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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만이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마태복음 5:13-16)
이정현 목사 2015-05-31 추천 0 댓글 0 조회 415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자동온도조절기와 같았다.” 이 세상의 적정 온도가 60도이어야 한다면, 세상의 온도가 60도 이상 올라갈 때가 있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이 식혀서 정상 온도로 맞춰 놓고, 세상의 온도가 60도 이하로 내려가면, 교인들이 가동되어서, 그 온도를 적당하게 올려놓았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교인들 때문에, 사회가 타락하거나 부패하지 않고 바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킹 목사님이 말하기를, ‘요즘 교인들은 온도를 가리켜 주기는 하지만, 조절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자동온도조절기의 기능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지적입니다. 제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지금 이 시대는,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살았던 그 시대보다 더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온도를 조절하는 능력은 두 번째 치고, 온도를 제대로 가리켜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자동온도조절기가 아예 고장 나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고장 난 자동온도조절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세상 사람이 하는 대로 다 따라가고, 그러면서 세상의 것들이 어색하지도 않고 익숙해져 살아갑니다. 교인들이 사회에 같이 동화되었기 때문에, 세상이 몇 도인지, 심지어 자신이 몇 도인지도, 몇도 이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단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 곳곳에, 교회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곳곳에 교회가 그렇게 많은데도 사회는 살맛이 없고,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밝아져야 하고, 온도조절기가 사회의 곳곳에 있으면, 세상이 정상 온도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이상한 게, 교회는 많아지는데 세상은 자꾸만 타락해가고 어두워져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실망한 적이 많다고 이야기 합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한다고, 더 못 됐다고, 더 악하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듣기에 좀 거북하고 기분이 언짢은 얘기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할 것은 새기고, 정신 차려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은 주님이 산상 수훈을 통하여 주신 말씀 중,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는 말씀을 살펴봄으로 은혜 받고자 합니다. 잘 아는 말씀으로 정말 이 시대, 우리에게 꼭 필요 적절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모함으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들으심으로, 은혜와 깨달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1. 본문은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1절-“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이들에게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앉아 있는데, 그 가운데 제자들이 주님 앞에 나오자,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제자들을 13절과 14절에서, ‘너희’라는 말로 받아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의 말씀은, 주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이차적으로 산에 모인 모든 무리들에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말씀의 일차적인 대상은, 주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제자들을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애쓰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고 봅니다. 곧 저와 여러분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당시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만이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면, 오늘은 우리보고 너희만이 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보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이 맛을 잃었기 때문에, 결코 소금이 될 수 없고, 세상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이 어두움이기 때문에 결코 빛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진실로 믿는 우리보고, 너희만이 지금 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두움의 자식이고 마귀의 자식이지만, 우리는 빛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긍휼을 얻지 못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옥의 불 못에 던져질 것이지만, 우리는 천국을 유업으로 이을 하늘나라 시민권자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한마디로 놀랍게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로열 페밀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천국 시민권자에게 주신, 천국 시민 헌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노블레스라는 말은 ‘닭의 벼슬’을 의미하고, 오블리주는 ‘달걀의 노른자’를 말합니다. 이 두 낱말이 합해져서, ‘닭의 사명은 자기의 벼슬을 자랑하는데 있지 않고, 알을 낳는데 있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프랑스어로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라는 뜻입니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특권계층의 솔선수범을 얘기하고 있다고 봅니다.

 

여러분 로마제국은, 역사상 가장 강한 나라였고, 가장 생명력이 긴 나라였습니다. 2000년의 역사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로마만큼 역사적으로 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로마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로마 왕국은, 귀족들이 평민보다 앞서서 솔선수범하고,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져나갔습니다. 포에니 전쟁 때입니다. 전쟁을 하면 돈이 많이 필요하니까, 원로원의 의원들이 자기의 수레에다가, 돈을 가득 실어서 나라에 갖다 바쳤습니다. 이것을 본 평민들도, 앞 다투어 세금을 바쳤다고 합니다.

 

또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하여 나라의 국고가 바닥이 났을 때, 국채를 발행했는데, 이 국채는 전쟁에서 지게 되면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로원의 의원들과 정부 관료직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구입 했습니다. 평민들에게는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사람들이 국채를 매입하여, 나라의 재정을 메꾸어 나갔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의 지도층들은, 먼저 전쟁터에 나가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로마의 전쟁이야기를 보면, 원로원 의원들이 전쟁에 대하여 의논을 하다가, 이번 전쟁에 누가 선두에 서서 싸우겠는가라고 물으면, 앞 다투어 ‘내가 가겠다.’고 했답니다. 그러면 한결같이, 함께 있던 사람들이, ‘나도 나가겠다.’고 말했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도 전쟁터에 함께 출전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특권층의 사람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해야 할 칙임과 의무를 다함으로, 국가를 튼튼하게 해 나갔다는 말입니다.

