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변질’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변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의 형상, 성질 등의 특징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변질은, ‘사물이나 물질의 성질이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슷한 뜻의 단어라서, 서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각각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요즘 변화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분야 중의 하나가, 기후분야인데 여기에 ‘기후변화’라는 말을 씁니다. 이런 저런 요인으로 인해서, 옛날에 비해 현대의 기후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의 기후와 현제의 기후를 비교해보면, 확실히 많이 변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럴 때 사용하는 단어가 변화인데, 이 변화는 주로, 좋은 쪽으로 달라지는 것을 말할 때 많이 사용이 됩니다. 예)술고래-술을 입에도 안 데는 사람
그런데 여기에 반해 변질이라는 단어는, 안 좋은 쪽으로 변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의 변질을 말할 때 많이 사용이 됩니다. 우유, 소고기, 여름철의 생선 등 식품이,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는 것을 변질이라고 말합니다. 변질은 대부분, 나쁜 의미로 많이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예)술을 입에도 안 데던 사람-말술을 먹는 사람
사람을 두고도 ‘저 사람 많이 변화가 되었다’, 또는 ‘저 사람 많이 변질이 되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변화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삼손, 다윗 그리고 요나같은 사람이고, 신약성경에는 삭개오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변질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변질된 사람들도 나타나는데, 사울 왕, 가룟 유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배후에 다 마귀가 그들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근거로, 사단이 그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면 변질되는 사람이 되고, 성령이 그를 지배하면 변화되어 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사이는 이 두 단어를 많이 강조해서, 이런 말까지 합니다. ‘변해야 살지만, 변질되면 죽는다.’ 신앙인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이 변화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릴지언정, 변질되어 신앙에서 떠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은 더 좋은 믿음으로,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더 성숙한 사람으로, 더 좋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변화될지언정, 별질 되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이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느냐, 그렇지 않으면 변질의 단계로 나아가는지를 아는 각각의 중간 단계가 있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쪽으로 변화 되어 가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작은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기를 힘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정의를 통하여,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를 잘하는 사람은, 변화 쪽으로 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변질의 단계로 나아가는 사람은,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을 감추는 변장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도 없으면서 예배를 잘 드리는 척 하고요,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거룩한 척하고, 기도도 안하면서 기도하는 척하고요,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는 척 하고요, 믿지도 않으면서 체면 상 믿는 척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자기 변장이 많아지면, 사람은 바리새인처럼 변질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말세가 되면 될수록, 회개를 통하여 변화되어 가기보다는, 변장을 거듭하다가 변질되어 가는 사람이 많아질 것입니다. 우리는 변장도 변질도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믿음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고 봅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타락하였기 때문에, 가만히 두면 변질 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합니다.
23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시려면, 히브리서를 누구에게 썼으며, 그리고 왜 썼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누구인가? 유대인인가 아니면 유대교 기독교인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순한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교 기독교인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유대교 기독교인이란, 유대교였다가,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전체를 읽어보면, 유대교 기독교인들 중에, 자꾸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유대와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었는데, 바로 그들을 위하여 이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메시지는, ‘예수가 가장 우월하시다.’라는 메시지였기 때문에, 이 메시지를 구약을 근거로 구체적으로 전하면서, 아울러 그 예수를 굳게 믿고, 흔들림 없이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히브리서를 전체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중심내용을 살펴보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처음 부분은, 1장에서 10:18절까지로,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은 10:19절에서 마지막까지(13:25)인데, 여기서는 ‘믿음으로 살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아서, 유대교 기독교인들 중에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전하고, 이 믿음에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뒷부분에 속하는 말씀이니까, 전체적인 메시지는 믿음으로 살라는 권고의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데, 나름대로 어려움을 많이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 때문에 어려움과 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자꾸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믿음의 확고함을 위하여, 또는 신앙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권면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이들에게, 믿음의 변질을 우려한 적이 있습니다. 1장 끝부분과 2장 초반에 보면,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기억하고, 경계하지 않고 방심한다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의 핍박이나, 다른 압력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떠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1:13-2:4). 그리고 또 6장에서도, ‘위장과 변질의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하지만 너희들은, 그렇지 않을 것을 믿는다.’(6:9)는 말씀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미 몇몇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의 변장과 변질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 저자는 이 같은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의 상황 중에서도, ‘믿는 도리를 굳게 붙잡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는 앞에서도 몇 번 반복 강조한, 동일한 메시지입니다(3:6, 14, 4:14).
