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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위에서의 주님의 기도 (누가복음 23:34-46)
이정현 목사 2015-02-15 추천 0 댓글 0 조회 969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로부터, 심문과 모진 채찍을 받으셨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은, 아침 일찍, 자신이 매달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약 800m에 이르는 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 길이 바로 비아 돌로로사, 곧 고난의 길입니다.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실 힘조차 없을 만큼, 기력이 쇠하셨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양손 양발에 커다란 대못을 받으시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으시고, 십자가 높이 달리시게 되었습니다.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장장 여섯 시간 동안,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물을 쏟으시며, 모진 수모와 멸시와 천대를 당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5-6)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하여, 주님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여섯 시간 동안, 모두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가상칠언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가상칠언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②‘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③‘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요19:26-27)

 

④‘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

 

⑤‘내가 목마르다.’(요19:28)

 

⑥‘다 이루었다.’(요19:30)

 

⑦‘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가상칠언의 순서를 보면, 주님은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해서,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마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상태에서도, 아버지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가 자기를 일시적으로 버리시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영원히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잠시 아들을 버리시는 것을 아셨던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7마디 말씀을, 순서대로 써 놓고 보니까, 주님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그의 생을 마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처음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는 기도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라는 기도입니다.

 

이제 십자가 위에서의 7마디 말씀 중에서, 주님의 기도를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고자합니다.

 

1. 주님은 고통 중에 절규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은 인류의 대속물로, 십자가 위에서 살을 찢고 피와 물을 쏟고 계시는데, 그 십자가 아래에서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가지려고 제비뽑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네 명의 군인이, 옷을 제비뽑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경하는 관리들과 백성들은 조롱하고 비웃으며, 자신을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며 예수님께 신포도주를 주며,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좌우에 달린 행악자 중 한명도,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비방하며 조롱합니다.

 

창조주이신 주님이 하찮은 피조물들로부터, 이런 수모와 멸시와 천대와 조롱을 받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 위에 달리신 것만 해도, 처참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끼시는데, 인간들로부터 이런 조롱과 멸시를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육적으로 심적으로 심한 고통 중에서, 주님은 절규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지금,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은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외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아들로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이니,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 같은 주님의 마음이, 다음의 두 마디 말씀에 잘 나타난다고 봅니다. 그 하나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막15:34)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정오 입니다. 해가 가장 밝을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예수님이 운명하신 오후 3시까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사방을 덮었습니다. 이 어둠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세 시간 동안의 어둠은, 우연히 발생한 일식(日蝕)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이 컴퓨터로 계산해본 결과, 그날 그 장소에는 일식이 발생할 수 없었습니다. 칼빈의 주석에 의하면, 그 세 시간 동안 예수님은, ‘지옥의 형벌을 경험하셨다.’고 했습니다. 저는 칼빈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어둠이 임했을 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경험하신 것과, 성경이 묘사하는 지옥의 상황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때문입니다.

 

둘째, 지옥은 캄캄한 곳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낯을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지옥은 목마른 곳입니다. 이것은 지옥이 뜨거운 불 못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지옥은 자비가 조금도 허용되지 않고, 극심한 고통만 있는 곳입니다. 이것은 지옥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 네 번째 말씀은,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누가 심판합니까? 공의의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누가 심판을 받습니까? 모든 죄인이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버리셨을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그 이유는, 지금 예수님이 모든 죄인을 대신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공의의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과, 예수님이 겪으신 목마름과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예수님을 버리셨습니까? 인류의 죄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의 인류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진노를, 십자가 위에서 남김없이 그 아들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낸 가장 잔악한 형벌입니다. 특히 유대인의 관점에서,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저주받은 자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린 아들을 향하여, 죄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이 정한 모든 저주를, 남김없이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속건제물과 화목제물이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죄인들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죄 사함은 결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대신 대가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버림받았기 때문에, 이제 죄인들은 버림받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를 외면하셨던 하나님은, 그 낯을 다시 우리에게 향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다시 밝은 해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는 다시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우리의 죄를 등 뒤로 던지셨다고 말하고, 또 깊은 바다에 던지셨다고 말합니다. 다시 찾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절규하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절규하시면서 기도하신 것은,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여기서의 ‘저들은’ 로마 군인일 수 있고, 유대인들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모든 인류일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바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죄 사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는,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한다고 암시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지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는, 죄인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위치에 계셨기 때문에, 주님은 내가 너희들의 죄를 사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 사함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십자가 밑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리어 예수님이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했다고, 그들 나름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모르고 지은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동일한 기도를 지금 하늘에 있는 지성소에서, 예수님께서 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미 죄 가운데에서 멸망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무지목매한 사람들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범하고 있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며,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하신, 주님을 본 받아, 동일한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중보기도는 남의 사정을 내 품에 안고, 그 사람의 영육적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보기도를 하는 사람은, 먼저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겨야 하고, 남의 억울함을 내 억울함으로 여겨야 하고, 그 사람의 비통한 심정을 나의 찢어지는 심장으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그 사람과 동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중보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보시고, 심판하겠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몇 번이나 엎드려 중보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의인 50명이 있으면, 그 의인과 함께 이 성을 멸하시겠습니까?’ ... 마지막에는 ‘의인 10명만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까지 합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간곡한 중보기도에도 불구하고, 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그의 조카 롯의 가정을 구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만 섬겨야 할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추고 뛰놀며 우상숭배를 하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두 돌 판을 집어던져 깨뜨리고 맙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을 징벌하고 난 후,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 앞에서, 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0-32).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일단 즉시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이나 모세의 중보기도는, 곧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셔서,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을, 그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고, 지금은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주님의 이 모습을 미리 보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12절에,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는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의 이 예언의 성취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첫 번째 기도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초대교회의 집사였던 스데반은, 주님의 이 기도를 본받아 실천한 사람입니다. 유대인들 앞에서 길게 설교를 한 이후, 그들이 던지는 돌맹이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그는 돌맹이를 던지는 사람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스데반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순교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중보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남편을 위한 아내의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술 먹고 도박하고 바람 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회개해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가정을 영적으로 잘 인도하지 못한 죄, 자녀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내 아내를 위한 남편의 중보기도도 필요합니다. 어머니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되어야 하는데, 가족을 위해 기도하지 못한 죄와, 자식들을 영적으로 기르지 못한 죄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보다 세상 공부를 우선시 하였던 죄와, 시댁어르신들을 잘 공경하지 못한 죄를 대신 회개해야 합니다,

