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두 구절 다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이 되는데, 창세기의 태초는 천지창조 시를 말하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영원 전을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태초보다 요한복음의 태초가 더 오래 된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에 의해 세상만물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십니다. 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전반부를 통하여, 말씀은 예수님이시며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창조주이시고 빛이심을 알게 됩니다. 앞 스크린에 나오는 말씀 중, 밑줄친 부분을, 예수님으로 바꾸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5절 말씀입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빛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는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되, 빛으로 오셨으며, 또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 같은 말씀들을 볼 때, 우리는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시며, 또한 모든 은혜와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온다.’ 16절 17절에 보시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사도요한이,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충만한데서, 은혜위에 은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주님으로부터 중단 없는 은혜를 공급받았다는 뜻입니다. 흘러넘치는 은혜를 받았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셨다는 말은 받아서 주셨다는 말이고, 왔다는 말은 그분으로부터 출발한다, 기원한다, 발원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우리에게 주었지만, 그리스도는 은혜와 진리를, 본인이 친히 주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가감할 수 없는 이 사실을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 성경구절을 통하여, 그분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다음의 몇 구절을 통하여, 예수님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산에서 주옥같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셨습니다. 8복에 관하여 말씀하셨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주셨고, 기도에 관해서도 말씀하셨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남을 비판하지 말고, 항상 열매 맺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기독교인의 아름다운 삶에 관해서 교훈하셨습니다.
이 같은 산상수훈의 말씀이 끝났을 때, 이 말씀을 들었던 무리들이 다 놀랬습니다. 그러면서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마7:29)고 했습니다. 주님이 당시 율법 교사들이었던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진리를 가르치되, 권세 있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진리교육에 있어서 차원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 박사들의 가르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리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분은 진리로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주님은 계속하여,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 진리를 가르치시고 설교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든, 바리새인이든, 왕이든, 아니면 평민들이든, 부자들이든 가난한 자들이든 상관없이, 그들 앞에서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셨습니다.
하루는 예수님이, 자기의 말을 듣고 따라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을 기특하게 여기며,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계속하여 그들에게 설명하시나, 그들이 깨닫지를 못하니까, 주님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니라.”(요8:43)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기특하게 여긴 예수님이, 이제는 우매한 그들을 책망하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시다가 결국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에게는 진리가 없다. 마귀는 진리에 서 있지 못하다. 너희는 그런 놈의 자식들이니, 어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공생애를 거의 다 마치실 때에, 그는 다락방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마지막 진리강의를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다락방강화라고 부릅니다. 다락방 강화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말씀으로 시작이 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내가 부활 승천하게 되면,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 ‘그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는 말씀으로 강화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이어서 요한복음 17장으로 가서, 주님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다른 기도도 많이 하시지만, ‘아버지여, 저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라는 기도를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성결은 진리로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후 예수님이 붙잡히셔서, 총독 빌라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질문하자, 주님이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시면서,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왔으며,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받아서 빌라도가, 그럼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진리를 바로 앞에 두고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깨닫지도, 알지도, 믿지도 못한 것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진리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한 인격적인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증거 하러 오신 분이기도 하지만,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에베소서 4장에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21)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구절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진리로 충만하셔서, 막힘없이 진리를 가르치시고, 진리를 선포하시고, 그분자신이 진리이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것을 통하여, 그분은 진리로 충만하셨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주님이 은혜가 충만한 분임을 알아보겠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온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돌을 던지면, 이어서 모든 사람들이 돌로 쳐서, 그 여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먼저 돌을 던지는 것은, 그 사실과 죄를 아버지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인정해야, 모든 동네 사람들도 인정하여 돌을 드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주님이 그들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돌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모두가 돌을 내려놓고, 하나하나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여자여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한량없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 현장은, 주님의 충만한 은혜, 자비와 긍휼이, 잘 들어난 곳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은 마태복음 15장의 기사인데,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들어가셨습니다(마15). 