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인생을 사시면서, 큰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으십니까?
큰 잘못을 하고, 그것을 숨기고 있었는데, 그것이 탄로 나지 않을까?
이것이 밝혀지면 정말 치명적인 결과가 오는데...
잘못된 과거가 밝혀 질까봐 두려워해 본적은 없습니까?
사업이나 직장이 부도 직전이라, 앞으로 생활 할 것이 걱정이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두려움을 느껴본 적은 없습니까?
건강이 안 좋아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죽음의 공포 앞에 두려워 해 본적은
없습니까?
사건사고로 인하여 죽음의 공포 앞에 두려워 해 본 적은 없습니까?
어르신들, 6.25 전쟁이나 계엄령 발표 시, 총과 포탄 소리에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와 불안과 두려움을 느껴보시지 않으셨습니까?본문의 제자들도 두려움을 만났습니다. 풍랑으로 인하여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고, 역시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쌓여있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생들은, 본문의 제자들처럼 때때로 두려움을 만나는데,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어느날 예수님이, 벳세다 근처 해안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주옥같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무리들이 시장한 줄 알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어린아이와 여자들을 제외한 5천명이기 때문에, 그 숫자는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러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대단하고 놀라운 역사가 벳세다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서둘러서 제자들을 배를 태워서 호수 건너편으로(가버나움) 보내시고, 그곳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을 흩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왜 많은 무리들을 일부러 흩어지게 하시고 제자들을 급히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을까요?
요한복음의 병행구절에 그 이유와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억지로 임금 삼으려 했기 때문입니다(요6:15).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죄악 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에, 사명을 버리고 저들의 흥분된 분위기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 지역을 다스리는 왕 헤롯 빌립이 있었고, 또 자기가 주로 활동했던 게네사렛에도 그 지역을 통치하는 헤롯 안디파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자기를 잡아 왕으로 삼고자 한다면, 정치적으로 대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무리를 흩어 보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이런 분위기에 젖어서, 저들의 사명을 흐려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무리를 흩어 보내는 동안, 제자들보고 빨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는데, 주님은 기도하시러 혼자 산에 오르셨습니다. 혼자서 주님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많은 인기에 편승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 땅에 자기를 보내신 뜻을, 다시 한 번 더 기도 중에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다음부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제자들이 타고 간 배는 이미 한참 갔습니다. 육지에서 수리가 떨어져 있었다고 했는데, 적어도 4-5km 정도는 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서 파도가 일어남으로, 그것으로 인하여,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없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이 상황을 극복해 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돛을 내리고, 열심히 노를 저어보기도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온 밤을, 그 폭풍과 싸움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보니까, 제자들이 파도로 인하여 당한 고난을, 예수님이 다 보고 계셨다고 말씀합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막6:47-48)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젖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서 그들 곁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 때가 밤 사경인데, 사경은 새벽 3-6시까지를 말합니다. 혹자는 밤 사경을 저녁 10시라고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전자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저녁부터 새벽 3-4시까지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에 밀려, 갈릴리 호수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새벽에,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는 있었던 그 시간에, 주님이 바다 위를 걸어서 오신 것입니다. 자그마치 몇 키로메타를 물 위를 걸어서 오신 것입니까? 100m, 1000m가 아니라, 자그마치 4-5km입니다. 그것도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이, 구약의 예언 성취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까? 하박국 3장 15절의 말씀에 보면, “주께서 말을 타시고 바다 곧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나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이 큰 물의 파도를 밟으셨다는 것인데, 이 예언을 지금 예수님께서 실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바다나 파도를 두려움과 혼돈과 공포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은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바다의 신이 꿈틀거리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이 바다를 밟고 계시는 모습을, 신약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은, 마치 바다의 신이나, 두려움과 혼돈과 공포를 짓밟고 계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사27장 1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지금 그리스도께서 바다를 밟고 당당하게 걸어오신 것은, 바로 바다의 용을 짓 밝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라고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예수님이 계셔야 되는 곳은 분명 벳세다 지역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물 위를 걸어오고 계시니, 어찌 예수님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비슷한 귀신(ghost), 유령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제자들의 두려움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을 주님으로 알아보지 못한데서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주님을 일개 유령으로 알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주님을 이 바다와 바람과 파도를 만드신 창조주로 안다면, 그리고 물 위로도 걸어오실 수 있는 분으로 알았다면, 유령으로 취급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한 두려움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역시 우리에게도 동일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27) 이것을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급히 