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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마가복음 6:30-40)
이정현 목사 2015-06-28 추천 0 댓글 0 조회 455

중세 말기 유럽의 네덜란드에 살았던, ‘헤르트 호르테’라는 가톨릭 사제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번영해 나가는데, 초대교회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하여, 초대교회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운동을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라는 운동인데, 라틴어로 ‘근대적 헌신’이라는 뜻입니다. 이 운동에서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초대교회의 역동적인 복음적 생활을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토마스 아 켐피스’라는 사람이, 이 운동에 큰 영향을 받아서 1418-1427년경에 라틴어로 책을 한권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그리스도를 본 받아”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한문으로 “준주성범”(遵主聖範)이라고 하는데, 가톨릭 뿐만아니라 개신교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는 유명한 책입니다. 혹자는 이 책을 성경과 비교할 수 있는 고전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책의 주 내용을 한 마디로 표현을 한다면,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삶이 어떤 삶인가를 성경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다면, 늘 이 질문을 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그 해답을 찾아서, 그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짜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고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려면, 먼저 주님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사셨을까? 오늘은 주님의 여러 지체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주님의 마음을 어떻게 쓰셨는가? 또 주님은 그의 눈을 어떻게 사용하셨으며, 그의 입술과 발 그리고 그의 손, 그의 무릎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살펴봄으로, 주님이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33년 동안, 이 지상에서 어떻게 사셨습니까?

 

먼저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어디에 두셨으며, 어떻게 사용하셨을까요? 주님은 그의 마음을 늘 하나님께 두면서, 동시에 그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베다니 동네의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주님은 그곳을 찾아가셨습니다. 나사로는 부모도 없이 여동생 둘을 데리고 살았는데, 이제 그가 죽었음으로 이 가정이 얼마나 처량하고 불쌍한 가정이 되었겠습니까?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주님이 그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이미 많은 유대인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두 자매를 위문 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그 마을 입구에 도착을 했을 때, 마르다가 나와서 환영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리아가 나왔습니다. 이들은 다 오빠의 죽음을 애석해하며 슬퍼하였고, 또한 일찍 오시지 않은 주님을 조금 원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우는 것과, 두 자매가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를 어디 두었느냐?’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주님은,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나사로의 무덤에 가셨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느끼며, 절망 중에 울고 있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비통히 여기셔서 그들과 동화되어 같이 우셨다는 것입니다. 길 잃은 죄인들을 향한 주의 마음,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한 주의 마음, 실망과 좌절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향한 주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의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니까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말하니, 예수께서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시면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에서 껑충껑충 뛰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할렐루야!  

 

어떤 젊은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여자는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한 손으로는 이 여자를 붙들어 끌고, 한 손에는 돌맹이를 든 건장한 남자들이, 예수 앞에 이 여자를 내동댕이 치면서,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합니다. 

 

주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니까, 전부 다 양심에 가책을 느껴서,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뿔뿔히 다 흩어지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았습니다. 살기 등등한 많은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이제 두 사람만 남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했더니, 그 여자가 ‘주여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 주님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그 여자를 모세의 법에 따라 죽이려고 했지만, 주님은 죽어 마땅한 그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많은 사람들은 더럽고 몹쓸 여자로 손가락질하지만, 주님은 그 여인을 감싸주시며 보호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권면해 주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죽어야 할 가련한 한 여인을, 주님이 불쌍히 여기사 보호하시고 용서해 주시는, 아름다운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시면 주님이, 12년 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고쳐주십니다. 조금 후에는 어느 관리의 집에 들어갔는데, 주인의 딸이 죽어서, 피리를 불고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였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다 내 보낸 후에, 그 딸의 손을 잡아 일으킴으로 그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이 소문이 온 동네에 퍼졌습니다.

 

이어서 그 뒤를 보면, 맹인 두 사람이 예수를 따르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며 간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맹인들이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시고,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라고 물었더니, 믿는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에 주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기를,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시니까 그 즉시로 그 눈들이 밝아졌습니다.

