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1-9/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4월의 주제가 기쁨입니다. 첫째 주에는, 에스더서의 말씀을 근거로,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만의 꾀로 인하여, 온 유다 백성들이, 한 날에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개입으로 모두의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유다인들의 슬픔을 변하여 기쁨을 주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둘째 주에는 예레미야의 말씀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하셨다.’는 주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그들이 바벨론 나라로 포로로 되어 가지만, 나중에 때가 되면, 반드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때 그들은 울면서 기뻐하며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는, ‘예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제목의 말씀이었는데,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의 기쁨이요, 예수님의 죽음도 우리의 기쁨이요, 더더욱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극락을 누릴 것을 소망하며, 흔들리지 말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자고 했습니다.
오늘 4월 27일 아침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주제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억울하게 붙잡혀 온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감옥은, 철저히 억압을 받던 곳으로, 처참한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바울에게는 조금 자유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렇다할지라도 감옥은 감옥으로, 부자유스럽고 고통이 심한 장소였습니다. 눅눅하고 어둡침침하고, 바닥에는 찬기가 있고, 이름 모를 벌레들도 많았고, 식사도 변변찮은 것으로, 겨우 생명만 연장해 나갈 뿐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환경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 같은 환경 속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너희들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한 번만 말한 것이 아니고 여러 번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사치례나 형식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고, 진실 된 마음으로 간절히 얘기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기뻐하며 살았고,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얘기합니다. 바울은 빌립보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도, 기쁨으로 항상 기도한다고 했습니다(빌1:4). 이곳에 와 보니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을 보니,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1:18). 또한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것도, 너희 믿음의 진보와, 너희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1:25).
빌립보서 2장에서 보니까, ‘너희는 각각 자기 일에 힘쓸 뿐 아니라, 남의 일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4)는 말씀도 있습니다. 또 너희 안에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2:13).
이어서 바울은, 자기의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기뻐한다고 했고, 또 동료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7-18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이 말은 결국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초월하여 살면, 어떤 경우에든지 기뻐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보면, 바울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얘기합니다. 내가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급히 보내는데, 저는 나의 동역자요, 나의 쓸 것을 도와주었으며, 나를 돌보다가 죽기에 이르렀으나, 하나님이 그를 살려 주셔서, 그를 너희에게 보내니, 너희가 그를 다시 봄으로 기뻐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맞이하되,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와 같은 헌신자들을, 존귀하게 여기라고 부탁을 합니다(2:29).
빌립보서 1장과 2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바울이, 이제 3장에 접어들어서, 또 기쁨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이, 감옥 안에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기뻐하라고 말했다면 이해가 되지만, 그런 게 아니라 바울은,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감옥 안이 더 부자유스럽고, 더 불편하고, 더 불안하고, 더 근심걱정이 많고, 더 고통스럽고, 더 우울한텐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도 바울은, 저 철조망 너머의 사람들을 향하여, 주안에서 기뻐하라고 권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이 반복해서, 같은 말을 쓰고 있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옥중에서도, 기쁨이 얼마나 충만 했으면,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그러면 바울이 이처럼,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기쁨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그 기쁨, 환경을 초월한 전천후 기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먼저 바울은 이 기쁨의 원인을, 부정적인 두 가지 사항을 말하고, 이어서 긍정적인 한 가지 사항을 말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기쁨의 부정적인 원인 두 가지 중 첫 번째는, 좋은 조건이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좋은 조건을 갖추거나, 내 환경이 좋거나, 내 백 그라운드가 좋으면, 내가 행복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고, 기뻐하거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부모를 잘 만나면 행복하고, 자동적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좋은 부모를 만나고, 좋은 환경을 만나는 것은 복입니다. 이것은 마치 달리기 선수가, 다른 선수들보다, 출발을 조금 더 일찍 한 것과 같은, 유리함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출발한 선수는 잇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출발했다고 해서 반드시 1등으로 골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발은 조금 늦게 했지만, 자기의 온 힘과 능력을 발휘하여, 먼저 출발한 사람을 재치고, 우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도 좋은 조건에서, 인생을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 이력을 회고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4-5)
조건을 따지자면 바울도, 좋은 조건에서 인생을 출발했다는 말입니다. 태어나자마자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았지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직계자손이며, 12지파 중에 가장 명문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순수한 히브리 혈통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언어 실력은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율법의 고수였던 가말리엘 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일종의 율법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율법학교였기 때문에, 이 학교 출신들은, 사회에서의 성공과 출세, 부귀영화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하버드 대학 출신들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들은 충분히 그의 성공이나 행복조건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한 사람, 기쁨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진 좋은 출발, 좋은 태생, 좋은 가문이 행복을 주거나, 참 기쁨을 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가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평생 동안 조건 타령만 하다가,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집이 조금만 부자였다면. 내가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부모만 잘 만났더라면. 이 모양 이꼴은 아닐텐 데..’ ‘내가 조금만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지급보다는 더 행복했을 텐데...’ 여러분, 환경이 좋고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해서, 반드시 잘 되거나, 행복하거나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남들보다 더욱 육체를 신뢰할 만큼, 자랑할 만큼 좋은 조건을 가졌지만, 이것이 나를 기쁘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과 기쁨은, 반드시 우리의 출생 조건이나, 성장 환경에 좌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거나, 어떤 업적을 이루었거나, 무엇을 성취하였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행복과 기쁨이 오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도는 6절에서,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과거의 업적으로, 자기는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다고 말합니다. 과거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을 때, 바울은 자기의 종교 즉, 유대교의 하나님에 대하여 열정적인 신앙을 가졌는데, 그것이 밖으로 표출 된 것이, 교회에 대한 박해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회를 핍박한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열심이 특심해서, 다메섹까지 올라가서 믿는 자들을 잡아오려고 한 것입니다. 그의 혈관에는, 그리스도인을 죽이기 위한, 뜨거운 살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종교적인 업적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말은, 바울은 율법을 지키려고 했고, 깨끗하게 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는 상당한 도덕적 수준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의 도덕적 성취(업적)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실제로 청문회를 해도, 국회의원들이 흠을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종교적 업적이나, 도덕적 업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행복해지거나 기쁨이 넘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름대로 종교적, 도덕적 업적을 이루었지만, 결코 행복하거나 기뻐하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이루고 성취하고, 대단한 업적을 쌓았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적으로 성공했으나 불행한 사람도 많습니다.