그러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앞에서도, 계속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보다 우월하시다, 그리스도는, 민족의 지도자였던 모세보다 우월하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안식을 준 여호수아보다 우월하시다, 그리스도는 천사보다 우월하시고, 그리스도는 대제사장보다 우월하신 분이시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믿음의 도리를,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굳게 잡으라’는 말 속에는, 이미 너희들이 잡은 것이, 최상의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유대교에서 믿었던, 또는 불신 세계에서 이 믿음을 가졌던, ‘잘 선택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유대교보다 더 좋은 선택이 아니라, 최상의 선택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 선택은 유대교와 또는 이방종교와 비교하여 볼 때, 좀 더 나은 종교나, 좀 더 좋은 신앙이 아니라, 가장 좋은 신앙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는 도리를 best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움직이지 말고, 이탈하지 말고, 이것을 굳게 잡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이가 미쁘시니, 너희도 그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는 너희도, 당연히 신실하게 이 신앙을 붙잡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히브리서의 독자들처럼, 혹시 신앙이 위선적이거나, 더 나아가서 신앙을 포기하거나 중단하고 싶을 때나, 옛날 종교로 되돌아가고픈 때가, 없지 않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더더구나 신앙 때문에 환란과 핍박을 받고, 어렵고 힘든 일이 자꾸 생기면, 그런 생각을 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이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음으로, 이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살아라.’ ‘이것이 최상의 선택임으로, 더 이상 좋은 것은 없다.’ ‘여기서 중단하거나 포기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성령께서 끝까지 나를 견인해 가실 것이다.’ 이 믿음의 도리를 흔들리지 말고, 꽉 붙잡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24절의 말씀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신자들끼리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신자는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또한 교회는 혼자를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무리입니다. 단체이고 공동체이며 예수를 믿는 여러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구석에 쳐 박혀서, 외톨이로 살아가는 것 아닙니다.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들어가,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 아닙니다. 서로 돌아보며 살아야 합니다. 서로 교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형제자매들에게 어려움은 없는지, 힘든 일은 없는지, 낙심하고 좌절스러운 일은 없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먹을 것은 있는지, 신앙 때문에 갈등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는지, 가족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은 없는지, 서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살펴보되 흠 잡고 비판하고 험담하기 위하여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도와주고 사랑하기 위하여 살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과, 나눔과 섬김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이 말은 서로 사랑하고 선행에 힘써야 된다는 말도 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자들에게 ‘잘한다’고 칭찬하고 격려하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선행에 힘쓰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격려하다’는 말은, ‘강하게 자극하다’, ‘각성시키다’, ‘폭동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다’라는 뜻입니다. 굉장히 역동적인 단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감정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별로 좋지 않은 감정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을 격려함으로, 강하게 자극하여 그런 마음과 행동이 불일 듯 일어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는 자기희생을 감수하며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더 열심히 하라고 더 잘하라고 강하게 자극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선행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더 잘하고 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의 말 한마디로, 상대방이 격려를 받고 자극을 받아 각성을 한다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소망교회 성도들은 서로 물고 떧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 불평하고, 말로 상처주고 남의 험담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일날 많은 사람들이, 선물도 주고 꽃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 가운데 어떤 아이가, 쪽지에다가 이런 편지를 써 주었는데, ‘목사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저희 소망교회를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배곧에 가서도 잘 이끌어 주세요. 목사님 힘드시지요. 힘내세요. 제가 기도하겠습니다...’ 이 같은 어린 아이들의 격려로, 저의 느슨해진 마음을 가다듬기도 하고, 또 낙심했다가 힘을 얻기도 합니다.
