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에 보면 두 가지 큰 심판이 나옵니다. 하나는 노아 때의 홍수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불의 심판입니다.
전자는 물로써 심판하신 것인데, 하늘에서 비를 내리게 하셨는데, 하늘의 문이 열려서 비를 쏟아 부었다고 하셨고, 땅이 갈라져서 땅에서 물이 솟아올라서, 40일 만에 온 땅이 물에 잠김으로,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죽는 심판이었습니다.
후자는 불과 유황으로써 심판하신 것인데, 하늘에서 하나님이 불과 유황을 쏟아 부으심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것을 다 태워서 죽이시고, 다시는 그곳에 풀이 나지 않고, 곡식을 심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본문 24절과 28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온 지역을 향하여 눈을 들어 연기가 옹기 가마의 연기같이 치솟음을 보았더라.”
여러분 이 두 심판 사건에서 공통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심판의 도구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때 죄악이 관영한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하늘의 비와 물을 사용하셨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하늘에서 비가 온다는 것, 하늘에서 물이 쏟아진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노아가 600세 되던 때에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전부 이슬로 말미암아 살았지, 비가 오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불과 유황을 사용하셨는데, 이것 또한 하늘에서 내리기는 처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전혀 이 같은 일이 없었음으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유황이 쏟아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시려면 무엇을 통해서든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의 도구로 물을 사용하실 수도 있고, 불을 사용하실 수도 있는 분이십니다. 바람과 공기를 사용하실 수도 있고, 사람과 대단한 무기를 사용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찮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악성 바이러스를 사용하실 수도 있고, 생화학 물질을 사용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홍수 심판이후에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다시는 물로 사람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음으로, 물로써는 심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겠다는 표로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신 것을 보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지개를 보면서, 다시는 물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를 이처럼 심판하시고 난 이후에는, 하나님이 죄악 된 존재들을 이렇게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사건은, 미래의 우주 종말 때 있을 최후 심판을 예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실 때, 그때 주님이 이세상의 만물을 심판하실 때,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성구...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의 무슨 죄로 말미암아, 이처럼 참혹한 심판을 받았는가? 20절에,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라고 하셨는데, 과연 소돔과 고모라의 심히 무거운 죄악이 무엇인가?
1.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비옥한 땅입니다. 옛날부터 먹을 것이 풍부하였습니다. 돈 벌이와 살림살이가 괜찮은 동네였습니다.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풍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은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이, 고통 중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갔습니다.
문제는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은 자기들은 넉넉하고 풍성했지만, 주위에 있는 이런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보와 주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없다면 모르지만 자기들에게는 모든 것이 풍족한데, 그것을 나누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에는 음식이 썩어 나가는데, 남들에게 나누어주지를 않았습니다.
에스겔 16장/ “49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50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먼 훗날 에스겔 선지자가, 그들의 멸망 원인인 이 죄악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교만함도 있고 가증한 일도 있지만, 대표적인 그들의 죄가 음식이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것을 보시고 그들을 없이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가난하고 어렵고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사회의 약자들을 돌보지 않은 것은, 곧 그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물질, 돈, 호화호식, 부귀영화에 대한 탐욕 때문에 주위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가진 자들, 풍족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나눌 줄 모르고, 오히려 더 가지며 자기의 배를 채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자기들은 풍족했으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를 못한 죄악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메르스로 인하여, 사회의 기능이 완전 마비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2000년 전에, 우리 주님이 암시하시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맹인 된 인도자여,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버리고, 자기들 판단에 가치가 있고 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취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귀한 것의 가치기준을, 작은 것에 두지 않았고 큰 것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육적인 기준으로, 가치 있고 귀한 것으로 낙타를 삼킨 것입니다. 당시 중동에서는 최고의 교통수단이 낙타 였고, 재산 목록 1호가 낙타였고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낙타를 소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물질에 대한 탐욕입니다. 이 낙타에게서 메르스 바이러스가 나왔다는 것은, 영적으로 탐욕스러움 마음에서 각종 죄악이 나와서, 사회를 어지럽히고 불안하게 하며 심지어 죽게도 한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인 오늘날 중동 사람들이, 거의 모든 나라와 사람들이 물질에 대한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의 종구죽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철저한 이슬람 국가로, 기름을 팔아서 대 부자가 된 나라입니다. 아랍에미레이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랍에미레이트의 두바이나 아부다비를 보면, 사막위에 이런 도시가 있나하고 다들 놀래실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높은 빌딩들이 즐비합니다(구름위의 빌딩모습 사진). 인공 섬을 보면 환상적입니다(인공섬 사진). 부자들은 온갖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데, 이처럼 사자를 타고 다니고(사진), 치타를 애완동물로 데리고 다니고(사진), 수억원 대의 차를 아무데나 버립니다(사진). 하룻밤 호텔 숙박비가 2500만원이 넘는데, 연일 빈방이 없다고 합니다. 이런 호텔에는 하늘 높이 공중에 떠 있는 테니스 장이 있다고 합니다(사진).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예멘을 비롯하여, 가난한 아랍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판단에 하찮게 여겨지는 것들, 자기들의 종교와 반대되는 사람들을 무참하게 공격하여, 죽이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슬람 국가이지만 파가 다르다고 서로 공격하고 폭탄 테러하고 부수고 죽이는 것 보십시오. 이게 정상적인 종교입니까? 이슬람을 모독하고 알라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제거하면, 천국에 직행할 수 있다는 교리가 진리일 수 있겠습니까? ... 이들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를 삼키고 있는 자들이 아닙니까? 탐욕스러운 마음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지 않으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탐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물질에 대한 탐욕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먹으면 먹을수록 맛보면 맛볼수록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지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욕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탐욕으로 가득찬 사람들에게,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 소리가 들릴 리가 있겠습니까?
