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이야기는 아니고, 의미 있는 하나의 야사입니다. 어느날 다윗 왕이 보석 세공인을 불러서, 특별한 반지를 하나 만들 것을 명령했습니다. 아주 특별한 반지 하나를 만들어서, 거기에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는 글귀를 하나 세기라고 했습니다. ‘내가 승리했을 때는 기쁨에 취해 자만하지 않도록, 또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거기에 새겨 넣으라.’
보석 세공인은 왕의 명령대로 아름다운 보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을 만족시킬 만한 글귀를 찾을 수가 없어서 고민 고민을 했습니다. 좋은 글귀가 생각이 나지 않아,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자에게 찾아갔습니다. 지혜로운 솔로몬이 아주 간단한 한 문장을 해답으로 주었습니다. ‘감 쩨 야아보르’(히).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뜻입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한마디는 승리에 도취되는 순간 교만한 마음을 가라앉게 하고, 절망 중에 있을 때는 용기를 주는 한마디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시인 랜터 윌슨 스미스(L. W. Smith)라는 사람이, This, too, shall pass away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거대한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평화를 파괴하는 힘으로 그대의 삶으로 스며들 때
소중한 것들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질 때
힘겨운 순간마다 그대의 마음에 말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끊임없는 고통이 즐거움의 노래를 들리지 않게 만들고
피곤에 지쳐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
이 진리가 당신 마음의 슬픔을 몰아내게 하고
힘든 나날의 무거운 짐들의 무게를 가볍게 하도록 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땀 흘린 노동이 그대에게 명성과 영광을 가져오고
지상의 모든 숭고한 이들이 그대에게 미소 지을 때
삶의 가장 길고 장대한 이야기도
이 세상사에서는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다윗 왕이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화려해도 바람처럼 지나갈 날이 오고, 천하를 얻은 기쁨도 사라질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의 기쁨도 누렸지만, 눈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눈물로 온 밤을 지새우는 슬픔이라 해도 사라질 때가 오고, 호흡하기 어려운 고통이라 해도 이것 또한, 지나가는 순간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이 땅위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윗이 인간의 연약함을 깨달은 다음에, 고백하고 결심하는 내용입니다. 4-6절은 인생의 연약함과 허무함을 이야기 하고, 7절은 오로지 주님만 의지하겠다는 고백입니다. 다윗의 이 말을 통하여, 우리의 인생을 살펴보고, 또한 새로워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천하를 호령했던 다윗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을 돌보며, 곰과 사자와 싸워서 양을 지켜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물리친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을 비롯하여 모든 군사들이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 벌벌 떨로 있었지만,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며, 물매 돌을 돌려서 골리앗의 이마에 맞추어 죽인 사람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승리했던 인물이며,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이,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나의 종말과 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해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이 언제 다할지, 그 시간을 아는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의 생명이 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연약함이자 우리의 연약함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자기의 날이 많지 않음을 알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연약함, 인생의 연약함, 인생의 덧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말로 정신차리려면,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상에서의 날이 얼마나 남았나요? 아무도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연약함을 아시고,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경건하게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4절에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그 연약함의 구체적인 모습이 5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나의 날이 한 뼘 길이 정도라, 주 앞에는 없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고, 누려볼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지만, 그 인생의 날이 한 뼘 밖에 되지 않고, 이것을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과 비교할 때는, 없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인생이 길어야 얼마나 길겠습니까? 100살 정도면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100살도 하나님과 비교하면 한 점이라도 찍을 수 있겠습니까? 짧은 인생이며 동시에 허무한 인생입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니체와 같은 허무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그토록 허무한 존재로 본 것은, 자신을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과 비교해 보니 아무 것도 아니더라는 것입니다.점보 747 비행기에는 적어도 400명 정도가 탑승합니다. 그 거대한 비행기가 하늘에 떠있을 때, 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보시면, 잠자리 한 마리보다 못한 것입니다. 전투기가 수십대 이착륙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바다에 떠있을 때, 하늘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한낱 작은 종이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위대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서면 작은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앞에 서면, 우리 인생은 점 하나에 불과한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주 앞에 서게 되면, 없는 것 같은 것입니다.
