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기도의 달입니다. 그래서 첫째 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모세의 기도’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모세는 자기의 잘 못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이 백성들의 우상숭배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 것 같으면,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이 기도를 들으사, 일단 형벌을 연기하여 주셨고, 그리고 계속하여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가정을 생각하면서, ‘경건한 고넬료의 가정’에 관하여 말씀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고넬료는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온 집안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고, 열심히 구제하고, 항상 기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울러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으며, 말씀 전하는 자를 존경했습니다. 이런 자세와 마음으로 말씀을 듣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게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경건한 가정이었고, 말씀을 사모하는 가정이었고, 성령 충만한 가정이었고, 하나님을 높이는 가정이었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가정이었습니다.
또한 5월 정기기도회 때에는, ‘우리가 기도를 할 때 누구에게 기도하는가?’의 문제를, 첫날 새벽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기도 대상이시며, 그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시고,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둘 째 날 아침에는, ‘무엇을 기도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답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은, 다 덤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영원한 기도제목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날 새벽에는, ‘기도에 응답이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우선 기도해도, 응답 받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했습니다. 의심하거나, 마음에 죄를 품거나, 형식적으로 기도하거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기도는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기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진실 되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반드시 응답이 있다고 했고, 우리가 응답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여러 번,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바르게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해서, 하나님 앞에서 응답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기도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는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이 겟세마네라는 말은 아람어로, ‘기름 짜는 틀’(Oil pres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나는, 올리브의 기름을 짜는 틀이 많아서,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자주 들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고별설교를 하시고, 기드론 골짜기의 시내를 건너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기도를 하시는데, 그분의 기도는 모범적 기도이고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기를 바라고요,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잘 들음으로 은혜가 되고, 믿음이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는데,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1. 본문에는 십자가를 앞에 둔,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셨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할 때, 그 문제의 성격이나 중요성과 위급성에 따라서, 기도자의 마음과 태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내일 내가 건강 검진을 받으러 간다면, 그때에는 보통 ‘하나님 아버지, 내일 평안한 마음으로, 검진을 잘 받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아무런 병도 발견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 반면, 말기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기 위해 갈 때, 기도자의 마음과 태도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 수술로 완치 되게 해 주시고, 내 생명을 유지시켜 주옵소서. 살려 주시옵소서. 혹시 수술을 받다가 잘 못되면, 하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무엇인가 그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 번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한 고등학생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학생은 모 교회의 사찰 집사님 아들이었습니다. 배가 침몰이 될 때, 이 아이가 주위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저희들이 위험에 처하였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여 주옵소서.’ 그 학생은 죽었고, 함께 손잡고 기도했던 다른 학생들이 살아나서, 이 이야기를 사찰 집사님 아버지에게 했답니다. 죽음을 앞에 둔 그 학생의 기도가, 얼마나 진실했으며, 얼마나 절박한 간절한 기도였겠습니까? 아마 지금까지 그가, 가정과 교회에서 기도했던 것 하고는,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에게, 죽음의 십자가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로마 군병들에게 붙잡히게 되고, 고난과 멸시를 한 몸에 받다가, 내일이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실 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고,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끔직한 처형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앞에 둔, 그의 마음이 어떠하셨을까요? 내일이면 33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시는데, 그 모진 십자가의 죽음을 면전에 둔, 주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마태는 그때의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 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6-38) 주님이 자신의 마음상태를 이렇게 표현하신 것은, 여기가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고민하고 슬퍼 하사,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슬픔으로 심히 고민하여, 죽을 지경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슬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Taylor).
이때의 주님의 마음은, 그분도 인간의 육체를 입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분명히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신 것이고, 혼비백산할 정도로 놀란 감정 상태를 보이신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또는 이런 마음인데도 주님은, 그 동산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라면, 인생을 자포자기할 수도 있겠고, 너무 불안하여 정신 불안 증세를 보일 수도 있겠고, 난폭해 질 수도 있고 정신을 잃을 수도 있겠지만, 주님은 평소에 즐겨 찾던 동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의 기도자세는 간절함을 들어냅니다.
실제로 그렇게 기도하셨는데,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를 합니다. 주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던 적도 있고, 손을 들고 기도하시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 적은 있지만, 여기에서처럼 얼굴을 땅에 파묻고, 엎드려 기도하신 적은 없으셨습니다. 이 기도의 자세와 태도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과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해 준다고 봅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병행구절에는 이런 말씀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였으면, 그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주님은 얼굴을 땅에 파묻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과학자들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땀샘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오면, 거기서 피가 나온다고 합니다. 땀이 밖으로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기도하신 것이고, 더 이상의 수분이 없어서, 그 속에 있는 피가 나올 정도로 기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온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하여, 기도하신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겟세마네란 말이 ‘기름을 짜는 틀’이라고 했는데, 그것처럼 주님의 기도는, 육신의 모든 기능을 쥐어짜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술례객들이, 주님이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을 찾습니다. 저는 2번 정도 그곳에 가 보았습니다. 저는 그곳에 갈 때마다, 한 올리브 나무를 찾아봅니다. 이 나무는 수명이 20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원 둥치는 굉장히 커서, 어른들 4명의 벌린 팔로, 겨우 잡을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키는 약 2-3m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제가 궁금해서, 그 올리브 나무에게 다가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올비브 나무야, 너는 여기서, 주님이 그렇게 힘써 애써 기도하시는 모습을 봤지? 주님이 이 나무 밑에서 기도하시던 모습과 열정을, 나에게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니?’ 두 번째 갔을 때, 그 나무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다 알면서 왜 물어?’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절한 심령으로, 힘쓰고 애써서 기도하셨는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처럼 이렇게 간절함으로 기도하지 못할 때가 많고, 땀을 흘리며 기도하지도 못하는데, 주님은 더 높은 차원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주님의 간절한 기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5:7)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이렇게 간절함으로 기도하셨다면, 연약한 우리는 당연히 더 간절함으로, 힘써 애써 기도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주님은 자기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의 이 '잔'은,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예수께서 친히 감당하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너희가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고 말씀하신 적이 있듯이, 이것은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잔은 고통의 쓴 잔이고, 이것을 마시지 않으면 즉,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시지 않으면, 인류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죽기까지 복종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시지만 이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바꾸십니다.