 

왜 이 말을 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써(로열 페밀리로써), 이 세상에서 솔선수범하여, 기독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금이요 빛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너희만이 이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의 역할은?(1)음식의 맛을 내게 합니다. (2)소금은 방부제로 사용이 됩니다.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3)소금은 잡초를 죽이고 토양을 비옥케 하는 비료로 사용이 되기도 합니다. (4)소금은 상처를 치료하는 역할도 합니다. (5)소금은 불의 촉매로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같은 소금의 역할들을 볼 때, 우리의 생활 가운데 소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소금이 귀하기 때문에, 월급으로도 받았습니다. “나는 궁전의 소금을 먹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궁전에서 왕과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급료를 받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소금을 영어로 솔트(salt)라고 하고, 급료(월급)을 샐러리(salary)라고 하는데, 이 두 단어의 어원이 같습니다. 또 옛말에 “우리는 소금 한 됫박은 같이 먹었을 거야”라는 말은, “우리는 오래된 절친한 친구 사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소금은, 구약 제사제도에 있어서 필요한 물건으로, 제물에 소금을 치고 변하지 않는 언약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언약의 소금’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관계는, 변함없는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소금에 절인 사람같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의 소금은, 지혜롭고 총명하고 겸손하고 현명한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은, 너희가 세상에서 그처럼 소중한 존재들이니, 소금으로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인 세상에서, 자신을 녹이며 그 자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뜻입니다. 소금이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려면, 자신의 몸을 녹여야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자기를 녹여 그들 속에 스며들지 않으면, 맛을 낼 수도 부패를 방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안동에 가면 안동의 명물 간 고등어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60년 전, 교통이 발달하기 전에, 바다에서 잡은 생선이 먼 안동까지 오려면, 1박2일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동해에서 잡은 고등어를 안동까지 운반하려면 상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안동에서는 싱싱한 고기를 먹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등어가 상하기 전에, 배를 따고 소금으로 간을 하고 절여서, 먼 곳까지 이송을 하고 보관하여, 고등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소금에 절인 안동의 간 고등어입니다. 옛날 서민들의 밥상에 간 고등어는, 귀한 반찬이었습니다. 

소금이 아니면, 부패해가는 고등어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냉동 탑차가 많이 개발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싱싱한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소금은 필수적입니다. 인간의 몸에 필요한 하루 최저 소금 섭취량은, 10-15g 정도라고 합니다. 만일 이 정도의 소금이 매일 공급되지 않으면, 내 몸의 노폐물이 밖으로 배설되지 못해, 병이 생기는 것은 물론,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도 이처럼 매일 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닷물은 대단히 짭니다. 그런데 그 바닷물에 함유되어 있는 소금 함량은, 고작 3.4%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소금이 3.4%만 있어도, 바닷물은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기독교라는 소금이 20-25%가 되는데도, 한국 사회가 타락하고 맛을 잃고 썩어만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가진 소금의 농도가 너무 옅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예 소금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25%가 정말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사회가 부패하지 않을 것이지만, 심하게 부패하여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보면, 소금이 아니든지, 그것도 아니면 소금의 맛을 완전히 잃었다는 반증이라는 것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여러분 맛 잃은 소금을 보셨습니까? 이스라엘에는 소금 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소금을 캐서 조각을 맛보면, 대부분 맛이 없습니다. 소금은 소금인데도 맛을 잃어 버렸습니다. 이런 소금은 아무짝에도 쓸 수 없어, 밖에 버립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맛 잃은 소금을 보았습니다. 대하 소금구이 집에 가면, 가스 불을 피우고 그 위에 뚜껑이 있는 넓다란 냄비를 얹어놓고, 냄비 안에다가 호일을 펴고, 굵은 소금을 깔고, 그 위에 생 대하를 얹어서 구워 먹습니다. 대하 소금구이가 별미로 맛이 있습니다. 맛있게 새우구이를 먹고 난 이후에, 새우구이에 사용한 그 소금을 입에 넣고 맛을 보세요. 그것이 바로 아무 맛도 없는, 맛 잃은 소금입니다. 주인은 그것을 모아다가 길바닥에 뿌려버립니다. 사람들이 오가며 그 소금을 밟고 다니는 것입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데도 쓸 데가 없습니다. 기독교인이(하나님의 성도들이),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면(그 맛을 잃어버리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마무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밖에 버려져 이 사람 저 사람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맛 잃은 성도 맛 잃은 교회가 되면 이런 꼴을 당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추앙받는 간디가, 예수를 믿을 뻔한 사람이었습니다. 간디는 독실한 예수 숭배자이면서도, 정작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창했던 무저항주의도, 예수님께 배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숭배하면서, 왜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이 질문에 간디는,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그가 예수는 좋다고 하면서도 교회에 안 나가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영국 유학 시절에, 그의 친구 중에 선교사가 있었는데, 간디는 이 선교사와 매우 친했고, 그에게 전도 받고, 설교도 듣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디가 그 친구의 권유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어느 주일 날 교회에 나갔는데, 그 교회의 안내위원들이 간디를 보더니, 피부가 검은 유색인종이라고 우리 교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아마 그 교회가 백인 우월주의에 빠진, 인종차별주의 교회였나 봅니다.

