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눅2:21-39)
이정현 목사
201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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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아이가 태어났을 때 행하는, 세 가지 의식을 잘 알아야 합니다.
먼저는 할례(21)입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레12:3). 이것은 모세의 율법이었고, 또한 유대인들의 관습이기도 합니다. 그때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모가 지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천사가 지시해준 이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이때부터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의 아이가 태어나면, 두 번째 행하는 의식이 장자의 헌아식입니다./ 둘째 아들이나 여자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상관없고, 그 집안의 장자가 태어났을 때에는, 반드시 난지 40일 만에 아이를 하나님께 바치는 의식을 행하여야 합니다. 주의 율법에 ‘초태생은 하나님께 드리라.’(출13:2, 11-16)는 규정에 따라, 요셉의 집에 처음으로 태어난 남자 아이가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결례의 날(22)입니다./ 이 결례의 날은 아이를 낳음으로 부정하게 된 산모들이, 정결의식을 행하는 날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어머니는 남자 아이를 낳으면 40일, 여자 아이를 낳으면 80일 동안 부정하게 되어, 외출을 하거나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기간이 지나고 성전에서 정결의식을 그쳐야, 부정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주로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제물로는 번제로 어린 양 한 마리, 그리고 속죄제로 비둘기 한 마리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가난해서 비둘기 한 쌍, 또는 ‘어린 반구’(집 비둘기 새끼) 둘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부모님들은 이런 의식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가 태어나면 거기에 걸맞게 이 세 가지 의식을 치루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 22-24절의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에, 지금 예수님의 부모님은, 초태생 바치는 의식과 어머니의 정결의식을, 같이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헌아식도 하고, 마리아의 정결의식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생 8일 만의 할례는, 근방의 제사장을 통하여 행하였던 것 같고, 그리고 장남의 헌아식과 마리아의 정결의식은, 그 날짜가 출생이후 40일로 같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같이 행하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배경적인 말씀을 따라서, 본문이 진행됩니다.
이런 목적으로 예수님의 가족들이, 성전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시므온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경은, 몇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의롭다는 말은 옳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율법을 충실히 준행했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고, 경건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말씀을 따라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또한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중요한 말인데요, 이는 ‘메시야’를 기술하는 또 다른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의 구속’이라는 말로도 사용이 되고, ‘메시야를 대망하는 사람’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됩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위로 즉, 메시야를 대망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들은 매일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합니다. “나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게 하소서.” 그 가운데 본문의 시므온은, 그 위로를 더 간절히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과거 애굽으로부터 억압과 착취를 당하였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애굽 뿐만아니라 앗수르, 바벨론, 헬라로부터도 큰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제 로마까지 자기네 나라를 점령하고 압박과 괴로움과 아픔을 더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야가 온다. 그리스도가 오신다. 그가 오시면 너희가 자유와 해방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를 통한 구원과 해방과 회복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은 하매나 그 메시야가 오실 것인지를, 크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천년 동안 외세의 압박으로, 고통가운데 지냈던 이스라엘 민족의 메시아 대망사상은, 그 민족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수천년 동안, 대단한 끈기와 열정과 간절한 사모함으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과 억압과 아픔과 슬픔 중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메시야를 위로자로 기다렸던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 중의 하나가, 시므온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므온은, 성령이 그 위에 계셨으며,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시므온의 신앙생활과 성령을, 몇 번씩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시므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의도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지시와 감동 중에 생활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한 영적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시므온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경건한 사람이었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이었고, 또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이 네 가지 사항 중에, 세 가지는 그 사람의 현재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 가지 즉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말은, 앞으로의 일을 사모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 즉,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믿음으로 사모하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받아 성전에 있는데, 아기 예수가 부모의 품에 안기어 성전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거기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27절 말씀에 보면, 절묘하게 두 분이 서로 만나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가 있었을 때, 아기 예수님을 그 부모들이 데리고 헌아식과 정결의식을 행하기 위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즉시로 저 아기가 곧 메시야임을 알아봅니다.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이 찬송을 우리는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 즉, 시므온의 찬송이라고 부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은 이미, ‘그리스도를 보지 아니하고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26). 이제 그 지시대로 내가 메시야를 목도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종을 평안히 죽게 하십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 질 것인데 그 구원을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실 분이기도 하지만, 구원 그 자체로 보아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구원을 현재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구원은 만민을 위해 예비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메시야는 만민을 위해 예비된 구원이시고, 또한 이방인들의 빛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원은 이스라엘에게서 났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에게 널리널리 전파되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기를, 이제야 기다리던 메시야 구원자를 보았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는 말과, 이분은 이방의 빛이시며, 아울러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다시 한 번 더 말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아기가 자라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부모들이 놀라니까,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 어머니 마리아에게 또 다른 예언을 하십니다. 34-3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이는 두 가지 말씀인데 하나는, 예수님에 대한 예언으로, 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패함과 흥함의 표적으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흥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망함과 흥함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기다리던 메시야로 믿고 따르면 복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패망하게 된다는 분명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으로 인하여 즉, 그리스도가 패함과 흥함의 표적으로 인하여, 많은 비방과 고난을 받게 될 것인데, 그것 때문에 결국 마리아는 칼이 자기 마음을 찌르듯 고통과 아픔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아들 그리스도가 당하는 고통과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Mater Dolorosa’ 즉, ‘슬픔의 어머니’라는 예언의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스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받아 메시야를 만나고, 그 아기와 그 어머니에 대하여,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분명히 선언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구원자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과, 이분은 앞으로 이방의 빛이 되며, 패함과 흥함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하였고, 아울러 아들로 인하여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큰 고통을 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36절 이하에서는 메시야를 기다리던 또 다른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분도 역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은 결혼해서 7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다가 남편이 죽어서 과부가 되었습니다.