자기의 신분을 밝히시면서, ‘나다, 너희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령으로 생각했던 그들 앞에서 주님은, 본인의 신분을 명확히 밝히는 것입니다. ‘나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을 들었던 배 안의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나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 즉 베드로가 이해가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제가 겁도 없이 왜 물 위를 걸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정말로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빨이 배 안으로 올라오십시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무슨 맘으로, 무슨 생각으로, 무모하게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이 황당한 요청을 받고,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이며 믿음 있는 반응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지금 하고 계신 일을 공유하기 원하여서 이런 요청을 했다고 봅니다. 베드로는 ‘오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을 향해 갔습니다. 사람으로서 최초로,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예수님을 벗어나 그를 둘러싼 높은 파도에 쏠리자 그만 물에 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강한 믿음이 있었지만, 그의 시선을 믿음의 대상에게서 벗어나서, 주위의 파도를 봄으로, 물속에 빠지고 만 것을 볼 때, 그것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보다가 파도를 봄으로, 믿음도 흔들리고 또한 두려움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의 원인을 또 한 가지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고, 세상의 파고를 보면 두려움이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살 때는 두려움이 없는데, 그 시선을 세상을 바라보거나, 고난과 어려움과 같은 높은 파도만 바라보면,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물속에 빠지면서 두려워 소리를 지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님 물속에 빠져가는 나를 살려 달라, 나를 건져달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파도를 보다가, 신앙이 흔들리고 두려움이 엄습해 오자, 다시 그 시선을 돌이켜 주님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절규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즉시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잠시 믿음이 흔들렸다고 해도, 다시 자기를 바라보며 간청하는 그 손을, 외면치 않으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며 두려워 떨고 있는 자녀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도 부르짖어 간청하면, 주님은 그들을 붙들어,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올랐을 때, 바람이 그쳤습니다. 갑자기 평온한 호수가 되었습니다. 성난 파도가 잠잠해 졌습니다. 이것은 자연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여전히 그 만물을 통치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구동성으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결론
갈릴리 호수 위에서 제자들이 만났던 상황은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평안하고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이 찾아왔습니다.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의 위인들도 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게 되고, 두려움에 빠져본 경험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먹고 살기 힘든 기근이 찾아오자 애굽으로 피했다가 자기 부인을 잃을뻔 했습니다. 조카 롯이 타국으로 잡혀감으로 자기의 군사들을 데리고 먼 곳까지 쫓아가서 전쟁을 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욥은 더 심한 인생의 풍랑을 만났던 인물입니다. 자식 열 명을 하루아침에 다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일순간에 다 날려 버렸습니다. 몸에는 악창이 나서 괴로워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욥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욥기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뼈마디가 흔들렸느니라.” 욥은 인생의 높은 파고를 경험하며, 얼마나 괴로웠는지, 내 모든 뼈가 흔들렸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인생도 참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습니다. 그가 괴로움과 고통과, 두려움을 많이 당했던 시절에 쓴 시편 중, 대표적인 시가 시편31편입니다. 거기에 보면, 다윗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고난과 고통과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내가 연약함과 비난과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내가 외로움과 비방과 공포와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심히 고통스러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사방이 두려움으로 쌓여있다고 고백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55:5)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성경의 인물들도 고난과 두려운 일을 당하였는데, 이럴 때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욥도, 다윗도, 베드로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을 찾고 주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만났을 때, 도망가거나 피하지 말고. 그 가운데서 울고 앉아 있지 말고, 상황을 한탄하지도 말고. 좌절하거나 낙담하지도 말고.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의 어려움과 풍랑과 두려움을 만났을 때,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큰 소리로 울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절규하시기 바랍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너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워 괴롭다고, 죽고 싶으면 차라리 죽고 싶다고, 먹고 살기가 막막하면. 하나님 제발 도와달라고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5000명 이상에게, 떡과 물고기를 주어서 먹게 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바다를 짓밟고 서 계신 주님이 여러분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환란과 풍파와 고난과 두려움과 고통, 어려움과 문제 속에,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주실 분이고, 평안을 주실 분이십니다. 기쁨과 희락을 주실 분이십니다. 안정과 생명을 주실 분이십니다.
그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흔들렸을지라도 다시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랬을 때 그 모든 과정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그 현장 속에 함께 하셨던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괴롭고 두려울 때, 그 현장 속에 함께 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바다를 밟고 서 계신,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여러분들을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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