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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 하나님의 영광 (고린도전서 10:31-33)
이정현 목사 2015-05-24 추천 0 댓글 0 조회 683

바울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당파 문제, 패륜문제, 소송문제, 결혼문제, 우상의 제물문제, 집회에 있어서 여자가 수건 쓰는 것, 성찬에 관한 문제, 성령의 은사문제, 또 부활문제 등등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이런 문제들이 바울의 마음을 오랫동안 괴롭혔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과 밀접하게 관계된 문제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느냐, 먹을 수 없느냐의 문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헬라의 다신교의 영향으로 신전들이 많았습니다. 자료에의하면 큰 신전이 무려 10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매일 매시간 드려지는 우상의 제물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입니다. 신전에서 그 제물을 다 소비하지 못해서, 그것을 시장에다 내다 팔았고, 고린도 시민들은 그 고기를 사서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 사람이, 시장에서 그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고, 또 다른 집에 가서 음식을 대접 받을 때나, 시장에서 밥을 사 먹을 때, 이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인 것을 알면서도, 먹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문제입니다. 그 고기를 먹게 되면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이 되고, 곧 죄를 짓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우상숭배와 같다고 생각하여 그 음식을 거부했고, 혹자는 식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먹어도 상관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하여 교회가 편안하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립니까?

 

바울은 전자를 믿음이 약한 자라고 하고, 후자를 강한 자라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음식을 거부한 사람은 아직 믿음의 수준이 약한 사람이고,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 사람은 믿음이 강한자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그런 고기라할지라도 먹을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양심에 거리낌이 되면, 남의 양심을 위해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본문에서, 이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문제 해결의 초점을, ‘하나님의 영광’에 두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상의 제물을 안 먹는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먹는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좀 더 확장적인 의미로 해석해서,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다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마이크도 존재 목적이 있고, 이 지지대, 방송실에 있는 엠프도, 믹스기와 천장에 달려있는 스피커도 각각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또한 하늘과 땅도 그 존재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9편에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 내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존재 목적이 있어서, 그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높은 목적이 있겠습니까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의 첫 번째 질문에서, ‘사람의 첫째 되고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사람이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린다는 의미가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하라’고 명령하고 있음으로, 우리는 이 명령을 잘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범사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삶의 범위는, 범사입니다. 다입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무엇을 하든, 직장생활을 하든,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무엇을 하든지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그 생활의 목표와 중심을 따라, 인간의 질과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돈을 목표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이해타산에서 움직입니다. 명예를 탐하는 사람은 명예 때문에 삽니다. 그 외 향락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도 있고, 혹은 권력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이런 사람들의 삶의 가치는, 결코 귀하거나 가치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신자는 마땅히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 지식과 내 능력으로 자신의 이해와 욕망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기독인들의 삶은 매사에 하나님을 앞세우고, 그의 영광을 앞세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면 하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하기 어렵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가령 우주의 태양계를 생각해 보십시다. 광대한 태양계의 체계에서, 지구를 위시하여 위성들은 광활한 우주 공간을 돌고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하여 일정한 궤도를 일정한 시간에 돌고 있는 것입니다.?그것은 거의 무한이라 할 수 있는 광대성과, 시계침 이상으로 엄격한 정밀성에 통제되는 운행입니다. 어떻게 이 태양계의 놀라운 질서가 가능한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태양계의 별들이 모두,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막강한 인력에 이끌려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광활한 넓은 우주공간의 수많은 천체들이, 조화롭게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 모든 것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스포츠, 여가생활 등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이 되면, 내 자신이 질서와 안정과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중세 1000년 동안의 종교적 부패성을 과감히 개혁하면서, 이런 슬로건을 내 걸었습니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루터는 사람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평생 동안 이 목적을 위해 삶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터에서 일하던,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에게 ‘왜 일하느냐’고 물었더니, ‘죽지 못해 일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에게 물었더니, ‘돈을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사람에게 물었더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사람은 비관론자입니다. 둘째 사람은 비관도 낙관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셋째 사람은 낙관론자 이상입니다. 그는 생의 뚜렷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둔 사람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생활할 때,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부부싸움을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남의 험담하고 거짓을 말하고 원망불평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신자들이 술 먹고 담배피우고 허랑방탕하게 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주일에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고 학원에 보내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양가의 무슨 일이 있다고, 또는 회사에 출근해야 된다고, 수시로 주일을 빼먹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아깝다고 11조는 때어먹으면서 자기를 위해서는 흥청망청 돈을 쓴다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형식적으로 앉아서 예배하고, 감동과 열정 없이 찬송하고, 의미 없이 기도하고, 감사도 없이 헌금하고, 마지못해 억지로 부엌에서 봉사하고, 차량봉사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을 다 알고는 있지만, 실천이 안 된다고요? 결심하시고 성령님의 도움을 간청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소망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성령님의 크신 능력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동안 모든 성도들이, 사방팔방 각각 흩어져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고 살아야 합니다. 역대상 16장 28-29절 말씀에 다윗 왕이 “여러 나라의 종족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을 가지고 가장 좋은 것으로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며 예물도 드리고,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늘의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앞에 마땅히 영광을 돌려야함에도 불구하고,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됩니까? 사도행전 12장 22-23절 말씀을 보면, 헤롯 왕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헤롯 왕의 연설을 들은 유대 사람들은, 그에게 아부하고 잘 보이기 위해 큰 소리로,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외쳤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헤롯은, 그만 자신이 사람이 아닌 신이라는 교만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셔서 치니, 곧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자기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통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려야함에도, 그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죽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든지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권력을 치십니다. 재물을 가지고 영광 돌리지 않으면, 그 재물을 치십니다. 재능을 가지고 영광 돌리지 않으면, 그 재능을 치십니다.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시고, 은사를 주셨는데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거두어가십니다. 온 우주와 하늘,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요, 심판자도 하나님이요, 영광 받으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까?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시 22:23), 믿음을 가지고 영광을 돌리고(롬 4:20-23), 몸으로 영광을 돌리고(고전 6:20),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영광을 돌리고(고후 1:20), 예물을 드려 영광을 돌리고(고후 9:13), 하나님께 봉사하면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충성함을 통해서,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벧전 4:11).