채 장로님이 지난 목요일 새벽에, 자기는 50km로 인생을 달려가는데,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는 60, 70km로 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월의 빠름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날아가는 화살처럼 지나가 버립니다. 모세도, “우리의 년 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인생이며, 여기에 그 인생의 영화도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 성공하고 부귀영화를 누려도, 그 모든 영화도 아침 햇살 앞에 이슬과 같은 것입니다. 화무십일홍입니다. 아무리 뽐내고 화려한 꽃이라고 해도, 10일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무상입니다. 젊은이들은 인생 100년 200년 살 것 같지요? 멋지고 예쁜 배우자를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돈도 많이 벌어서, 부귀영화를 오래 오래 누릴 것 같지요? 비록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이 꿈꾸는 것처럼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저녁이 되면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젊음도 행복도 영화도 잠깐이라는 말입니다.
대영박물관에 가면, 고대인들의 시체를 모아 놓은 미라 전시관이 있습니다. 그 당시 시체를 썩지 않도록 방부 처리를 할 정도라면, 왕이거나 왕족, 귀족 그리고 부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 천 년이 지난 지금 그 미라를 들여다보면, 흉물스럽고 소름끼치는 모습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권력도, 부귀도, 영광도, 세상도, 인생도 다 끝이 있다는 것이며, 그 끝은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2)고 말씀합니다. 인생은 연약하고 짧은 한 호흡과 같아서, 셈할 가치가 없을 정도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생이 한 순간의 입김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예)추운 겨울 날 유리창 문에 입김을 불어서, 글씨를 써 본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불어놓고 하트를 그리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침 햇살이 피어오르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네 인생이 이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코의 호흡은 한 순간에 끝날 날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홀연히 죽음 앞에 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 속담에,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것을 믿으려하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머리로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 죽음이 나에게 갑자기 닥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을 항상 나에게 다가올 사건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에,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든든히 서 있을 때, 여러분이 만사형통 할 때, 여러분의 매사가 잘 될 때, 아프지 않고 건강할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라고 얘기합니다.
예)인류의 위대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만리장성입니다. 만리장성은 본래 흉노족 같은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주전 208년 중국의 전국시대, 제나라 때 시작하여 진나라 때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그 길이가 6352km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20번을 왕복하는 거리와 같습니다. 사람이 혼자의 몸으로도 올라갈 수도 없을 정도의 높은 산 꼭데기에, 커다란 돌담을 이어서 쌓아 놓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의 힘으로 이것을 지었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웅장한 성벽입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성이 나라를 지켜주지는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적군의 뇌물을 받은 문지기가, 그 문을 열어주고 말았습니다. 결국 북 방 민족의 침략을 막지도 못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철벽같은 만리장성도, 그 나라와 국민을 지켜주지는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수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성을 쌓습니다. 물질의 성, 명예의 성, 권력의 성, 가정과 건강의 튼튼한 성벽을 쌓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무서운 괴물 앞에, 이 모든 성벽들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았던 솔로몬은 시127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
그러므로 좀 더 반짝하고 좀 더 찬란하고 좀 더 높다고 자랑할 것 없고, 좀 덜 반짝이고 좀 덜 찬란하다고 의기소침하여 낙심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는 것 감사하시고, 두 끼 먹어도 건강에 좋다니까 감사하시고,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이것조차도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음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처럼 건강하게 걸어서 예배의 자리로 나올 수 있는 것도 감사하고, 월급을 많이 못 받아도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하고요,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것도 축복된 인생입니다. 오늘 이 시간을 살려고 해도 살지 못한 사람이 많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앉고 싶어도 앉지 못한 사람 많습니다. 그저 현재에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며 사시며 됩니다.