 

이 사건 다음 또 이어서요, 어떤 사람들이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주님이 그 귀신을 쫓아내시니, 그 사람이 곧장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다가 마태복음 9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 많은 사람들을 위한 주님의 마음이 어떠하신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주님은 사람을 보실 때에, 인간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아서 고생하며 기진하여 있기 때문에, 늘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유리 방황 하는 인생들을 보시고, 너무 불쌍해서 그들에게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그들을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시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것은, 목자 없는 그들이 불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은, 갈 길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입니다.

 

오빠가 죽고 큰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었던 그녀들을 불쌍히 여기셨던 주님, 12년 동안이나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또한 불쌍히 여기셨고,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던 주님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이 마음을 닮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직도 저들의 목자가 없어서 양같이 유리 방황 하는 우리의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이 마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심장이) 주님 닮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죄인들과 동화되어 사심으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많으셨습니다. 주님은 성경에서 세 번 우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요,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 성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자랑하였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 성의 멸망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

 

“마 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주님은 암탉처럼, 병아리 같은 예루살렘 사람들을 품으려고 품으려고 몇 번이나 노력하셨지만, 그들은 계속하여 범죄 함으로, 결국 황폐하여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멸망할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는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때의 상황을 히브리서 기자가 짧게 설명해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히 5:7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주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싸늘한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고 했습니다. 보통 우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심한 통곡으로 간구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평소에,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을 하셨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에도, 울면서 따라오는 수많은 여인들을 돌아 보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약5:1)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도, 주님의 눈의 눈물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눈물이 매 말라 있지는 않습니까? 울어야 할 때 가슴을 치며 울지 못할 때는 없습니까? 나 자신의 내면의 삶을 현미경으로 살펴볼 때에, 울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정과 가족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할 때, 울어야 할 일은 없습니까? 교회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여 울컥 울음이 터져 나올 때가 없습니까? 이 사회와 국가는 어떻습니까? 오늘 퀴어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사람들이 벌거벗고 서울 시내를 활보하며 다닌다는데, 이런 것을 보고 듣고도 울고 싶지 않으십니까? 울어야 할 때 울지 않으면, 나중엔 피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눈을 본 받아, 눈물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그의 발과 입을 어떻게 사용하셨습니까? 주님의 발은 바쁘게 사람들을 늘 찾아 다니셨고, 만나는 그 사람들에게 입술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3년 동안에는 하루도 쉬지 않으시고 갈릴리 전역을 돌아다니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주변의 동네 동네를 누비며 다니셨습니다. 또한 데가볼리 지역을 다니셨는데, 데가볼리는 갈릴리 동남향 쪽에 위치한 10개의 도시를 말합니다. 즉, 세돕볼리스, 빌라델비아, 라바나, 히부쓰, 데오시, 베라, 거라사, 가다라, 디온, 다메섹 등의 10성읍입니다.

 

그리고 갈릴리 서북쪽인 두로와 시돈 지역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였고, 갈릴리 북쪽인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가서도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끔씩은 사마리아 지역에 가서도 전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1주일 전에는, 예루살렘으로 내려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마침내 그곳에서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여 승천 직전까지도, 계속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다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3년 동안, 갈릴리와 사마리아와 유대 지방을 두루두루 걸어 다니시며, 입으로 복음을 전파 하시고 돌아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발걸음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죄인들을 찾아가신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드디어 이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나라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도 주님을 닮았으면 좋겠고, 우리의 입술 또한 주님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세속적이며 죄악 된 곳으로 빨리 달리지 말고, 전도의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고, 우리의 입술도 주님을 본 받아, 진실을 말하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말하고 칭찬을 하고 좋은 것을 말하고, 무엇보다 복음을 전하는 나팔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예수님의 손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의 손은, 베고픈 사람들에게 떡을 떼어준 손이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자기에게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늦게까지 말씀을 전하시고, 날이 저물어가고 식사 때가 되었을 때, 보리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사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었더니, 제자들이 그 떡과 고기를 5천 명이 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배불리 먹게 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과연 언제 그 떡과 고기가 많아졌을까? 주님이 떡을 들고 떼어 주셨을 때, 계속 그 손에서 떡이 나왔을까? 아니면 제자들이 나누어 줄 때, 제자들의 손에서 나왔을까? 그것도 아니면 배고픈 사람들이 그 작은 떡을 먹었더니 그 떡이 줄지 않고 계속 나왔을까? 이번에 말씀을 여러 번 읽다가 어느 정도 해답을 찾았습니다.