결국 주님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뜻을 그 앞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기도하지만, 주님은 달리 기도하셨습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의 뜻을 죽이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 내용의 기도를 주님은, 세 번 동일하게 하셨습니다. 한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는 것이, 중언부언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비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주님의 이 기도는 결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어주실 줄 생각하고, 의미 없는 말들을 많이 지껄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반복적인 이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간절한 마음, 이 기도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의미 있게 진실 되게, 떨어지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열정적으로 반복적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바클레이 목사님의 말대로, ‘세계의 구원이,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마치 엘리야가, 3년 6개월 동안 비가오지 않아, 심한 가믐에 든 이스라엘 땅을 위하여, 비오기를 위하여 몇 번이나 반복하여 기도한 것 같은 것이고, 신약의 바울도 자기 몸의 가시를 없애달라고, 세 번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얼마든지 중요하고 다급한 기도는, 주님과 엘리야와 바울처럼, 반복하여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4.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은 자기의 마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이후에, 너희들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와 시험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앞일을 아시는 분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책망을 듣고 재차 권고를 받았지만, 제자들은 한 시 동안도,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를 못하였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이 깨어 있지 못한 원인에 관하여, 마태와 마가는 ‘육신이 약하여서’라고 말하고, 누가는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고 했고, 요한복음에는 관련 기사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제자들의 몸이 심히 피곤했다는 것과, 예수님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로, 슬픔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깨어 기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제자들이 조금만이라도 주님의 마음을 이해했더라면, 조금이라도 주님의 권고의 말씀을, 좀 더 신중하게 받아드렸더라면, 피곤한 몸을 일으켜서, 잠을 쫓으며 기도했지 않았겠습니까?
‘정신일도 하사불사성’이라는 말도 있듯이, 정신 차리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을 꼬집으면서라도 기도했다면,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신하지는 않았지 않았겠습니까? 주님의 권고의 말씀을 무시하고, 결국 잠만 자다가, 다 주님을 버리고 부인하고 마는 것입니다. 순교의 자리까지 같이 가겠다던 제자들은, 그만 기도하는 자리까지도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기도하지 못하여 신앙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혹을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빠집니다. 그래서 주님이 모범기도에서도,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두 단어, 즉 기도와 시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깨어 기도해야 합니까? 마귀를 대적하고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9절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마귀는 오늘도 굶주린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두루 다니며, 여러분을 넘어뜨리고, 교회를 훼방하려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면, 마귀에게 먹히기는 시간문제인 것입니다. 기도해야 대적할 능력을 얻습니다.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13절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 당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24절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왜 깨어 있어야 합니까?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생활하기 위해서,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로마서 13:11-12절입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깨어 있어 기도해야지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고, 재림을 준비할 수 있고, 미혹을 뿌리칠 수 있고,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고난의 파도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깨어 기도하였더라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였더라면,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도망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13:2)고 했습니다.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으니,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도의 동산에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에 빠지게 되고, 스스로 파멸에 이른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 생각을 지배하려고,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고 다니는데, 기도하지 않는 대상을 찾고 다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타겟으로하여, 유혹을 하면, 십중팔구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가정을 파괴하고, 그런 사람을 통하여 교회공동체 전체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영국의 설교자 스펄젼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면 많이 은혜 받고, 적게 기도하면 적게 은혜 받고,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만 닥쳐온다.” 기왕이면 우리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많이 기도하여 많이 은혜 받을지언정, 기도하지 않음으로 시험에 빠지는 자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동일한 기도를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습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는데도, 여전히 쿨쿨 잠만 잤다면, 이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되는데 그 시간을 놓쳐버리면, 다가오는 것은 시험뿐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잠자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마26:45)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실망한 나머지, 이제는 기도할 기회를 놓쳤으니, 자고 쉬라고 한 것입니다. ‘나로서는 너희들이 이제는, 무한정 자고 쉬어도 상관치 않겠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의 주의 깊은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Bruce). 그리고 이제 나는 때가 되어, 죄인의 손에 팔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팔려가는 이 시간은, 기도할 때가 아니라, 그를 체포 하려 온 죄인들을, 맞이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결론
주님은 이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었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할 수 있었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주님의 기도를 들으사,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뜻대로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을, 하나님이 들으사, 뜻대로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셨고, 진리요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기 위하여, 기도하신 주님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시고, 그 예수님을 높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히신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형편을 그대로 내어 놓고 기도하는데, 답답하고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토해 놓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기도하세요. 얼굴을 땅에 파묻고 엎드려 기도하시고, 땀이 나도록, 피가 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내 뜻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주님처럼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평소에 기도하세요. 기도하지 않으면 잠만 자고요, 잠자는 사람은, 시험에 들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시험에 드는 인생이 아니라, 많이 기도하여, 많이 은혜 받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기도하여,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많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