다윗은 6절에서 인생의 모습을 좀 더 실감나게 묘사를 했습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이 구절에서도 다윗은, ‘인생을 그림자 같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인생의 허무함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리고 ‘헛된 일로 소란한 인생’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사람이 입김과 같은 것을 붙잡기 위해 분투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허왕 된 꿈을 좇아서 아우성치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참으로 그렇구나, 맞는 말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다 헛된 것들인데, 이것을 붙잡고 얻기 위해, 소란을 피우며 산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생을 그렇게 소란을 피우며 사는 것입니까? 다 부질 없는 헛된 일들 때문입니다. 부부 간에도 아옹다옹 삽니다. 내가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이러지는 않았을 텐데...딴 놈 만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신이라는 여자하고 결혼한 것이 내 평생의 실수이다...그 여자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적당한 배필인 줄 알아야 합니다. 조강지처 버리면, 악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헛된 일로 소란한 인생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소망교회 남자들이여, 저녁 늦게까지 헛된 일에 매여 있지 말고 일찍 일찍 집에 들어가서, 부인과 가족들 좀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부인의 옷 단추를 한번 풀어보세요. 시커멓게 탄 가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비통한 심정으로, ‘재물을 쌓아도 쓰지 못하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땀 흘리고 수고해서 번 재물이라 하더라도, 누가 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부자가 그 해 농사를 지었는데 대 풍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창고를 더 늘였습니다. 창고마다 가득가득 곡식을 쌓아놓고,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이 있으니, 편안히 먹고 쉬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가 예비 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는 자기가 애써서 벌어 놓았지만, 자기의 재물을 자기가 쓰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고통과 눈물로 돈을 벌었지만, 자기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벌었지만, 자기가 써 보지도 못하는 사람 많다는 것입니다. 평생 동안 벌어서 집 한 칸 마련해 두었는데, 자식이 사업한다고 대출 받아 달라고 해서 최대한 돈을 뽑아 주었더니, 그 놈의 자식이 주식 투자를 해서 홀라당 말아 먹었습니다. 30년 동안 직장 생활해서 연금을 일시불로 3억을 탔는데, 친한 친구가 그 돈 요새 은행에 넣어두면 이자도 얼마 받지 못한다고, 땅을 사 두라고 해서, 제주의 땅을 사 달라고 그 친구에게 맡겼는데, 친구가 그 돈 가지고 외국으로 날라 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배신과 억울함 때문에 낙심하여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오늘 다윗은 이것이 인생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인생이 덧없이 빨리 지나가며,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신뢰에 가득찬 고백을 합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이 구절은 다윗의 자문 자답형식의 문장입니다. 앞에서는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라고 질문을 하고, 뒷부분에서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다.’고 확실히 대답합니다.
다윗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는, 덧없고 허무하고 좌절스러웠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니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42편에서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여러분 인생의 나약함, 인생의 빠름, 인생의 덧없음, 인생의 허무함 때문에 낙심되고 불안해 집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도와주실 것이며, 그리할 때 우리는, 여전히 그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결론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1905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난 유태인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기차에 실려 유태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습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심한고문과 노역으로 인하여 그의 모든 가족들은 죽었습니다. 자기 혼자만 그 가운데서 기적처럼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수용소 생활은 처참했습니다. 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빵 한 조각에 의지하여 강제 노역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는 비결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침에 빵을 하나 주면, 그것을 먹지 않고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점심 때 빵이 하나 나오면, 아침의 빵을 꺼내서 먹고, 점심에 나온 빵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프랭클이 자지 자신에게 늘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라도 먹을 것이 있어’ ‘내 호주머니에는 항상 일용할 양식이 있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태반이니까, 먹을 것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사람은 그렇게 자신에게 확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긴 말이 ‘로고 테라피’라는 말입니다. 로고라는 헬라어는 ‘의미’라는 뜻이고, 테라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치료’라는 뜻입니다. 의미만 찾으면 치료할 수 있다, 또는 의미만 찾으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프랭클은 지옥 같은 상황에서 살아났을 뿐만아니라, 후에 훌륭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프랭클의 이 책은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어려움이 많아도 소망을 가진다면(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얼마든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은,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비밀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진다면, 인생의 연약함과 현재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망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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