 

요한복음 6장 4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주님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는데, 제자들은 그 떡을 나누어 주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손에서 계속 떡과 고기가 나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5천 명이 넘는 사람,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만 5천명이 넘을 것인데,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떡을 주님이 계속 그 손으로 떼어 주셨으니, 얼마나 수고를 하셨겠습니까? 주님의 손은 베고픈 사람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는, 자비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은, 어린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던 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싫어하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 아이들을 품에 앉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기도해 주셨습니다(마19:13-14).

 

주님의 손은 굶주린 사람들에게 떡을 떼어 준 손이며, 또한 어린 아이들에게 축복해 주신 손이며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던 섬김의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와 선생이 되어 그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주인이 손님의 발을 닦아 주거나, 그 집 아들이 손님의 발을 닦아주는 법이 없습니다. 발을 닦아 주는 것은 그 집의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주와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는데 의미가 큰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아니라 10명이 넘는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수건이나 물도 여러 번 갈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여러 번 세수 대야에 물을 길러 오셨을 것이고, 몇 번이나 수건을 빨아 오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번거러움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그분은 냄새나고 지저분한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닦아 주신 것입니다. 손수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허리를 굽혀서 손으로 그 발을 닦아줌으로, 섬기는 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손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배고픈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주님의 손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해 주는 손이 되고, 더 나아가서 남을 사랑으로 섬기는 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 아파트 사전 점검일 전도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보니까, 우리 성도님들이 얼마나 잘 섬기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그날 하루 점도록 전도팀장을 맡으신 장로님들은, 자기 사업도 제쳐두고 음식으로 섬기고 차량봉사로 섬기고 물품조달로 섬기고...얼마나 섬기는 손의 역할을 잘 감당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도, 베풀고 축복하고 섬기는 주님의 손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무릎은 기도하시던 무릎이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그 분은 40일 금식기도부터 하시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사실 기도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일 금식기도로,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을 하시면서 새벽에도 기도하셨고, 저녁에도 기도하셨고, 때로는 밤새도록 철야기도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는, 제자들에게서 돌 던질 만큼 떨어져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는 본디오 빌라도 총독 앞에서나 대제사장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아니하셨던 분이나, 그날 밤에는 그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무릎을 꿇지는 않으셨으나,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고, 지금은 보좌 우편에서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분의 무릎은 기도하던 무릎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기도하셨던 분이십니다. 기도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무릎으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덧입었던 분이십니다. 기도하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하셨고, 기도하심으로 아버지의 뜻대로 사셨던 분이십니다. 기도하심으로 사명을 완수 하신 분이시고요, 세상 끝 날까지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하는 무릎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야고보가 주님의 기도를 본받기 위하여 무릎 꿇고 기도하고 또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마침내 그의 무릎이 낙타의 무릎처럼 되었고, 그가 기도하던 마루 바닥에는 두 개의 구멍이 낫다고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주님과 야고보의 기도하는 무릎을 배우고 싶습니다.

 

결론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서, 우리의 마음도 위로는 하나님께 두고 옆으로는 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온유하고 겸손한 그 마음도, 닮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눈을 닮아서, 나와 가족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눈에 눈물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발과 입을 닮아서, 우리도 전도 대상자들을 찾아가며, 그들을 만나서 입으로 복음을 자랑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손을 본 받아서, 우리의 손도 남들에게 베푸는 손, 축복하는 손, 섬기는 손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무릎을 닮아서, 우리의 무릎도 기도하는 무릎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무릎으로, 하늘나라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릎으로 사는 소망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요?’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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