37절에 ‘과부가 되고 84세가 되었더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84세까지 과부로 있었다’는 말입니다(RSV-a widow till she was eighty four). 그러나 다른 하나는, ‘과부 된지 84년이 되었다’(AV-was a widow of about four-score and four years)는 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견해에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자를 취하여, 84세까지 과부로 있었다는 해석을 따름으로, 안나의 현제 나이가 늙었음과, 결코 재혼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과부가 된 이후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안나에 대한 이 말씀을 어떤 신학자는 ‘그녀는 장소적으로 시간적으로 예배의식적으로 철저히 헌신한 사람이었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노 여선지자는 오랫동안(수십년 동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녀는 머물 곳이 없어서, 성전에서 잠을 잤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배하며 기도하며 금식하기 위하여, 그곳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도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속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즉 메시야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이 여인도 동일하게, 아기 메시야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 이 여인도 성령의 지시로 이 아기가 메시야임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무엇을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시므온처럼 이 아이가 바로, 우리가 고대하고 바라던 구약의 그 메시야 임을 증언했을 것입니다. 선지자였기 때문에, 구약에 예언된 그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가, 바로 여기 이 아기임을 증거했을 것으로 봅니다.
39절에,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는 말씀으로 본문이 끝이 납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율법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따라서 모든 의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갈릴리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예수님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은 메시야를 기다리던 두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동일하게 나이가 많았고 또한 경건했으며 성령의 지시를 받으며 살았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메시야를 대망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나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그 메시야를 세상에 선포하고, 사람들에게 증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의 기쁨과 감격을 잘 나타내 보여주었고, 또한 그들이 이스라엘의 위로를 만났을 때에, 해야 할 사명도 잘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분명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를 대망하는데, 다시 오실 심판주 메시야를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림의 주, 구원의 주를 대망하였다면, 오늘 우리는 이제 재림의 주, 심판의 주를 대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살기가 너무 좋아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서, 세상에 도취도어, 주님의 재림은 관심도 두지 않고 살아가는 크리스챤도 있습니다.
예)외국에서 큰 독수리를 잡는 방법에 대하여, TV에 방연 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원주민들이, 저 높이 창공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를, 좀처럼 잡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사람이 묘안을 냈습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독수리가 좋아하는 고기들을, 잔뜩 갖다 놓습니다. 그랬더니 독수리들이 몰려와서, 고기를 실컨 먹습니다. 얼마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먹는 것에 완전 푹 빠져서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고기를 갖다 놓은 사람들이 나와서, 독수리에게 다가가는데, 사람이 와도 독수리들이 도망가거나 날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장갑을 끼고 손으로, 큰 독수리들을 쉽게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취하여 빠져있으면, 결국은 이런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교회 성도들은, 정신을 차려서 세상에 빠지지 말고, 초대교회 성도들이 ‘마라나타’-‘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했듯이, 주님을 대망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재림주를 기다리면서, 오늘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처럼, 의롭게, 경건하게, 성령의 지시와 감동을 받아서, 항상 주 안에서, 기도함으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재림 주를 기다리는 마음과 신앙자세가,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흰 구름과 흰 말을 타시고,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시고,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을 만날 때에, 감사와 찬송을 올리며, 영광 중에 주를 뵈옵게 되는 것입니다. 이 대열에서 소망교회 성도들은, 한 사람도 예외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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