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전15:1-10
3월의 주제가 은혜입니다. 3월 정기기도회 때에는, 은혜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노아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물로서 심판을 받을 때에, 그와 그의 가족만 은혜 중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많은 가족과 엄청난 물질의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또한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서, 형제들의 생명을 구하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창세기의 세 인물, 노아와 야곱과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물질과 명예의 복을 받았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주에는 헌금에 대하여 설교했고, 둘째주일에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왕, 다윗에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젊은 청년시절과 결혼해서도 하나님의 그 은혜가운데 보냈으며, 왕이 되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다가 여러 가지 고난과 근심걱정, 난관들을 만날 때마다, 그는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평생 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고 했고, 실제로 은혜 가운데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다윗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3월 셋째주일에는,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실 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진리와 은혜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 진리와 은혜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진리와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지난주에는 다른 주제의 말씀으로, ‘좋은 땅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좋은 땅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경청해야하며, 마음 밭을 갈아엎어서 돌이나 가시덤불을 골라내야 좋은 땅이 되고, 그래야 열매를 30배에서 100배까지 맺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바울에 관하여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울에 관하여 살펴보는 것보다, 바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에 관하여 알아보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어떤 은혜를 주셔서,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
바울의 생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믿기 이전의 삶입니다.
성경은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이전 삶에 관하여, 여러 말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와 같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조산된 자’, 미숙아, 팔삭둥이라는 말입니다. 의미적으로 말하면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 자,’ ‘덜 떨어진 자’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이고...베냐민 지파’ 사람이다/ 나면서부터 로마시민권자이지만, 또한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다. 당시의 정치적 배경과, 종교적 즉, 유대교적 배경을 암시해 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가 태어난 길리기아 다소가, 당시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고, 그 가운데서 유대인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다보니까 형식주의와 위선주의로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관하여, 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에 매여서, 율법대로만 살면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나는 ‘가말리엘 문하생’이다/ 가말리엘은 당시 율법의 최고 권위자라고 할 수 있고,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질 만 했습니다. 최고의 율법학자 밑에서 공부를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보아 바울은 교만할 수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장래 희망이 창창한 청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당시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하면, 대단한 유망주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나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좌장이다.’/ 스데반 집사님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길게 설교를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화가 나서,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게 됩니다. 이때 증인들이 자기들의 옷을,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고 했습니다(행7:58). 이 말은 사울이 그들의 옷을 지킴으로, 이 일을 찬성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교회를 핍박하고 잔멸했습니다.’/ 행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잔멸’/포도원을 파괴하는 들 돼지를 묘사하는 말이다.(시80:13). 사울은 들 돼지처럼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교회를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를 믿는 자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예수님이 죄인을 구하려 이 세상에 오셨는데, 나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것입니다. 죄인중의 괴수는, 죄인들 중에 첫째라는 뜻입니다.
이 같은 말씀에 근거하여볼 때, 바울이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은, 공부는 많이 했는데 엉망이었고, 너무 악했고, 교회를 잔멸하며, 죄인의 우두머리로 살았던 것입니다.
다음은, 바울이 예수 믿게 된 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행9장/그날도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잡아오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의 공식적인 공문까지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울의 단독적인 행동이 아니라, 유대교 지도자들의 공개적인 핍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든든한 뒷배경을 업고 바울은 신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오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의기양양해서 갔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갔습니다. 신자들에 대한 핍박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밝은 빛이 비쳐왔습니다. 바울은 짐승에서 떨어져서, 빛으로 인하여 사물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은 떴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했더니 주님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은, 곧 자기를 핍박하는 것과 같이 취급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이,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너에게 이를 자가 있을 것이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3일 동안이나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패하고 있었을 때,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아나니아는 신실한 주의 제자로, 환상 중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 중에 있는 바울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안수기도해 줍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17)
기도를 마치자마자,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보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구원사건입니다. 율법주의자였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잔멸했던 죄인의 우두머리가, 예수를 만나 믿게 된 것입니다. 즉시로 성령 충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만남으로 사람이 180도 바뀌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바울이 믿고 난 이후의 삶의 부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언덕에서 주님을 만났고, 그 도시로 들어가서, 아나니아의 기도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도시에서 즉시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시며 메시야’라고 전도를 합니다. 그러다가 아라비아 광야로 나가서, 오랫동안 성령의 지도로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로 가서, 복음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파송을 받아서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로마와 스바나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는 곳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구원을 받은 바울은, 그 이후의 전 삶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뻐하며 감사하며, 기도하며 섬기며,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삶은, 세 단계로 분명히 구분이 되는데, 예수를 믿게 된 시점을 중심으로,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설교를 할 때나 가르칠 때, 자신의 삶을 세단계로 나누어, 간증하며 전도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26장에 나오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의 전도입니다.
