았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었는지, 아니면 신적인 능력으로 스스로 아셨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청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주님은 여기 누워있는 자가 청년이었기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사시다가 노년에 병들어 돌아가셨다면 그리 안타까울 것이 없겠으나, 젊은 사람이 죽었고, 또한 어머니의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더욱 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주님은 청년이 자고 있는 것을 깨우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분명, 청년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그 청년에게, 창조주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그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말도 합니다. 그의 육체를 떠나갔던 영혼이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몇 시간만인지 몇 일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육체로부터 분리되었던 그 영혼이 주님의 명령으로 다시 되돌아 온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하여 다시 일어나서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 그 청년을 그의 어머니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를 살렸으니 이제부터 너는 나의 종이 되라고 하거나, 내가 너를 살렸으니 나의 제자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살렸으니 네가 나에게 무엇인가 보상을 하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죽었던 아들을 살려서 어머니에게 돌려보낸 것은, 그 어머니에게 생명과 기쁨과 삶의 목적을 되돌려 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절망이 크고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 속에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그 가운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약 성경 창세기 21장에,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종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집에서 쫓겨났을 때, 들에서 물이 떨어져 목말라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갈이 하나님께 방성대곡하며, “자식의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6)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축복을 약속하고, 눈을 밝혀서 샘물을 보게 하여 목말라 죽어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살리고 구원의 역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통곡하는 하갈에게 찾아오셔서 눈물을 씻겨주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여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죽음과 고통과 슬픔 중에 있는 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만나 주심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영국의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 1834~1892) 목사님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슬픔에 동정을 가지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라고 말했습니다.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고통당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불행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죽은 자를 살리라는 말이겠습니까? 죽었던 청년처럼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예언의 말씀들을 이루심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으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다음 구절에서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물어봅니다.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이 물음은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야가 당신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7:22) 구약에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심으로 주님이 메시야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죽음이란 인생의 최대의 문제 앞에 어떻게 할 수 없는 불쌍한 행렬과, 인생문제에 응답하시러 오신 그리스도의 행렬이 만난 것입니다. 두 행렬이 만난 결과로 죽은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청년이 부활함으로 그의 죽음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 죽음은 영원적이 아니라 임시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일어난 청년을 그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머니의 환희와 만족한 표정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생의 최대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또 일반군중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계신다.”하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만나 하나가 된 곳에는 벌써 죽음의 저주가 없습니다. 파스칼은 “그리스도를 떠난 죽음은 무섭고 기피할 바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은 기쁘고, 청결하고, 믿음으로 기뻐할 바다.”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라고 하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죽음은 적극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본문의 어머니의 경우 그녀의 독자가 죽고 또 다시 살므로 평생에 잊을 수 없는 큰 감격이 되었습니다. 평생 그 아들을 볼 때마다 이때의 사실을 생각하며 새로운 마음의 은혜와 용기가 된 줄로 압니다.
고전 15:54-55에는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는 깨뜨려지고, 인류 위에 영생의 길이 터인 것입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는 단순히 죽음에 위로하신 것이 아니라 나아가 죽음을 해결하신 것입니다. 대설교자 스펄젼은 “인간의 위대성은 양면에서 나타났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협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고, 둘째, 그가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보내사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죽음은 해결된 것입니다. 죽음이 해결되자 그 장소에는 오직 기쁨과 만족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슬픔과 고통과 절망이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며, 육신적으로 연약함이 있으며, 영적으로 부족함이 있습니까? 관계적인 측면에서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까? 소외감, 좌절감, 무력감, 실의에 빠져있는 분은 없습니까? 오늘의 과부처럼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돈도 없고 건강도 없고 희망도 없고 사랑해 주는 사람도 없고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어 절망에 처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은 달라집니다. 주님은 자식을 잃고 큰 슬픔 중에 있었던 어머니에게, 죽었던 그 아들을 살려 주심으로, 생명, 희망, 삶의 목적, 기쁨을 안겨 주셨습니다.
경상남도 울산, 가난한 농촌 마을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중학교를 어렵게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려고 하였는데, 시험에 낙방하였습니다. 가정 형편도 어려운데 시험에 낙방했으니,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까지 가는 친구들을 보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소망과 꿈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버리는가 하고 좌절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에게도 믿음을 주시고 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도 공부하게 해 주옵소서.” 그러다가 주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새로운 희망가운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틈틈이 독학을 하여 마침내 농사를 지었던 산 경험을 가지고 농업고등학교를 진학하고, 농업대학교까지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경험도 많고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에 하와이로 유학까지 가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아프리카로 가서 그곳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수수 재배만 전문으로 연구하는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상을 받고, 아시아혁신상 은상, 대통령표창, 국제농업연구대상, 아프리카국가연합의 농업연구상을 받고 북한까지 가서 북한 사람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옥수수 재배를 가르쳤습니다. 이 분이 바로 옥수수 박사라고 불리는 김순권(金順權 ; 1945~ ) 박사님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를 만나 주심으로 그는 일평생 가치 있고 존경받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크나큰 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을 위하여 예수님 자신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을 위하여 육적인 필요도 채워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지만 한 번도 육적인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아픈 것도 고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고, 배고픈 자도 먹이시고, 모자라는 포도주까지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 육의 이중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은 이런 이중의 은혜를 풍성히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큰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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