어렵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돕고 사랑을 베풀고 서로 섬기며 배려하며 살라고 풍성한 양식을 주셨는데, 저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러지를 못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나 현제 중동의 갑부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나를 위해서는 흥청망청 쓰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사는 사람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린 사람들, 돈이 없어서 치료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고통 중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잘 돌보지를 못하였습니다.
좀 더 그 범위를 넓혀보면, 굶주린 아프리카 사람들과, 동남아 사람들을 생각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지진으로 고통당하는 네팔 사람들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중동 지역의 난민들에게도 관심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세계 각처에서 전염병으로 고통 중에 죽어져 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일부러 외면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당연히 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관심조차 갖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이유 중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입니다. 내가 더 가지고 더 풍성히 쌓아두고, 더 배불리 먹고 더 편안히 살기 위해서 나누지 못한 것입니다.
중동 지역의 사람들이든 오늘날 우리들이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주어진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지 못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 받은 원인 중의 하나가, 탐욕스러운 마음 때문에 자기들은 풍성함에도,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간이라는 한 사람의 탐욕 때문에, 이스라엘이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아간은 그의 가족 모두와 함께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게하시는 탐욕의 눈이 어두워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탐욕으로 인해 성령을 속여, 부부가 다 급사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탐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탐욕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인간 악의 뿌리이며, 반드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탐욕에 한번 빠지게 되면,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어느 소매치기가 평생을 소매치기 하다가 감옥살이 하고, 나중에 나와서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주위에 살고 있던 목사님이, 이 이야기를 듣고 너무 불쌍해서 전도하려고 병실을 찾아갔습니다. 그 소매치기에게 복음을 전하고, 눈을 감고 마지막으로 간절히 이마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눈을 떠보니까 손목시계가 없어졌어요. 보니까 숨이 넘어간 소매치기가, 그 손에 팔목 시계를 움켜쥐고 있더랍니다.
이 같은 탐심을 믿음으로 물리치치 않으면, 결국 이것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2.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동성연애의 죄입니다. 이것이 그 성이 멸망 받을 원인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막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저녁에 두 천사가 소돔 성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이 그들을 발견하고, 급히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리고 ‘저의 집에 오셔서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십시오.’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정황들을 볼 때에 롯은, 이들이 범상치 않은 사람 즉, 하나님의 천사들이 육신의 형체로 이 땅에 온 것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길거리에서 쉬겠다고 하던 천사들에게 롯이 간청하매, 그들이 돌이켜 롯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차려주니 그들이 먹고, 밤이 되어 자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백성들이 젊은이와 늙은이들이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두드리며 롯을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의 정황을 정확히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롯에게 찾아온 두 천사도 예쁜 남자의 형상이고, 그리고 롯의 집에 찾아와서 그 사람들을 이끌어 내라고 하는 사람들도 남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말은 성적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특히 남색을 표시하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곧, 이 많은 소돔 남자들은, 두 남자를 성적으로 급탈하려고 찾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자가 남자를, 다수가 소수를 상대로 공개적으로 성관계를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음 계속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증명이 됩니다. ‘오늘 밤에 너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고 했을 때, 롯이 문 밖으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에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다. 이들을 너희에게 내어 줄터이니 너희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내 집에 들어온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롯이 자기에게 찾아온 소돔 사람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과, 자기 딸들을 그들에게 내어주겠다고 한 것을 보면,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남색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롯이 자기 딸들을 내어주면서까지, 이 천사들을 보호하려고 했던 희생정신을 엿볼 수 있으나 이것은 옳지 않은 희생정신이요, 터무니없는 대책이었습니다.