거기에 보면 자기는 일찍부터 바리새파에 속하여, 율법을 엄하게 지키며 살았다고 말하고,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었고, 죽이는데 찬성표를 던지기도 하였고, 외국 성까지 가서 성도들을 박해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날도 대제사장의 권한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곳에서 밝은 빛으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라는 사명을 주셨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아그립바 왕도 이 말을 듣고, 구원 받게 되기를 원한다고 전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가 믿게 된 시점을 중심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서 간증을 함으로, 아그립바 왕을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활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앞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보고 배우고, 받고 듣고 체험한 것을 전한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사항으로,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을 체험한 것, 예수님을 뵈옵고, 들은 말씀을 고린도교회에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전한 예수님에 관한 중심 내용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핵심 진리이고,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 내용 중에서, 부활을 더 강조하여 말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부활은 복음 메시지의 중심 주제이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은 구약예언의 성취이다. 주님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성경대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수많은 증인들이 목격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자신의 부활체를 게바에게 보이시고, 12사도에게도 보이시고, 500여 형제에게도 보이시고, 야고보에게도 보이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에서 ‘두 세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그것이 확실시 되는데,’ 지금 주님의 부활을 본 사람이 한 둘이 아님으로,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자기와 연결시켜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8-10상)
부활하신 주님이 나에게도 나타나셔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복음을 전하라는 사도가 되게 해 주셨으니,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박해하고 잔멸하던 자가,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었으니,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3-14) 비방자, 박해자, 폭행자가 주의 한량없는 은혜를 입어, 사도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죄인의 괴수가, 하나님의 자녀와 복음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은혜 받은 사람의 모습은, 얼굴이 환하답니다. 짜증을 내거나 불평하는 얼굴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밝은 얼굴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기쁨이 넘침 답니다. 주체할 수 없는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한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 받은 사람은, 받은 은혜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일에 열심을 냅니다.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0)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하나님의 일에 더 많이 수고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1, 2, 3차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일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나중에는 로마와 스바나까지 가서,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얼마나 고생하고 수고했습니까? 복음을 위한 그의 수고의 모습이, 고린도후서 1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2-27) 이런 고생고생을 하면서도, 바울은 늘 교회를 염려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밀레도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당하여 고난을 받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전하려함에는, 나의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행20:24) 죽어도 이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말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린다는데, 바울은 사명완수를 위하여, 생명까지 버리겠다고 각오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많이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가 아니면, 결코 바울이 바울 될 수 없었고, 여러분이 여러분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량없는 은혜이고, 측량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입었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은혜 입은 자의 삶은, 바울처럼 더욱더 주의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주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일을 하고서 생색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한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큰일을 해 놓고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면, 우리가 무엇을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교사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가르치시고, 인도자들과 구역장들은 더 열심히 구역을 돌보고, 찬양대원들은 더 열심히 준비해서 찬양하시고, 봉사하시는 분들은 더 열심히 봉사하시고, 더 열심히 예배하시고 더 열심히 기도하시고, 더 열심히 전도하시고, 더 열심히 헌금하시고, 더 열심히 섬기시고, 더 열심히 사랑하시고, 더 열심히 사업하시고, 더 열심히 목회하시기 바랍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을 때, 농기구의 종말을 보게 됩니다. 호미, 삽, 괭이 낫, 지게는, 주로 빈농가에서 많이 사용하고, 부농들은 경운기, 트렉타를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농기구들의 종말을 보면, 녹 쓸어서 못 쓰는 농기구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닳아서 못 쓰는 농기구들이 있습니다. 둘 다 쓰지 못하게 된 것에는 차이가 없지만, 이것들에 대한 주인의 마음은 완전히 다릅니다. 녹 쓸어서 쓰지 못하는 농기구를 볼 때면, 안타깝게 여기며 혀를 찹니다. 아깝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닳아서 못쓰게 된 농기구를 보면, 주인이 흐뭇해하고 만족해합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녹 쓸어서 종말을 맞이하겠습니까? 아니면 닳아서 마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혹자가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나는 녹 쓸어서 못 쓰는 인생이 아니라, 닳아서 없어지는 인생이 되겠다.’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부분에 보면,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더 많이 수고하여, 닳아서 인생을 마감하면,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열심히 수고하고도,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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