 

그 이후로 간디는, 이때의 상처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교회와 그 교회 교인들은, 맛 잃은 소금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때 이 교회에서, 간디를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맞아주고, 차별 없이 대했다면, 간디가 예수를 믿게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오늘날 힌두교를 믿는 13억의 인도인들이, 간디를 따라 기독교로 개종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맛 잃은 소금은 부패를 방지할 수도 없고,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을 뿐입니다.  

 

3. 너희만이 이 세상의 빛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지만, 본래 빛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1장에,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빛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빛으로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만이 이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

 이 참 빛 되신 예수님을 믿으면, 믿는 자가 빛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바울이 예배소서 5장 8절에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빛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어두움은 마귀요, 죽음이요, 세상이요, 무질서와 혼돈이고, 사람의 악한행위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이런 어두움을 물리치는 것이 빛의 역할입니다.

 

또한 빛에는 따듯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빛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빛이 있어야 모든 동식물들이 성장하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마찬가지로 이 빛도, 우리에게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음과 동시에, 너희의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빛이라는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말씀하심과, 아울러 빛으로의 역할과 행동을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라는 말씀에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1서 1:7)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어서,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요한 1서 2:9)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목적과 신자들이 세상에 있는 목적이, 바로 착한 일을 들어내기 위함입니다.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의 이름으로 병을 고쳐주고, 상처 입은 자들의 상처를 싸매주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위로가 필요한 자들에게 위로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 바로 착한 일이었습니다. “저가 두루 다니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할찌니라”(갈 6:10).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도, 결국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는데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여러분! 차범근 축구선수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축구를 할 때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기도를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축구 선진국에 와서 축구선수로 뛸 수 있을까’ 하는 감사와 겸손의 생각이 들더래요. 그리고서는 성경을 펴니까,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는 말씀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한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축구를 하는 목적이, 주를 위하여 축구를 한다는 겁니다. 돈 벌고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축구를 하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이런 목표를 정했습니다.

 

하루는 시합을 하는데 독일 선수들이 이 차 선수를 우습게 생각을 했데요. ‘동양에서 온 선수가 뛰면 얼마나 뛰겠나’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근데 생각보단 잘 하거든요. 그러니까 상대편 선수들이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집중적으로 태클을 하더랍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굉장히 큰 부상을 입게 됐어요. 누가 봐도 고의적으로 한 부상인데, 축구를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불구가 될 정도로 허리부상을 당한 겁니다. 차범권 선수는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있는 차 선수를 보고 “고소해라. 고소하면 된다. 명명백백 상대편 선수의 잘못이니까 십만 마르크(지금의 7천 만 원)는 받을 것이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독일 사람의 상식으로는 고소가 당연합니다. 그런데 차범근 선수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선수 생명은 물론, 몸이 불구가 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도 고개를 살레 살레 흔듭니다. 왜? 주를 위해 살겠다고 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고 다짐하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를 뛰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부상으로 병상에 누워있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기로 했습니다. 고소 안하겠습니다.” 

고소하지 않는다는 말이, 독일의 여론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병실에 꽃다발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꽃다발을 병실에 쌓아놓으면서, 차 선수를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칭찬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그 후로 10년 동안 외국인 선수로 가장 오래 뛰었고, 가장 득점을 많이 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차 선수는 착한 마음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게 되었습니다.  

 

결론

 

예수 믿는 성도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우리들만이 이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십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이 세상과 다른 존재이고,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할 때,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는가, 아니면 손해가 되는가를 따지지만, 우리는 이 일이 옳은가 아니면 그른가를 따져야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도,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면 손대지 말아야합니다. 비록 나에게 손해가 난다고 해도, 그것이 옳은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학교와 회사에서도,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과는 좀 다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차별 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도 말고, 세상에 빠져서 헤어나지도 못하며 허우적대지 말고, 세상과 구별된 소망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돈과 권력과 학문으로 차별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뒤에는, 돈과 권력과 학문이 있지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는 주님의 말씀으로, 차별화 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뒤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뒤에는 옆에는 앞에는,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주님이 계심을 믿고, 맛 잃고 부패한 이 땅의 소금으로 살아가고, 어둡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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