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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계시는 하나님 (사45:14-17)
이정현 목사 2012-09-02 추천 1 댓글 0 조회 855

고등학교 선생님이 친구와 만나서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라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 학교에서 아이들 문제, 자녀들 이야기, 사회, 정치 돌아가는 이야기 등등 여러 가지 대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선생 되는 사람이 앞으로의 포부와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고 3을 담임하고 있기 때문에 게네들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말과 가족들이 건강하게 신앙생활 잘 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주 만나자는 말을 하고 젊은 두 친구는 헤어졌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고등학교 선생인 친구의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 부인은 울면서 말을 잇지 못하며 전화를 했습니다. 자기 남편이 어제 밤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안 일어나서 깨우니까 벌써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더랍니다. 심장 마비로 죽었습니다.

 

이제 40대 초반이고, 아이들도 한창 자라고 있고, 신앙생활과 직장생활도 원만하게 잘하고 있는 분이었고, 앞으로의 희망도 당차게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는데, 그만 밤새 안녕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친구가 목사라, 목사 친구가 장례를 다 치루고 나서 저에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만나게 되면, 그 당시, 어제 밤에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어디든지 다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어제 밤, 그 친구의 침실에서 왜 하나님은 그를 지켜주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장래가 총망 되는 그런 젊은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하나님이 안 계시는 걸까? 아니면 하나님이 숨어계시는 걸까?

 

일본 교토에 가시면 버려진 큰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무덤은 한국 사람들의 무덤입니다. 그러나 무덤 안에 있는 것은 사람의 시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코만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덤을 ‘코 무덤’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바뀌어서 ‘귀 무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은 대한민국으로 보낸 자기 부하들에게 전쟁의 공적을 보고하라고 하면서 조선인들의 코를 베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수들은 닥치는대로 조선인들의 코를 벴습니다. 죽은 사람의 코를 베기도 했지만 산 사람들의 코도 베었고 아이들의 코도 베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코들을 한 곳에 모아서 소금으로 저려서 배편으로 일본 교토로 보내면 퐁신수길은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의 공적을 인정하고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조선 사람들의 코를 한 곳에 모아서 큰 무덤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이총’이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비총’이었으나 너무 잔인한 감을 준다고 해서 ‘이총’이라고 했답니다. 귀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 무덤 안에는 적어도 조선인들의 코가 10만개 정도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후부터 조선 땅에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거나, 아니면 위험한 것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비’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떠들거나 위험한 것을 만지면 코나 귀를 베어간다는 말로 조용히 시키거나 금지시킨 것입니다.

 

이 무덤에 묻혀있는 코의 주인공들은 정말 애매하게, 억울하게, 아무런 이유 없이 목숨을 잃거나 코 베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놈들에게 억울하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계셨다면 약소 민족 이 조선인들을 왜 돌봐 주시지 않으셨을까? 왜 그때 이 민족을 보호해 주시지 않고 일본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셨을까?

 

제가 몇 년 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회의 집회를 마치고, 인근 국가인 폴란드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가고자 했던 것은 아우슈비츠 감옥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제1, 2, 3감옥소까지 지어졌는데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큽니다. 이 수용소는 1,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들이 동유럽권의 저항군들과 반항자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만든 강제수용소입니다. 특별히 그때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군들의 행패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유태인들이 강제로 붙들려 와서 강제 노동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서 죽기도 했습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도 이런 장면들이 잘 표현 되었습니다.

 

샤워를 시켜준다고 거짓말을 하고 옷을 다 벗겨서 작은 밀실에 가두어 놓고 물대신, 위에서 가스를 살포하여 한거 번에 700명씩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잘라서 카펫트를 만들었고 가스실 옆에 화장장을 두어서 시체를 태우면서 기름을 받아 비누를 만들었습니다. 더 잔인했던 것은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독일군들은 이곳에서 적어도 100만 명, 많게는 400만 명의 유대인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했던 고통의 흔적들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핏자국도 남아있고 가스실과 화장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안경들, 사람들의 머리카락, 신발들, 이름들이 새겨진 수천 개의 가방들이 남아 있습니다.