이 소돔 사람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롯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롯을 밀치며 그 문을 부수려고 하였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그들이 얼마나 완악하고 도덕적으로 얼마나 타락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때 나그네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소돔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앞을 보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최초의 남색 사건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소돔(Sodom)이라는 말에서 영어 sodomy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이는 '남색'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소돔이 멸망한 것은 이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이 남색이 성행한 것을 보신 하나님이, 그 도성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작년에 신촌에서 동성애자들의 축제인 ‘퀴어 축제’가 있었습니다. 퀴어(queer)라는 단어는 ‘기묘한’, ‘동성애자들’, ‘가짜’, ‘혐오스러운’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별로 좋지 않은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세월호가 작년 4월에 있었는데, 그 다음 다음 달인 6월에 이 축제가 있었습니다. 구청에서 허락도 하지 않았지만 불법 집회를 강행하였습니다. 그들은 퇴폐적이고 저질적이며 선정적인 길거리 축제를 가졌습니다. 왜 이런 것에 관해서는 사회가 궐기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나라를 위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나서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가족들이, 여기에는 항의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메르스로 인하여 국가가 초 비상인데, 서울시가 이것을 허락하여 축제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2주 동안 동성연애자들의 영화도 상영하고, 각종 문화 행사도 하고 모르긴 하지만 자기들끼리 성행위도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은 대부분, 이 동성연애와 동성결혼을 허용하고 있는 입장이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법으로 통과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국회에 통과되면, 앞으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도 엄청난 파장을 불러 올 것입니다. 그 미치는 파급영향은 상상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리고 항문으로 섹스를 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여러 가지 성병과 AIDS 전파력이 대단해 질 것입니다. 그러면 정부에서는 그런 비용을 다 부담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인생을 망쳐놓고 그들의 치료비를 또한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룩셈부르크의 현 총리는 동성과 결혼을 해서 뻐졌이 나라의 일을 보고 있으니, 그 나라의 국민들 특히 다음세대에 미치는 영향은 심각할 것이라고 봅니다.
다음의 동영상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작년 퀴어축제+KBS제작).
앞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이 결혼할 때, 아들이 또 다른 남자를 데려와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할 것이고, 딸이 또 다른 여자를 데려와, 우리 서로 사랑한다고 결혼할 거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군에도 동성연애자들이 있다면, 여러분의 아들을 그 부대에 입대를 시키겠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것은, 소도미(sodomy) 때문입니다. 동성연애와 동성결혼은 그 민족과 나라가 망하는 일입니다.
3.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노아 홍수 심판 이전에도, 그 땅 사람들의 죄가 세상에 관영하였다고 했습니다. 죄가 세상에 포화상태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국 물로써 모든 인류가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지금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탐욕스러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지 않았고, 남색하는 죄가 하늘을 찌르는 듯 하였습니다. 젊은이와 늙은이 할 것 없이 모두 이 죄에 빠졌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예고하셨고, 천사도 그 땅의 멸망을 예고하셨고, 롯은 그의 사위에게 찾아가서,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을 떠나자’고 했지만,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업수이 여기고서,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롯의 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롯의 처는 그 말을 신뢰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봄으로,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도망하라는 말을 듣고 저들이 그곳을 피하였더라면, 살 수 있었지 않습니까? 몇 년 전 인도네시아 아채 지방에 해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곳에 머물던 이연걸이란 유명한 중국배우는, 두 딸을 안고 머뭇거릴 시간도 없었고,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서 살았다고 합니다. 죽음의 파도가 지금 덮쳐오는데, 그 자리에 머뭇거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의 파도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막연하게 지내다가 죽음을 당하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멸시했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남색 했던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던 롯의 사위나 롯의 처는, 결국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무시무시한 심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하늘에서 유황이 쏟아진 역사가 없고, 불이 내린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역사 이래 처음 있는 무시무시한 전무후무한 심판입니다.
이것은 화산이 폭발하여 그 붉은 용암이, 우리 위에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은 엄청난 재앙을 받은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 즉, 그들이 죄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극렬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본이 되는 것이며 아울러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저러지 말아야지, 우리는 저렇게 살지 않아야지, 우리는 저런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아야지...이런 교훈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후대의 경건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 1:7절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건이 우리의 거울이 되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겸하여 물질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을 쫓아서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주일을 거룩하고 존귀한 날로 보내라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을 나의 날로 삼으며 더럽혀오지는 않았습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하나님의 집에 들이면, 선과일이 떨어지지 않으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병충해를 막아주시겠다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돈을 도둑질하지는 않았습니까?
가난한 자, 고와와 과부를 돌보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외면한 채 내 배만 불리지는 않았습니까?
간음과 남색, 무당과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세상을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여 그런 것에 파뭍혀 살지는 않았습니까?
느헤미야는 당시 이같은 죄악이 자기 민족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민족의 죄를 자기의 죄로 알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1-2장).
우리도 이 나라 이 민족의 죄를 나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가 있어서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찢으며 눈물을 흘리며 우리의 죄를 자복할 때, 하나님은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돈에 대한 탐욕을 부림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못한 죄, 성적인 부도덕한 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던 죄를 회개합시다. 우리와 이 나라 이 민족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이 제하여 주옵소서.
에스겔서 22장에 보면,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이 아닌 것을 전하였고, 정치인은 불의한 이익을 취하였고, 제사장은 성물을 더렵혔고, 온 국민도 포악한 죄를 범함으로 온 민족이 죄를 범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참다못한 하나님이, 심판을 결정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이전에, 나의 심판을 가로막아 설자를 찾으셨지만, 그들을 찾지 못함으로 이 백성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진노를 가로막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실 때 찾은 바 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민족의 죄를 자기 가슴에 앉고, 눈물로 가슴을 떧으며 회개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루살렘의 망대가 무너져서 18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아서 그런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우리와 이 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복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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