 

또 어른들은 자식들의 죄를 용서ㅙ 달라고 기도하고, 아들딸들은 내 부모의 잘못을 위하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들을 위해 기도하되, 목사들의 부정과 비리의 죄, 사치와 낭비의 죄, 갑질한 죄,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지 못한 죄, 사명에 충성하지 못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이 나라 이 민족의 우상숭배의 죄와, 공의를 행하지 못한 것과, 조상숭배라는 민족적인 죄를 사하여 달라고 회개해야 합니다. 아울러 세계도처에서, 생명을 경시하는 사상과, 10계명을 어긴 죄들이 난무하고 있는데, 이런 사연들을 내 가슴에 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용서와 불쌍히 여겨달라고 중보기도 해야 합니다.

 

에스겔서 22장에 보면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정치인, 선지자, 제사장,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죄로 인하여 타락한 것입니다. 이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한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민족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중보기도자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여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무너진 데를 가로막아 설자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시며, 아버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남을 위하여 기도를 하되, 특별히(무엇보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눅23:46).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큰 소리로 하셨다는 것은, 그의 엄청난 의지력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고 운명하셨는데, 이것은 기절한 것도 아니고, 쑈하는 것도 아니라, 실제로 그 육체가 숨을 거두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고,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심으로,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조금 전에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아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잠시 버리셨던 것입니다. 이제 아들은 다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아버지께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아버지가 부탁하신 모든 일을 마친 아들은, 이제 마지막으로 그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 것입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순교하면서, 마지막으로 역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남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배운 스데반은, 동시에 내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하는 기도도 배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연과 역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유구히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매일 크고 작은 사건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잠언서 1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맡기는 것,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겨 버리라.”고 주님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의 의식주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식들의 장래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내가 계획해서 키우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자랄 수 있습니다. 결혼하고, 직장 갖고, 사업하는 것 모두를,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가면, ‘맡기지 않은 물건은 책임지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이 말은, ‘맡기면 책임을 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미래를 믿음으로 맡기면,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내가 경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경영해 주시면, 훨씬 더 풍요롭고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하지만,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왔을 때에도, 주님과 스데반처럼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입니다. 만약 진정으로 그럴 수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과 장소는, 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병상에서, 어떤 사람은 전쟁터에서, 어떤 사람은 사역현장에서,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또 어떤 사람은 불의의 사고로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품안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는 그날에,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고, 천국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숙제를 마친 아이는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듯이, 사명을 다한 사람은 고요히 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 손에, 그 영혼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결코 썩지 않는 영광과 생명의 면류관이, 그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멸시와 천대를 받는 가운데서 절규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라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중보기도와 의탁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이 기도를 본 받아서, 자기를 위한 기도도 많이 해야 하겠으나, 남의 영육의 유익을 위하여, 열심히 중보기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나와 가정과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선하게 처리해 주시고 인도해 달라고, 항상 하나님께 의탁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평생을 기도로 사셨던 예수님을 본 받아, 우리도 이 땅에서 기도로 늘 하나님과 교통하며, 은혜 중에 살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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