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매오의 절규에 응답하신 주님(막10:46-52)
이정현 목사
201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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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선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지난번 시간에 기도응답의 네 가지 형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즉시 응답해주시는 '즉답'의 형태가 있고 오랜 후에 응답해 주시는' 체답'의 형태가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변답'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No라고 응답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네 가지 형태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느냐? 내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열심히 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듣고 응답해 주시겠다고 성경을 통해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여주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에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란 날에 부르짖으면 그 사람을 건져 주시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땅에서 두세 사람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늘에 아버지께서 들어 주시리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응답해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다른 것 붙들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소경이며 거지인 바디매오가 나옵니다. 근데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 사역을 마치시고 나가실 때 바디매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앞에 간절히 외침으로서 소경이 눈을 뜨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이후부터 모든 것을 청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바디매오를 본문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 그 기도에는 독특한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는, 바디매오가 부르짖어 간청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속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소리를 높여서 부르짖었습니다. 어쩌면 많은 군중들 속에 있었기 때문에 소리 내어 외치지 않으면 예수님이 듣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절규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작은 소리로 기도하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라는 여인입니다. 자기에게 자식이 없고 후처의 괴롭힘을 받았을 때 한나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속으로 응얼거리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도 소리 내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간절함을 통해 1년 후에 한나는 사무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속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조용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바디매오는 속으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소리를 내어 예수님께 외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위 사람들이 말립니다. 그리고 꾸짖습니다. 그럼에도 더 크게 소리 내어 외칩니다. 여러분, 우리가 혹시 상황이 그렇게 되면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습니까? 때로는 조용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기도하는 이는 부르짖는 이를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조용히 기도하는 이는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의 처지와 상황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도 속으로 기도하는 이를 비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용히 기도할 때도 있고 바디매오처럼 절규하며 간청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들, 중요한 것은 내 마음과 내 뜻과 내 목표를 하나님에게 고정시켜야 한다 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이 사람이 방해해도 불구하고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48절 말씀에 보면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해라. 조용하라.’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바디매오는 하나님 앞에, 예수님 앞에 절규하면서 기도하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조용하라는 겁니다. 꾸짖었습니다. ‘잠잠해라. 저 어르신께서 지금 이 여리고를 빠져나가는데, 너, 왜 이렇게 큰소리 지르느냐?’
‘잠잠해라. 조용해라.’ 많은 사람들이 이 바디매오의 절규를 조용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 바디매오는 부르짖음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속에 한 섞인 기도의 제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의 제목이 눈뜨는 것 아닙니까? 보는 것 아닙니까? 자기 마음속에 한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속에 간절한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는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 바디매오는 다른 사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꾸짖는데도 불구하고, 잠잠해라, 조용하라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부르짖음을 멈출 수가 없는 겁니다. 계속해서 부르짖는 겁니다. 더 큰소리로 부르짖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에 여러 가지 방해를 받을 수가 있을 줄 압니다. 육신의 피곤함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할 수 있습니다. 바쁜 세상살이가 우리의 기도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탄의 공격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할 수도 있고요, “야, 그만큼 기도했으면 돼.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들어 주실 거야. 그만해.” 주위사람들의 이런 핀잔이 우리의 기도를 방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바디매오가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더 소리를 높여 간절히 주님에게 기도하므로 응답을 받았듯이,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바디매오는 소원을 분명하게 주님께 말했습니다. 51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절규에 응답을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겉옷을 벗어 던지고 나서 바디매오가 주님께로 갔습니다. 주님에게 갔을 때, 주님이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 말은요, 다른 말로 말하면‘내 소원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절규하는 바디매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이런 노래 있잖아요. 저는 가만히 생각할 때요, 소녀시대가 썼던 그 ‘내 소원을 말해봐’, 예수님께서 쓰셨던 말씀이잖아요.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네 소원이 무엇이냐?’ 이 말씀을 하셨는데, 소녀시대가 그 말씀으로 노래를 만들어 쓰고 예수님에게 로열티를 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자료를 조사해보니까 2010년도에 박범수라는 영화감독이 영화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제목이 뭔 줄 아세요? ‘내 소원을 말해봐’였어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성인영화인데, 그 박범수 감독도 이걸 만들면서 예수님께 로열티를 드렸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주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이 바디매오가 정확하게 자기의 간절한 소원을 얘기했습니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게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직장을 갖고 싶습니다.” 이게 소원이 아니었어요. “돈을 좀 많이 벌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사업체를 좀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바디매오에게 유일했던 그 소원은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으로서 참 비참하게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는데 이 삶을 청산하고 싶습니다. 당신에 의해서 내 눈이 뜨여지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능력에 의해서 내 눈이 보기를 원합니다. 내 소원은 보는 겁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길 원하느냐?” 물으셨을 때 바디매오는 분명하게 자기의 한 가지 소원, 한 섞인 소원을 말하는데,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랬을 때, 주님께서 그 소원을 들으시고 즉시 그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오셔서 “네 소원이 뭐냐?”