그때 어떤 가나안 여자가 나아와서,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 이 여인의 부르짖음을 주님이 들었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자, 제자들이, ‘예수님,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큰 소리로 간청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주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때 그 여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절을 하며, ‘주여 저를 도와주옵소서.’라고 부탁을 드립니다. 이렇게 두 번씩이나 간청하는 이 여인의 소원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조금 무정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지만, 이방인은 개와 같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여자는,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베푸시고, 부스러기 은혜라도, 개 같은 나에게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정하게 대하셨는데, 그에 반해 이 여자는,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부스러기 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셨을 때, 그 딸이 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을 개 취급한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끝까지 주님께 간청했던, 이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이 그녀와 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이 여자와 그 딸과 가족은, 평생 동안, 주님의 이 한량없는 은혜를,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이 얼마나 은혜로 충만하신 분인지를, 알아보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의 한 사건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은 가장 큰 은혜이고, 고상하고 고귀한 은혜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사람은 다 연약한 존재입니다.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는 무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은 다 죄인입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둘 사이의 간격이, 너무 많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희망이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양손 양발에 커다란 대못을 받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살을 찢으신 것입니다. 모진 고통과 괴로움을 한 몸에 다 받으셨습니다. 멸시와 천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왜이지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천국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7-9)
우리의 어떤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 같은 죄인을 향한, 한량없는 그분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이작 왓츠는 이렇게 노래합니다(143장).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간음은 율법파괴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율법대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죽음 직전에 예수님 때문에 살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귀신들려 고통 받는 딸의 문제를 안고, 주님 앞에 개 취급을 당하며, 간구 했던 가나안 여자는, 주님의 은혜로, 딸이 낫는 역사를 체험하였습니다. 그 가정에 다시 피어나게 된 행복한 웃음소리와, 감사 찬송이 우리 귓가에 들리지 않습니까?
죄로 인해 지옥 갈 인생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헐어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자가 되었고, 주의 이름으로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이 구속의 은혜를 어찌 측량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각의 경우에, 주님이 은혜를 베푸셨다.’ ‘주님의 자비와 긍휼이 저들을 살게 했다.’ ‘예수님은 정말로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시다.’
결론
주님은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 진리와 은혜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진리와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말세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4)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만큼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오히려 말세의 환란 중에도, 진리 안에서 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가이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기는, 성도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더 기쁨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요삼1:3-4) 사도바울도,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라’(고전13:6)고 하셨고 또한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엡6:14) 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교훈하시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는 진리 안에서 살아서, 매일 승리하여, 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이 주시는 진리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항상 은혜아래 살아야 합니다. 사도바울 일행이 1차 전도여행 시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 전도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두 사도가 말씀을 들은 형제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13:43) 어쩌면 비시디아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너희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한다.’ 언제나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바다에 푹 잠겨서 살라는 이 권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다.’(히13:9)고 했으니,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혹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은혜가 없이는 성공할 수 있는 인생이 없고, 은혜가 있는데 망할 인생도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경북 포항, 작은 어촌마을의 한 가난한 집에, 2남3녀의 막내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습니다. 12살-아버지가 배 사업을 하다가 완전히 망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어머니가 자궁암 말기-3개월 선고...이때부터 이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다니기 시작...이 아이는 교회에 가서, 오로지 어머니 병을 낫게 해 달라는 기도만 했음...모든 예배..기도회..부흥회...나중에는 어머니를 니어커에 태워다가, 난로 옆 마룻바닥에 눕혀놓고 예배를 드렸답니다...어머니는 4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그 때가 중 2때였습니다.
포항여고에 들어갔는데...차비가 없어서...꾸어서...결국 중퇴하고..부산으로 가서 방직공장의 직공...하루에 8시간씩 일을 하고..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쇼핑센터에서 일을 해서, 3년 만에 1000만원을 모아서, 그것가지고 부산에서 초밥 집을 냈답니다...24살 때였습니다....잠도 안자고 혼자서 일을 하면서, 한 달에 300만원 정도 벌었답니다...돈이 생기니까 친구들하고, 나이트클럽을 다니면서, 신앙생활도 안하고 놀러만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대학에 가게 되었습니다. 27살 때, 동아대 법대에 들어가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한 것입니다. 4년 내내 수석을 했습니다. 새벽 5:30분에 학교에 가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그리고 공부하고 강의를 듣곤 했답니다.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책상에 앉아 공부를 했답니다.
드디어 그녀는 2002년도에, 사법시험에 합격을 해서, 지금은 부산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하여, 변호사 일을 보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각종 문제들을, 법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지금 나이가 44살이 된 김미애 씨는, 지금도 늘 이렇게 말한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였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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