 

나중에 러시아 군이 이 폴란드 지역을 진격해 왔을 때, 독일군은 이곳을 버리고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지역을 점령해 들어갔던 당시 러시아군의 지휘관이었던 아나톨리 샤피로 소령이 나중에 책을 한권 씁니다. 그 책에서 당시 상황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해방시킨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지옥을 빠져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후대의 사람들은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살인 공장’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우리는 또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때 그 당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그들의 후손들인 이 유태인들이 그런 고통과 억울함과 비참한 살인을 당하고 있었을 때, 왜 지켜 주시지 않으셨는가?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무자비한 독일군들을 심판해서 유대인들을 그 가운데서 건져 주시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이 안 계신 건가? 숨어계시는 건가?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사야 45장인데,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 경에 예언자 활동을 했던 인물입니다. 그의 예언서의 중심 내용은 ‘회개와 구속’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사야서 앞부분(1-39장)은 ‘너희들의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고, 뒷부분(40-66장)은, ‘너희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다, 구속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전체 내용을 회개와 구속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45장이기 때문에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갔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고 구속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회개하라는 말씀을 듣지 않다가 결국 바벨론 나라에 망하고 맙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1차, 2차, 3차에 걸쳐 이스라엘을 침략해 왔는데, 마지막 3차 때에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정복하고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아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곽은 다 부서졌습니다. 모든 가옥이 불타고 말았고 토지는 황폐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성전도 초토화가 되었고 사람들은 질질끌려서 바벨론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게 되는데, 비참한 노예 신세가 되어서 억압과 고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됩니다. 부모자식을 잃고, 토지 가옥을 잃고, 하나님의 성전을 잃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잃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들은 노예로 장장 70년을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숨어 계신 하나님이신 것 같습니다. 그 백성이 무차별 이방인의 침략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신 성전이 다 불타 버릴 때에도 하나님은 숨어 계셨습니다. 왕족과 귀족들이 포로지로 질질 끌려갈 때에도, 하나님은 숨어서 지켜만 보신 것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상황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숨어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앞길이 너무 답답하고 막막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은 없고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시니까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기자도 한 때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재를 잊으시나이까.”(시44:23-24) 하나님이여 얼굴을 가리워 숨어만 계시지 말고 나타나셔서 우리의 고난과 압재를 굽어 살펴 달라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뿐만 아니라 욥도 동일한 의도로 말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23:8-9) 사방 팔방을 살펴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으니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도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라 찾을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하나님이 포로지에 나타나셔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하고 간구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 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애굽과 구스와 스바가 나오는데, 애굽은 아프리카 북부에 위치한 나라로, 당시 세계의 최강국 중의 하나입니다. 나중에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세계 최강국 자리를 내어주기는 하지만 그 이후로도 여전히 영향력을 끼쳤던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구스는 에디오피아를 가리키는데, 이는 아프리카 동쪽 지역에 위치한 나라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스바는 구스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또한 구스는 애굽에 통폐합 된 경우가 많아서 애굽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스와 스바는 애굽에 예속된 작은 나라로 볼 수 있음으로, 큰 덩어리로 말하면 애굽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라서 본문은 동일한 의미로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의 소득과 구스가 무역한 것과 스바의 장대한 남자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애굽의 모든 물질과 건장한 사람들까지 너의 소유물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애굽인들이 돌아오되, ‘사슬에 매여 건너와서 네게 굴복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속하기 위하여 애굽을 페르시아의 속량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애굽을 비롯한 전 세계를 정복하였을 때, 그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애굽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많은 물질을 보내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상징적으로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속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 자신의 때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로, 예언적인 말씀으로 미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B. C. 536년에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는 하셨는데 고레스 왕을 통하여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어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으로 나타나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이방인들도 하나님밖에 신이 없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전 8세기에 선지자가 예언한 이 말씀은, 신약시대에 와서 성취되었다고 봅니다. 