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사 38:9-14)
이정현 목사
20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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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사용된 ‘앙망’이라는 단어는 참 좋은 말입니다. 원문의 뜻은, “하나님 안에 소망을 두고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자’(who hope in the Lord)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공동번역이 제일 쉽게 잘 번역이 된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런 자에게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가 날개 치며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듯 해 주십니다. 뛰어가도 곤비치 않습니다. 넘어지고 자빠져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다시 목표를 향해 뛰어가게 됩니다.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강하게 해 주십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에, 앙망이라는 말은 우리의 모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앙망이라는 단어는 ‘배고픈 짐승들이 먹이를 찾기 위해 갈망한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모하다는 말은 무엇인가 찾기 위해 간절히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모함을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사모함은 맑은 우물을 퍼 올리는 두레박과 같다.” 아무리 맑고 깨끗한 물이 있어도 그것을 먹으려면, 그것을 퍼 올릴 수 있는 두레박이 있어야 합니다. 사모함은 그 두레박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모함의 두레박이 있을 때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퍼 올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앙망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가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사모함이라는 단어가 있고, 또한 갈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앙망이라는 단어가 11회 나오고, 사모라는 단어가 59회 나타나며, 갈망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그래서 앙망과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는 사모함과 갈망이라는 단어를 다 합해보니까 73회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앙망과 갈망이라는 단어는 구약에서만 나오고, 사모라는 말은 신구약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앙망이라는 말은 주로 이사야가 사용하고 있고, 사모라는 말은 다윗이 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와 다윗 왕이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앙망하고 간절히 사모했던 것 같습니다.
유다 제 대 왕이었던 히스기야...병들어 죽게 되었다. 왕....모든 치료...의사...민간요법.../ 이사야 선지자도 와서 죽고 살지 못하니 집을 처리하라./ 그런 상황 속에서 왕이 하나님을 앙망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정도 사모하는지 보십시오....
그러면 첫째로,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우선순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고, 또한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라고 봅니다. 시편 73편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25)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앞뒤가 동일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하늘과 땅에서 내가 사모할 대상은 주님밖에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다.”(26:9)고 말합니다. 선지자는 시끄러운 낮보다 조용한 밤에,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사모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밤에 내가 여호와를 사모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을 사모함과 동시에, 그분의 말씀을 사모한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규례를 사모한다, 주의 법도를 사모한다, 말씀을 사모한다, 계명을 사모한다, 주의 법을 사모한다.’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119:2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나 주의 규례를 사모하면, 마음이 상한다고 표현을 했겠습니까? 또 다른 시편에는,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119:123)라고 했고, 또한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119:131)라고 했습니다. 너무 갈급히 찾은 나머지 내가 피곤하다고 했으며, 입을 열고 헐떡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헐떡이며 찾는, 갈망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모함이 있으면-마음과 태도가 달라짐....찬송, 기도, 헌금, 말씀 듣는 게..../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 사모하는 사람...마음과 태도 모습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둘째, 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잠언의 말씀입니다.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를 사귀는 자는 재물을 없이 하느니라.”(잠29:3) 성경의 지혜는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는 명철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잔꾀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고, 잘 섬기는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너희에게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 이런 지혜가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사모하여 그 지혜로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겨야 합니다. 지혜롭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에 거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혜롭지 못하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자녀들은 더 지혜로워서 사리를 잘 분별하고, 악과 선을 잘 구분하고, 진리와 비 진리를 잘 분별하고, 참과 거짓을 잘 구분하고,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잘 구분하여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마음의 정결을 사모해야 합니다.
잠언 22장 11절의 말씀에 보니까,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한다는 것은 마음의 거룩을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옷이 깨끗하거나 몸이 깨끗하거나 외모가 깨끗한 것도 중요하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청결입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마음이 유리알처럼 참 깨끗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음이 지저분하고 더러우면, 그 마음에 있는 것이 입과 행동을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악한 말이 나오고 음란한 말이 나오고, 세속적인 말이 나오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나오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말이 나오고, 헐 뜯는 말이 나오고, 불평 불만하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더러운 마음을 가진 자로부터 더러운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외부에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에 있는 것이,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고 행동으로 나오는 것이 너희를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마음의 표출인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를 알려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마음과 행동이 다른 이중적인 생활, 또는 형식적인 생활도 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마음에서 더러운 것을 배출하는 자가 아니라, 깨끗한 마음에서 아름다운 것을 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감독의 직분을 말하면서,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면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딤전3:1) 여기서 말하는 선한 일은 무엇일까요? 성도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주님처럼 섬기는 일을 말합니다. 결국 이것이 감독의 직분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감독이 하는 일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달리말해 감독의 직분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감독은 목사, 장로, 집사를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성도들을 세우고 돌보는 모든 일을 말합니다. 성도들을 세워주고 돌보는 일이 선한 일이며, 그것을 사모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혹 교사의 일을 맡았다면 교사가 해야 하는 학생 돌봄이의 일을 사모하시기 바라고, 구역 인도자와 구역장을 맡았다면 구역원들을 섬기고 세워가는 일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소그룹의 리더라면 선한 일을 사모하시고, 자식들을 가르쳐야 하는 가정의 부모라면 그들을 세워주는 선한 일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리교회의 중직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공통된 사명이 여러 모습으로 성도들을 돌보며 섬기는 일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임직을 받은 사람은 이 직분을 사모하는 자여야 합니다. 억지로 받은 것도 아니고, 명예심 때문에 받은 것도 아니고, 자기의 욕심 때문에 받은 것이 아니라, 오로지 교회를 섬기고 헌신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받은 것입니다. 이 선한 일을 계속하여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에 여러 가지 은사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여기에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고치는 것, 능력 행함, 예언함, 영분별함, 각종 방언 말함, 방언 통역 등 9가지 은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이 모든 은사는 성령이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여러 가지 은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12:6-8)
여기에서는 은사의 종류를 7가지, 즉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와 중복되는 은사도 있지만, 그냥 합해서 말하면, 16가지의 은사가 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은사들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런 은사들을 이야기하면서,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하셨고, 또한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큰 은사를 사모하면 하나님이 제일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은사로 충만해서, 그 은사를 잘 활용함으로,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섯째,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재림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4:8) 바울은 의의 면류관 쓸 것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6)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도,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진다.”(벧후3:12)고 하였습니다.
