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부터 해방과 자유인가 (롬 6:20-23)
이정현 목사
20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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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인가?
롬6:20-23
사전/
'해방'-"타자의 권력, 예속, 억압, 종속, 의존, 소외 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 또는 그 상태를 가리킨다."
'자유'-"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이렇게 해방과 자유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해방과 자유에는 분명한 두 가지 요소가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한 가지는 '무엇엔가 억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의 요소는 이해가 되는데, 그러나 후자 즉,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는 말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것을 내가 좋아 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유를 이해하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운전면허증을 따면, 도로를 주행하며 운전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교통법규를 위반하며, 도로를 주행할 수 있는 자유는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운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진리 안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는 자유를 가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었지만, 이 바울도 바나바와 함께, 말씀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않았다고 얘기합니다.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렸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태두리를 벗어나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방종은 죄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유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대체적으로 희년제도와 안식년 제도와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7년이 되거나, 아니면 7년씩 7번이 지난 다음해, 즉 50년이 되었을 때, 노예들, 집에서 일하는 모든 종들에게 자유를 주면, 그들은 각각 집과 자기 소유지로 돌아갑니다. 종들은 이제 더 이상, 주인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남의 종으로 살지는 않았다할지라도, 남으로부터 압제와 억압을 받으며 살 수도 있는데, 그럴 때에도 압제 당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을 씁니다. 이사야 58장 6절/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또한 감옥에 갇혀 있는 자를, 풀어 놓아주는 것을 말할 때에도, 자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시편 105:20/ 애굽 왕이 요셉을 감옥에서 석방시켜 주었는데, 이것을 시편기자는,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라고 말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감옥에 있는 요셉을 풀어서 내 보내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손목에 있는 쇠사슬을 풀어 주는 것도, 자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바벨론의 군대 사령관인 느부사라단이, 많은 유대인과 예레미야를 바벨론으로 옮기던 중, 예레미야의 손의 쇠사슬을 풀어 줄테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자유를 허락해 줍니다. 예레미야는 자유인이 되어 미스바로 가서, 남은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는 것을, 예레미야 40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근거하여 볼 때, 자유 또는 해방이라는 말은, 주로 노예가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할 때 사용되었고, 또한 억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혀 있거나, 쇠사슬에 묶여있던 것에서, 풀려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유와 해방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도 여러 개 있지만, 그 뜻은 구약의 히브리어 단어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달리 신약에서는, 속전을 치르고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과, 죄에서 해방시켜 줄때에 자유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특히 신약에서의 자유는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전, 다시 말해 그 만큼의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속량(해방)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눅2:38). 그리고 하나님의 예언과 이들의 기대대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전(대속물)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막10:45). 여기에 사용된 속전, 속량,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결국 그만큼의 댓가를 치루고, 자유를 준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근거할 때, 우리는 자유를 누구의 노예에서 풀려나는 것, 억압과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 더 나아가서 죄에서 놓임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자유는,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인가?라고 물을 때, 종에서의 자유, 속박에서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죄에서의 자유라는 사실입니다.
라틴 아메리카 페루라는 나라에, 구티에레쯔라는 신부가 있었습니다. 이 신부가 1970년도에 해방신학이라는 책을 한 권 썼는데, 이 책으로 말미암아 하루아침에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의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외부의 억압을 너무 많이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억압은 물론 가장 심각한 것은,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영국, 미국, 스페인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남미의 여러 나라에 들어와서, 강제로 십자가를 꽂고, 그 나라의 자원을 뽑아간 것입니다.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는 지하자원을, 그 나라 사람들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빼앗아 간 것입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강대국들의 종속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구띠에레쯔가 주장한 것은, 이 같은 경제적인 억압과 종속에서부터, 이 민족이 해방하자는 것입니다. 해방하지 않으면, 우리는 물론 이 나라의 미래도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 같은 주장이 전 남미의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어떤 사람은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하나로 똘똘 뭉쳐서, 자국의 지하자원을 지키기 위해서, 강대국들에 대하여 궐기를 하고 데모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궐기와 데모가 전 라틴 아메리카에 퍼짐으로 인하여, 각 나라에서는 강대국들의 경제적인 억압과 속박에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티칸에서는 선량한 백성들을 선동하여, 가톨릭 국가들에 대항한다는 판단아래에, 구띠에레쯔를 신부직에서 파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구띠에레쯔의 해방신학에서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것입니까? 경제적인 착취와 종속에서부터의 자유를 주장한 것입니다.