 

영국의 청교도 소설가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왜 인생이 기쁨이 없는가에 대해, “성도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늘의 기쁨을 주신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 인생은 기쁘고 만족하고, 풍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의 삶 가운데 하나가, 남들 앞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3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남들 앞에 돌맹이를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죄의 기회를 제공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 앞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본문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전 인류를 이렇게 분류하였는데, 자기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고, 그 외의 모든 사람은 천벌 받을 이방인으로 여겼고, 여기에 이제 예수 믿는 성도들이 생겨나서 이들을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이방인, 교회라는 말은, 모든 이웃들을 표현한 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은, 너희 모든 이웃들에게, 거치는 돌부리를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말씀은, 말과 행동을 잘못하여 이웃들의 방해꾼, 훼방꾼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신앙생활을 방해하거나, 시험에 들게하거나, 고통을 주거나,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인해, 초신자가 상처를 받고 교회를 안 나오기도 합니다.

 

교회 버스를 타고 오는데, 늦지도 않았는데, 처음으로 교회 버스를 타고 오는 사람에게, ‘당신 때문에 우리가 늦었다.’고...결국 그 사람은 이 말에 낙심이 되어서 교회 나오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으로 애기를 데리고 교회 버스를 타고 교회에 오는데, 얼마나 기특하고 이쁘고 귀합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보고 자기는 내리기 좋은 앞에 딱 버티고 앉아 있으면서, 애기 엄마보고 귀찮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어른이라고, ‘못 보던 사람이네, 애기 엄마 안으로 들어가’-그러면 그 사람이 계속 교회 나올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교회 나온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자기 앞에 새치기를 해서 들어옵니다. 자기가 먼저 먹겠다고, 자기가 바쁘다고 밀치고 들어와서 밥을 먹는데, 거기에 또 ‘밥이 왜이러니, 반찬이 부실하니, 맛이 없다.’고 불평을 한다면, 초신자가 볼 때 교회는 사회보다도 더 예의가 없고 못한 곳이구나-이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18장 6절 말씀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도 실족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가 될지언정, 실족케 하거나 해를 끼치는, 거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 꾼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방해꾼’으로 교회에서 무엇을 하려고만 하면 방해를 합니다. 새벽기도를 나오라고 하면, 투덜거리며 새벽기도를 누가 만들었냐고 불평을 합니다. 경기도 어려운데 예배당은 왜 짓느냐고 말하면서, 부정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는 ‘구경꾼’으로 교회에 나와서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모든 일에 뒷짐지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셋째는 ‘일꾼’입니다. 누가 보든 안보든 알아주던 안 알아주든, 주님만 바라보고 땀 흘려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세 가지 꾼 중 어디에 속하십니까? 일꾼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삯이 있습니다. 그러나 구경꾼과 방해꾼은 아무것도 생기는 것이 없습니다. 구경꾼들에게 잘했다고 상 주는법이 있습니까? 방해꾼에게 수고했다고 칭찬하는 법이 있습니까? 구경꾼은 아무리 열심히 구경을 해도 그에게 삯을 주지 않으며, 방해꾼은 오히려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방해꾼이나 구경꾼이 되지 마시고, 다시 말해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칭찬과 상 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2절 말씀은 소극적인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라면, 적극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33절에 나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기적이지 않으며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의 삶의 간증을 통하여, 기독교인의 이타적인 삶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는 자기의 출세,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산 사람이었으나,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는 완전히 바뀌어서, 오로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또한 타인을 위해서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자기의 기쁨과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았던 모범된 성도였습니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미국의 오래된 전통을 가진 명문 고등학교 필립스 아카데미는,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유명인사의 자녀들이 들어가기 위해, 심한 경쟁을 치루는 곳입니다. 