구한말 경기도 광주에 이완용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대에 드물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주미 공사와 주일 공사를 지내고, 많은 정부 요직을 그친 다음, 후에 외무대신을 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 정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한일합방을 추진하여 도장을 찍어줌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일합방 이후 그는, 계속하여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돈도 셀 수 없이 많이 모으게 됩니다. 그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대대로 민족의 지탄과,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이런 내용들을 볼 때에, 바울은 좋은 조건에서 인생을 출발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무엇을 이루었다고, 업적을 많이 세우거나,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해서, 행복하거나 기쁨이 넘치는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바울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까? 마치 다함이 없이, 땅 속에서, 샘물이 퐁퐁 솟아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환경과 여건과, 정치, 경제, 교육, 죽음을 초월한 그 기쁨이,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긍정적인 요인 한 가지를 밝힙니다.
바울은 본문 7-8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도는, 지금까지 자기가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권력이든 돈이든 명예든, 업적이든 학력이든, 가문이든 백이든,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탄생의 좋은 조건이나 고학력, 어떤 업적이 있으면 행복하고 기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게 되니까, 거기에 참 평안이 있고, 참 행복이 있고, 거기에 참 기쁨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과거에 집착했던, 이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은, 예수 때문에 감옥 안에서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좋은 조건이나 업적 때문에, 기쁘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얻고 나니, 초막이나 궁궐이나, 감옥 안이나 밖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에 참 기쁨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 한 것은, 이 말씀을 잘 알고, 수시로 듣기도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바울이 쓰레기처럼 버린 오물들 속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 속에서는 주님이 주시는 그 기쁨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그 기쁨은, 주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을 가졌던 바울이, 교인들을 향하여,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밤에, 술에 잔뜩 취한 한 남자가, 교회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교회를 지키던 사찰 집사님도, 그날따라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고 합니다. 사찰 집사님이, 취중에 소리 지르기를, ‘누구시오’라고 했답니다.
‘난 신도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요.’
‘왜 신도가 되기를 원하시오.’
‘슬픔이 많아서 기쁨을 찾고 싶소.’
‘기쁨을 찾고 싶은 사람이 왜 하필 예배당에 왔소.’
‘예수님이 기쁨을 주신다고해서 왔소.’
이때 사찰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그런 양반 여기에 없소.’
예수님이 없는 교회,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마음, 기쁨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십니다.
1931년 미국 보험회사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는 한 사람이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장내가 조용해 졌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들려준 저음의 바리톤이 전 미국 국민을 매료시킨 것입니다. 그가 갑자기 유명 스타가 되었습니다. 방송 계약 제의가 들어오고 출세와 돈이 보장된 스타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의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는 머리를 숙여 조용히 기도합니다. 똑같은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아들의 출세 길이 눈앞에 보이지만 기도하는 어머니 마음에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이 앉는 책상 위에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조용히 올려놓았습니다. 아들이 보니까 그것은 어머니가 자주 애송하던 ‘밀러’라는 부인이 쓴 성시였습니다. 그 성시의 가사를 읽다가 갑자기 이 청년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마음속에서 멜로디가 솟아오릅니다. 그는 펜을 꺼내서 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2.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3.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후렴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 사람이 ‘조지 베브리 쉐아’입니다. 그는 갑자기 유명 복음성가 가수가 되었습니다. 평생 동안 빌리 그레함 목사와 동역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간증을 했습니다. 하루는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특별찬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지도자들이, 그가 강단에 올라서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박수를 다 받은 쉐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신 이 박수갈채와, 예수 그리스도를 바꾸지 않겠습니다. 예수만이 내 존재 이유이며, 예수만이 내 기쁨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제이니’라는 학자는, 항상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매일 천국을 다녀오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깃발과 같습니다. 성에 깃발이 꽂혀 있다는 것은, 그 성에 왕이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마음속에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기쁩니다.” 우리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고, 얼굴에 웃음이 있다는 것은, 마음에 주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뻐할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고, 그분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고, 그분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와, 존재 이유를 주셨고, 그분이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행복의 원인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주님 때문에 항상 기뻐하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얻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죄 사함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이요, 하나님의 일꾼 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이 와도, 어떤 시련이 와도, 어떤 아픔이 와도, 어떤 어려움이 와도, 절대적으로 빼앗기지 않는 기쁨입니다. 환경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제 환경의 지배를 받는, 연약한 자가 되지 마시고, 주님 안에 거함으로 환경을 이겨, 날마다 기뻐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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