하고 물으시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가운데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그러셨습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저와 여러분들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소원을 두고 그것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오셔서 “네 소원이 뭐냐?”하고 물으시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소원을 말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우리 모든 가족들이 모두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는 것이 내 간절한 소원입니다. 유일한 소원입니다. 내 자식들이 비뚤은 길로 가지 아니하고 세상에 휩싸이지 아니하고 이 자식들이 정말 경건한 아이들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잘 쓰임 받는 그런 우리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소원입니까? 여러분들의 부모들이 건강한 게 여러분들의 소원입니까? 우리 구역의 부흥 발전이 소원입니까? 올해 20명을 전도하는 것이 소원입니까? 우리 가정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사는 것, 행복하게 사는 것, 이것이 소원입니까? 아니면 경제적인 문제에서 해결함을 받는 것이 소원입니까? 나의 이 몸이 병 고침을 받는 것이 소원입니까? 주님께서 소원을 물으실 때 나의 이 간절한 소원 한 가지, 이것을 바디매오는 분명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랬을 때 네 믿음대로 되라는 주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구했습니다. 52절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 나올 때에 바디매오는 믿음으로 달려 나왔다는 것이에요.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나를 불쌍하게 여기시면 나를 반드시 낫게 하실 수 있는 주님으로 믿었다는 거예요. 그 믿음으로 바디매오는 주님 앞에 부르짖었고 주님께 달려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의심하는 사람은 두 마음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두 마음을 가진 자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기도 응답을 받을 수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바람이 불면 이렇게 물결이 휩쓸리고, 저렇게 바람이 불면 저렇게 물결이 흘러가는 것과 같은 사람은 마음의 정함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기도 응답을 받을 수가 없다고 야고보서 1장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심하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바디매오처럼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이런 간절한 믿음으로 주님 앞에 찾아 나올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 나오게 되었을 때 이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어 즉시로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즉시로 응답을 받아서 주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요 놀라운 신분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신분변화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 이후로부터 기도에 대한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요 그때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권리를 못 가집니다. 이런 특권을 못 누립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뭐냐?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해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겁니다. 이 특권을 받았습니다. 받았기 때문에 바디매오처럼요, 소리 질러 기도하시고, 방해에도 불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고요, 우리의 소원을 분명하게 말하고, 믿음으로 우리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될 때에 주님으로부터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귀신들린 자기 딸을 낫게 해달라고 어머니가 자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찾아 나온 경우가 있습니다. 이 딸은요, 가끔가다가 쓰러집니다. 그리고 거품을 흘립니다. 때로는 불속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물속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자기 자의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 의해서요. 물속에도 들어가기도 하고 불속에도 뛰어들기도 하는 귀신들린 자기 딸이 있습니다. 얼마나 그 부모가 안타깝겠습니까? 그 부모의 가슴이 찢어질 듯 그렇게 아프지 않겠습니까? 자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찾아 나온 것입니다. “예수여 내 딸이 이렇게 귀신들려 죽어가고 있는데 내 딸을 좀 살려주십시오.” 자기의 딸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 주님 앞에 나와 간청했을 때 주님이 의외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 이렇게 찾아 나온 여인을 한마디로 말해서 묵살하는 겁니다. 이 여인을 개 취급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니까 개 취급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줄 떡을 취하여서 개들에게 던질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주님께서 참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요, 귀신들린 자기 딸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나와서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기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옳습니다. 그렇지만은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부스러기 은혜라도 있으면 우리에게 주십시오. 당신의 자녀들에게 줄 떡을 다 주십시오. 그렇지만은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은혜라도 있으면 그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 딸에게 좀 베풀어 주십시오.” 이런 심정으로 이 여인이 간청했을 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셨습니다. 그 즉시로 그 딸이 귀신에게 놓임을 받고 완전히 건강하게 되는 모습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여러분, 잘 들어 보세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있느냐 그 모든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나에게 오라 그럽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말하지 않는 거예요. 주님께서 네 인생에 무거운 짐 진 것이 있느냐? 딸이 귀신들려 가지고 그렇게 괴로움과 고통과 아픔과 슬픔중인 그런 사람이 있느냐? 인생의 무거운 짐 진 자 아닙니까? 죄로 인하여서 인생의 무거운 짐 진 자가 있느냐?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무거운 짐 진 자가 있느냐 나에게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으로서 자기로써는 도저히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죽음의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의사들도 고칠 수 없는 그런 병자가 있습니까? 그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생에 짐 진 자들입니다. 그런 무거운 짐, 너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만은, 그런 힘들고 무거운 짐 진 자는 주님 앞에 나오라는 겁니다. 나올 때요, 절대로 우리 주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에게 찾아 나오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이 어머니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비참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 인생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찾아 나오기만 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홀로 뚜벅뚜벅 걸어가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조금 걸어가다가 지칩니다. 쓰러집니다. 넘어집니다. 그 가운데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앞을 향해 걸어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어떤 무거운 짐을 지었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바디매오처럼 주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강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간구에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실 때마다 바디매오를 통해서 기도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르짖는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방해에도 불구하고 더 간청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소원을 분명하게 아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에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달려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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