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복음서는 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일곱 마디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각 복음서마다 동일하게 하나부터 7곱 가지를 순서대로 다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4복음서 연구를 통하여,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시간적으로 하셨을, 7곱 마디 말씀을 순서대로 나열해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7곱 마디 말씀을 하셨다고 해서 우리는 이것을 ‘가상7언’이라고 부릅니다.
가상칠언 중 오늘은, 처음 세 가지 말씀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을 통해서는 두 가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요한복음 본문을 통하여 살펴봄으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 갈보리 언덕을 본문에서는 ‘해골’이라는 곳이라고 했는데, 갈보리라는 단어의 뜻이 해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사람들은 갈보리 또는 해골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 성 외곽에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셨는데, 행악자 두 명도 예수님 좌우편에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누가는 분명 여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양손 양발에 예수님은 못을 받으시고, 고통과 슬픔 중에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헬라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은 가장 흉악한 죄인들, 즉 테러리스트(테러범), 잔인한 살인자들, 그리고 전쟁 포로들을 이 십자가로 처형을 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자기가 잡은 전쟁 포로들을, 한거번에 2000명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이 십자가에 매 다는 것인데, 예수님이 지금 다른 행악자와 함께, 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는 주님이 이런 수모와 고통 가운데 계시는데, 십자가 밑에서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군인들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밑에서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 당시의 사형수의 값진 옷이나 물건들은 집행자들의 몫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주니의 옷을 나눠가지기 위하여 제비 뽑고 있는 것인데, 이것도 구약에 이미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잘 죽었다고 하는 무리들이었다고 봅니다.
관원들은/ 조롱하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군병들은/ 희롱하며 ‘신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조롱하고 희롱하고, 구경삼아 나와 있는 그 불쌍한 인생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사람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당연히 돌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야 마땅한 여자입니다....그러나 주님이,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려 쳐라...돌을 들고 있는 자들이 다 물러 갔습니다. ,,,주님이 그 여인에게,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여자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하지 말라.’...주님이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고,.,육신의 죽음에서 구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그 여인은 돌에 맞아 비참하게 길바닥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생명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이고, 손가락질하며 조롱하는 자들이고, 원수들입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한 것입니다. 저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아울러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자신의 말씀대로, 주님은 원수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주님의 이 기도를 본 받아서 동일하게 기도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59-60)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고, 이어서 자기를 돌로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을 생각하시고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염려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그 위에서 남을 염려하셨습니다. 그것도 모든 인류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죄 문제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만, 주님을 조롱하고 멸시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힌 강도들까지도 메시야를 욕하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고 비방하며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으며,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로 보응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강도는, 자기들의 마땅한 징벌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분명히 말한 것입니다. 이 강도는 평생 동안 죄만 짓다가 산 것 같은데, 그리스도에 대한 이런 정보를, 어디에서 듣고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로운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강도가 주님께 시선을 돌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은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지만, 당신의 나라가 올 때에 나를 생각해 주셔서, 나도 그곳에서 살게 해 주소서’라는 간청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간청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이적을 체험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지 못하고 다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 강도는 현제를 지나 미래의 천국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제자들은 미래의 천국을 소망하지 못했지만, 이 사람은, 생명을 다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 미래의 천국을 소망한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두 번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죄수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오늘, 지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살면서 법을 어기고, 악한 생활을 해 오다가, 결국 사형장에서 그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죽음 직전에 낙원을 허락받았습니다. 이 낙원은 구약에서는 에덴동산을 의미하고, 페르시아어로는 정원을 말하므로, 분명 아름다운 기쁨과 안식의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낙원을 천국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죽을 마지막 순간에 회개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 앞에 나오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이 강도는 흉악한 사람이고 사형집행을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주님은 그 강도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원하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내 모든 죄를 덮고도 남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입니다.
-주님은 지상에서 평생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가만히 보면 결국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하나님 나라 전파이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들이는 것입니다.
이 강도가...‘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십자가 위에서 산 이 강도는...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보장 받게 되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19:25-27)
가상 칠언 중 세 번째 말씀이 요한복음 19장 25-27절에 나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곧 그분께서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곧 듣게 될 것입니다.
이때 십자가 밑에서, 하염없이 울며 비통한 상태로, 가슴을 쥐어 떧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가 계셨고, 그 옆에는 주의 제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겪고 있는 모진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나아 준 사람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자기로 인하여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얼마나 큰 아픔과 고통과 비통함 속에 처해 있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남편이었던 요셉은 이미 죽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다른 아들들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련한 이 어머니를 생각하며 주님은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제자에게 ‘요한아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짧은 말씀은 명령이나 주장이 아니라, 하나의 유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주석학자 스타우퍼라는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유언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심지어 십자가 상에서도 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지금 이 권리를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옛 유대 가족법의 공식적인 형식에 따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의 보호아래 두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요한이,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새로운 가족인 교회를 낳으셨던 것입니다. 가족 주례를 서셨습니다. 혈육적 가족이 아닌자들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아닌 여인을 어머니로 선언하시고, 아들이 아닌 사람을 아들로 선포하셨습니다. 새 가족 관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주님은 평소에도 새로운 가족 개념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열심히 사역을 하고 계셨을 때, 어머니와 그의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이유는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가서 지금 밖에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고 하니까, 주님께서 그때,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이냐?’ 그의 제자들을 가리키며, ‘누구든지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새로운 개념의 가족관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내 가족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도 새로운 사람이 등록을 하면 ‘새가족’이라고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가족들의 모임입니다. 육신의 혈육으로 맺은 가족관계보다, 더 돈독하고 영원한 관계가, 예수님의 피로 맺은 가족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육신적인 형제자매들도 중요하지만, 예수를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한 공동체 가족 여러분들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관계는 죽으면 끝이 나지만, 보혈로 맺은 가족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십자가는 고통의 형틀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운 극형으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위에서 6시간 동안, 피를 흘리며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7곱 마디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 세 마디 말씀을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먼저는, 십자가 아래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고 멸시하는 저 사람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다음은, 한 강도가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심으로 그에게 천국을 허락하셨습니다. 마지막 까지 준비된 영혼을 구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번째는,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 마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신 것은 곧 우리의 죄를 위하여, 믿는 자들을 천국에 들여보내시기 위하여, 그래서 한 가족으로 영생을 누리게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어,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이 은혜에 항상 감사하고, 찬송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 구속의 은총을 기억하며 늘 예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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