신약시대에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참 신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으로 이 예언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같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어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교회의 일원이 됨으로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이스라엘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겠지만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자는 영원한 수욕 중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16-17절의 말씀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너희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이것도 미래적인 사건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 여호와를 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부끄러움을 받지 아니하고 욕을 받지 않을 것이지만,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자들은 부끄러움과 수욕 중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욕 중에 들어간다는 말은, 영원한 수치에 빠진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그렇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는자를 비교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각 구절을 시상으로 따져서 말하면, 14절은 미래를 말하고 15절은 현재를 말하고, 16-17절은 또다시 미래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바벨론 포로라는 현재를 가운데 두고, 앞뒤로 그 이후 미래적인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는, 우리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회복되고 성전도 짓고 가나안 땅에서 잘 살 수 있겠지만, 현재는 고난과 고통 중에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고통, 아픔, 눈물, 억압, 죽음이 있는 이 바벨론 포로 생활 중에는, 하나님이 스스로 숨어 계시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대를 살아갈 때에도, 하나님이 숨어만 계신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할 때, 사업을 하는데 사방팔방이 다 막혀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몸은 병들어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다 죽어갈 때, 갑자기 너무나 큰 사고와 사건을 만났을 때, 아이들이 삐뚤게 나가거나, 부모에게 심하게 반항하고 집을 뛰쳐나갔을 때, 하나님이 짠하고 나타나셔서 도와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좋겠건만, 그때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숨어만 계시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계시기는 계시는데 숨어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어계시면서 우리의 일거일동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같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제가 어떻게 하나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저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의지하고 신뢰하는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 상황 중에, 내 말에 순종을 하는지, 아니면 세상 방법을 따르는지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도와주심이 필요할 때 도와주십니다. 인도가 필요할 때 인도해 주십니다. 해결이 필요할 때 해결해 주십니다. 회복이 필요할 때 회복시켜 주시고, 힘이 필요할 때 힘을 주시고, 길이 필요할 때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예)옛날에 우리가 이런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 애들의 손을 잡고 가다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하나 사 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먹는데 정신이 팔려서 아빠도 안중에 없습니다. 그럴 때 아빠가 전봇대 뒤에 숨거나 담벼락 뒤에 숨어 있어 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가 한참 두리번거리다가 아빠가 없으면 불안 해 하면서 울기 시작합니다. 어떤 아빠는, 아이가 어떻게 하는지 보기 위하여 한참 동안 지켜보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아빠는 짠하고 아이 앞에 나타나서 우는 아이를 달래고 품에 안아 줍니다. 그러면 금방 아이는 안정을 되찾고, 눈물을 그치고, 또다시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합니다. 이때 아이 눈에는 아빠가 사라진 것처럼, 안 계신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사실은 아빠는 숨어 있었습니다. 이 아이 곁을 영원히 떠난 게 아닙니다. 적당한 때에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아이를 도와 줄 것입니다. 그를 품에 안아 주셔서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에 사방이 꽉 막혔습니까? 살길이 막막합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까? 나 혼자인 것 같습니까? 이대로 좌초하고 말 것 같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모세가 죽고, 뒤를 이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제 이 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야 하고, 여리고를 점령해야 하며, 그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5개 부족과 싸워서 그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도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산적해 있던 앞일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모르며 두려워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내가 함께 해 주시겠다고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냥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모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여호수아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주님이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 세상 끝날까지니까 아직 종말이 안 됐잖아요,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욥은 동방의 의인이었고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자기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10명의 자식은 한 날 다 죽었습니다. 자기 몸에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긁는 신세가 되었고 개들이 와서 진물을 핥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욥을 보고 부인이 욕합니다. 그래도 그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자기 주위환경이 180도 바뀌었어도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찾아와서 책망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을 굳건히 지킵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을 귀로만 들었는데, 이제는 내가 내 눈으로 목도하고 내 손으로 만진바가 되었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도와주심으로 예전의 부보다 두 배, 예전의 가족보다 두 배나 더 얻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숨어 계시다가 나타나셔서 욥을 도와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세요. 고통, 아픔, 슬픔, 억울함이 있어도 그래도 위에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세요. 약속을 믿으세요, 믿음은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건히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약속을 믿고 인내하세요, 그리고 주님을 붙들고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공급해 주십니다.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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