그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다른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보다, 백만장자가 더 많이 생기고,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그 학교는, 이념이 투철하여 학생들에게 확실하게 교육시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778년 설립되어 230년 이상 전통을 지키는 그 학교의 이념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입니다. 그 학교의 설립자 사무엘 필립스와 존 필립스가, 지도자가 잘못되면 나라가 잘못되니까 훌륭한 지도자를 만들자 하여, 오늘 본문의 성경을 읽다가, 이 말씀에 영감을 받아 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결국 이 학교 졸업생들은 공부를 하든, 사업을 하든, 결혼을 하든 나 자신보다 지역사회,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다보니까, 다른 어느 학교의 졸업생들보다, 유명 인사나 백만장자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도, 남을 기쁘게 하고 남에게 유익을 끼치며 사는, 사람들이 되셔서, 모쪼록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살기면 하면, 내 삶을 보고, 구원 받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나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의사로 개인병원을 차렸는데 집에 돌아와서 하루 일과를 마치면 매일 진료비를 계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렵게 고학을 해서 의사가 되게 하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돈을 벌게 해 주셔셔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날도 똑같이 하루의 수입을 계산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에 들려 왔습니다. “내가 너를 의사로 만든 것이, 환자들의 진료카드를 보며 돈이나 계산하기 위해서인 줄 아느냐? 내가 너를 의사로 만든 것은, 환자들의 영혼을 돌보기 위함이다. 환자가 가져오는 돈보다도, 그 환자들의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내가 너를 의사로 만든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수입에만 관심을 가졌고, 돈 잘 벌게 해 주신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했었는데, 하나님이 이 자리에 앉혀주신 목적이 다른데 있었군요.” 그 다음부터는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에게, 진찰을 하고 처방을 해 주고 나서는, “당신은 행복합니까? 당신은 교회 나갑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하며 전도하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고민과 문제점을 물어보고 해결하기 위해 상담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병원에는 더 많은 환자들이 모여들어, 점점 더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친절하다고 소문이 나고, 사랑을 베푸는 의사라고 소문이 나서, 작았던 개인병원이 종합병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환자들이 가져오는 돈이 중요합니까? 자기에게 찾아오는 그들의 영혼이 더 중요합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고,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사니까, 하나님이 이런 은혜와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치관을 조금만 바꾸고, 우선순위를 조금만 바꾼다면, 실패자가 되지 않고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사람이 되지 않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영향을 끼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이 복 받기 위해 신앙생활 하는 것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을 드러내기 위한 인생이 아닙니다. 기독신자들이 자기 유익만을 위해 살 때, 교회는 끝장입니다. 빛을 잃어버립니다. 짠 맛을 잃어버립니다. 신자들이 자기 유익만을 위해 살 때, 뭇사람들한테 짓밟힙니다. 주님은 그런 신자들 때문에 욕을 얻어 먹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내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 갈 인생이 불쌍해서, 이웃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함께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웃들을 사랑으로 권면을 합니까? 내 유익을 위해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길(생명의 길) 가게 하기 위해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웃을 위해 중보기도를 합니까? 이것 또한 내 유익을 위해 중보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불쌍하고 딱해서, 그 사람의 마음으로 그 사람의 영육적 유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 합니까? 만약 내 유익을 위해 구제한다면 그것은 자선사업가일 수 있지만, 기독교인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들의 전도, 권면, 중보기도 그리고 구제 등등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남을 기쁘게 해 주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존재가 기독교인이며 교회라는 말입니다.? 