신앙이 변질되지 않으려면,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돌과 돌을 부딪치면 불이 나듯이,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하면, 그것이 더 불일 듯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과 철이 부딪히면, 더욱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듯이, 사랑과 선행도 서로 격려하면, 더욱더 단단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3. 신앙이 변질되지 않으려면, 더 자주 모여야 합니다.
25절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말하는 것 보니까, 이미 몇몇 다른 교회에 이런 현상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모임을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이런 것은, 이기적이며 개인주의적인 행동으로 옳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교회가 있으면 당연히, 다른 교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모임을 폐하는 이런 사람들의 습관을 따르지 말라고 하면서, 더 자주 모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왜 자주 모여야 합니까? 자주 모여서 예배드리라고, 은혜 받으라고, 기도하라고, 주 안에서 교제하라고 모이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지금보다 더 자주 모이면,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신앙의 변질을 막을 수 있고, 오히려 신앙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요사이 예배학 안에서, ‘사이버 워십’(cyber worship)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가상공간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주일이나 수요일 금요일, 심지어 새벽에도 교회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 날 때 컴퓨터만 켜면, 언제든지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고, 계좌로 헌금 붙여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거동작을 할 수 없는 환자들이나, 먼 외국으로 출장을 간 사람들에게, 이 사이버 예배는 괜찮다고 봅니다. 하지만 예배당이 있고, 몸도 건강하고 집도 가까운데도, 굳이 사이버 워십을 고집한다는 것은, 바로 본문의 말씀을 위반하는 것이 됩니다.
사이버 워십은 모이기를 폐하는 것의 일종입니다. 이런 것을 비롯하여 그 외, 개인적인 일이나 양가의 일 때문에, 예배와 교육 모임에 빠지는 것도, 일종의 모이기를 폐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거나, 봉사와 전도 모임을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보다, 육적인 일들을 앞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세에 가장 심각한 현상이,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를 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일로인하여, 신앙생활에 고통과 어려움이 더 심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어도, 더욱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죽음을 무릎 쓰고, 모여서 말씀을 듣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들은 핍박 중에도, 날마다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고, 또한 집에 모여서 떡을 떼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이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정말로 신앙이 변질되지 않으려면, 그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더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결론
주일을 잘 지키던 사람이, 이제는 주일을 잘 빼 먹습니다.
십일조를 온전히 하던 사람이, 이제는 십일조를 대충합니다.
예배를 사모하여 모든 예배에 나오던 사람이, 이제 일주일에 한 번만 나옵니다.
새벽기도도 잘 나오던 사람이, 이제는 정기기도회만 간신히 나와서, 기도는 안하고 예배만 마치면 갑니다.
모든 모임에 적극적이던 사람이(구역, 예배, 기도, 전도, 교육, 친교, 회의, 봉사), 이제는 시들시들해 졌습니다. 연락하고 강권해야, 마지못해서 겨우 한두 번 참여합니다.
식당 봉사, 청소 봉사, 예배 위원 봉사, 각부 봉사, 차량 봉사도 1년에 한 번도 안 빠지는 사람이, 이제는 시키면 싫어하고, 일을 핑계로 거절하기도 합니다.
사명의 자리-교사, 찬양대원, 인도자, 구역장-에서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그만 하겠다고, 쉬겠다고, 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성경도 하루에 3-5장씩 꼬박 꼬박 읽고, 묵상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더니, 이제는 성경 책에 먼지가 소복히 쌓였습니다.
가정과 회사에서 믿는 사람답게 살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더니, 이제는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신앙의 변질을 막으려면, 여러분이 믿는 도리를 확인하시고, 그것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최상의 진리입니다. 흔들릴 필요가 없고, 다른데 기웃기웃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사랑과 선행을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원망불평, 시기질투하지 마시고, 잘했다고, 수고하셨다고, 더 열심히 하자고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교회외의 모임은 참여하지 마세요. 굳이 참여하려면 교회의 허락을 받고 하십시오. 신앙생활은 본 교회 중심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모임에만 열심히 해도, 충분히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습니다. ‘모이’-그러면, ‘싸게 싸게 오시기 바랍니다.’ 모임 중에 하나님이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신앙이 변질되지 말고, 믿음이 더 좋은 쪽으로 변화가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칭찬과 인정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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