요사이 재림을 사모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잘 살고 세상살이가 재미있으니까, 아무리 천국이 좋아도 이 세상에 더 살고 싶어 한답니다.
그러나 옛날 손양원 목사님은 주님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이런 노래를 지어 불렀답니다.
1절/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3절/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그때는 한국교회가 다 같이 이 노래를 부르며 주님오시기를 고대했는데, 지금은 살기가 너무 좋아져서, 이 세상 쾌락을 더 누리고 싶어 해서, 주님 오시는 것을 고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곱째, 본문의 히스기야 왕은 병 고침을 사모했다고 보여집니다.
사38: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38:10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38: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38:12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38:13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38: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소망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우울증, 무기력증, 포기증, 좌절증에 빠진 사람이나, 가정의 경제적인 문제와 인간관계와 건강 때문에 지치고 쓰러져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혜를 사모하시고, 마음의 정결을 갈망하시고, 선한 일을 사모하시고,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시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병고침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2. 어느 정도 사모해야 하나? 무엇과 같이 사모해야 하나?
1)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사모하듯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갓난아이들이 배고프면 얼마나 애절하게 어머니의 젖을 찾습니까? 얼굴에 핏줄을 세우며 울고 조릅니다. 엄마의 젖을 그처럼 바라는 것입니다.
2)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목마른 사슴이, 포수가 그 샘가에서 엽총을 겨누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워낙 목이 마르니까 그 물가로 나오듯이, 이런 갈급함이 시편 기자에게 있다는 고백입니다.
3)메마른 땅이 단비를 기다리듯
욥29:23/“그들이 나 바라기를 비같이 하였으며 입을 벌리기를 늦은 비 기다리듯 하였으므로.” 몇 개월 몇 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땅들이 타 들어갑니다. 그런 땅들이 혹은 식물들이 입을 헐떡이며 단비를 기다리듯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얘기입니다.
4)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시130:6/“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휴전선 근처에서 군인들이 밤새도록 보초를 서는데, 오후 5시 정도에 산에 올라가면, 밤을 홀딱 새고 아침에 내려옵니다. 그 파수꾼들이 아침을 얼마나 기다리는지, 밤새도록 경계근무를 서 본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그것처럼 신자들이 주님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성경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사모하고 또 갈망하면 됩니다.
예)어마 제비가 먹이를 물고 와서 새끼에게 줄 때...입을 제일 크게 벌리고 덤벼 드는 놈에게...
3. 그러면 앙망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만족, 여호와의 좋은 것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세상적, 정욕적인 것으로 만족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좋은 것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과 땅의 기름진 것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마치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생수처럼 우리를 만족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사모하는 영혼에게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올라가게 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새 힘을 주십니다. 이 새 힘은 피곤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하고, 뿐만 아니라 낙심하고 좌절하여 주저앉아있는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새 힘만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어려운 환경은 문제가 안 됩니다. 능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 힘을 얻으면 지치지 않습니다. 낙담하지 않습니다. 자빠지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달음박질 하여도 고단치 않습니다.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독수리처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독수리는 새 중의 왕입니다. 독수리가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는데, 몇 m나 오를 것 같습니까? 최고로 높이 오르면 4000m까지 오를 수 있답니다. 백두산보다 더 높고, 구름보다 더 높은 것입니다. 독수리는 장애물이 있어도, 폭풍우와 구름을 뚫고 높이높이 솟아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히스기야처럼 그 눈이 쇠하도록 하나님의 은혜와 병고침을 사모하였을 때, 드디어 병 나음을 받고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눈의 눈물을 보았다고 하셨고, 그 병을 낫게 하셨으며, 15년 동안을 더 살게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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