날마다 부족한 것을 통하여 원망하는 사람들은, 이타적인 삶이 불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내가 이웃을 위해 줄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줄 만 한 게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살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습니까? 따듯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 주면 됩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해주면 되잖아요? 위로의 말 한 마디 따뜻하게 해주면 되잖아요? 차 한 잔 대접해주면 되잖아요? 칭찬해주면 되잖아요? 한번 배려해 주면 됩니다. 한번 심부름해 주고 도와주면 됩니다. 엘리베이트 안에서 반가운 얼굴로 먼저 인사하면 됩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것입니다. 이웃을 감싸주고 용서해주고 위해주고 세워주면 되잖아요? 이 같은 작은 것부터, 이웃의 유익과 기쁨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결론

요즘 기독교 신자들 중에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아이의 이름을, ‘하영’이라고 짓는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가 그 이름에다가 소원을 담은 것입니다. 이 아이가 평생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의 목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회사 이름을 ‘하영기업’이라고 짓는 사람도 있음을 봅니다. 이처럼 하영이라는 이름이 하나 둘 생기다 보니까, 이제는 식상하다고 다른 이름을 개발해 냈는데, 그 이름이 ‘예영’이, 그리고 ‘주영’이라는 이름입니다. 그 의미는 전부 동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이름을 지어 놓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살면 다행인데, 하영기업에서 불법을 행하고 장부를 조작하고 뇌물을 주고 세금을 포탈하고, 그래서 나쁜 소문이 자자하고, 신문과 뉴스에 오르내리면, 이 기업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실추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이름을 가진 사람은 물론, 다른 평범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도, 우리 모두는 성도임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의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선생님은,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교회에서, 교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스코틀랜드 가곡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것을 듣고, 거기에 맞는 곡을 작곡하여 애국가를 완성해야겠다고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면서, 애국가를 완성시키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조국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애국가를 만들어 조국에 바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한 끝에, 마침내 애국가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그 애국가를 가르치고 부르게 하였습니다. 애국가를 부르는 사람마다 곡이 훌륭하다고 격찬하였고, 그때마다?그는 “애국가는 내가 작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감을 주셔서, 우리 조국 백성들에게 전달했을 뿐입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안익태 선생님처럼, 바울처럼, 루터처럼, 다른 사람에게 거침돌이 되지 말고, 모든 일에 다른 사람을 기쁘고 하고 유익하게 함으로, 범사에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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