이 해방신학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이 사상이 흑인들에게 들어갔습니다. 흑인들은 보통 백인들로부터 인종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흑인들, 특히 미국의 흑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백인들의 인종차별로부터 해방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흑인들의 인권이, 상당히 상승 된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 일에 앞장섰고, 후에는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가 그 혜택을 보았고, 지금의 미국 대통령인 오바마도, 흑인신학의 혜택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에는 이것이 여성들에게 전해져서, 여성신학이 만들어졌습니다. 여성신학은 남성들로부터 성차별을 받으니까, 여기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남존 여비 사상을 깨 부수고, 남녀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여성도 남성과 대등한 입장에서 사람의 권리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도,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성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성신학은, 성차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는, 사회적 대 혼란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대학생들이 일어나서 국가를 향하여 돌맹이를 던지고, 화염병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근로자들도 일어나서 여기에 합세하였습니다. 전 나라가 시끄럽고 떠덜석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건물이 불탔습니다. 이때 국가는, 더 강하게 성난 민중을 지배하려고, 군인들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에 있었던 이 같은 일들이 무엇에 영향을 받아서 일어난 일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함석헌, 서남동 씨에 의해서 일어난, 민중신학 때문이었습니다. 민중신학은 군부 독재의 압제에서 민중이 해방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군부 독재는 부르조아 계급이고, 민중은 프로레타리아 계급임으로, 다수의 프로레타리아 계급이 소수의 부르조아 계급으로부터 자유하자는 운동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처럼 1970년에 일어났던 해방신학이, 단 10여년 만에, 전 세계에 다양한 신학으로 퍼져나가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흑인들에게 건너가서 흑인신학을 이루었고, 여성들에게는 여성신학, 대한민국에서는 민중신학을 만들어 냈습니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종속에서 해방하자는 운동이, 인종차별에서 해방하자, 성 차별에서 해방하자, 나아가서 군부 독재로부터 자유하자는 운동까지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 시즘에서 여러분들은, 다시 한 번 더, 오늘의 설교제목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입니까?’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종속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심한 인종 차별을 당하고 있는 지역에서, 백인들로부터의 자유도 필요합니다. 가부장적 제도 하에 있는 사회에서, 남자들의 성 차별로부터의 자유도 필요합니다. 총칼로 민중을 억압하여 압제하는 가운데서, 봉기를 해서라도 자유를 찾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모든 인류를 억압하고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는, 죄로부터의 자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시급히 필요하고, 궁극적으로 필요한 사항입니다. 앞의 것으로부터 다 자유를 누려도,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 그는 결국 비참한 인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의 아가리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과거에 죄의 종으로 있었을 때, 의에 대하여 방종하며 살았으니, 얼마나 부끄럽게 살았느냐, 그 마지막은 사망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이 되었다. 거룩한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한 사망에 이르지만, 죄에서 해방이 되면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되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대단한 은혜와 복인데, 이것은 경제적 억압에서 자유를 얻는 것과, 인종차별, 성차별에서의 자유를 얻는 것과, 심지어 육체적 억류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와 복인 것입니다.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었을 때의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기뻐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지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구나.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지금 심각한 갈등을 하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는 달리, 자꾸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수 있는가라고, 비통한 심정으로 탄식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배경 속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로마에서는 죄 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중 죄인을 감옥에서 끌어내고, 동시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를 무덤에서 파내 와서, 그 중 죄인의 등 뒤에 묶는 답니다. 발은 발대로 팔은 팔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묶어놓습니다. 그러면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요, 구더기가 중 죄인의 몸으로 입으로 꾸물꾸물 기어오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도관이 이 사람을 길거리로 끌어내서 몇 십 미터를 걷게 합니다. 그러면 주위의 사람들은 중죄를 지으면 저렇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때 길거리를 걷는 그 중죄인은,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입니다. 그럴 때 외치는 것이,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서 7장을 쓰면서, 그와 같은 심정으로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죄에서 나를 건져 줄 자가 없나?’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줄자가 없는가?’
그러다가 바울은, 갑자기 감격하며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가 나를 이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예수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풀어 자유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길거리에서 시체를 등에 짊어지고 비참하게,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걷고 있는 나에게, 주님이 대신 담당해 주심으로, 나를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바울은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펄펄 뛰면서,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까?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은 그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까?
-그 기쁨, 그 감격, 그 사랑, 그 은혜로 신앙생활하고, 그것 때문에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까?
이것 아니면, 전부 가짜입니다.
이것 아니면, 전부 위선입니다.
이것 없이 직분 맡는 것,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 없이 교회에 봉사하는 것,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간절히 바랍니다.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얻어서, 그 감격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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