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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 (갈라디아서 6:17)
이정현 목사 2015-09-06 추천 0 댓글 0 조회 442

우리가 살다가 보면, 본의 아니게 몸의 상처를 가질 때가 있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들판이나 산을 다니며 일을 했습니다. 봄, 여름, 가을까지는 주로 소를 먹이기 위해서 풀을 베었고, 겨울에는 땔감을 위해 산에서 나무를 했습니다. 전부 지개와 낫을 사용하여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수시로 손을 베었습니다. 조금 잘 사는 집안의 아이들은, 소 풀을 베거나 나무를 하러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학교만 갔다 오면, 이런 일들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의 흔적이 지금 제 양손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상당히 많은 흉터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 이 손의 흉터를 보면, 그때의 일들이 생각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큰 병으로 말미암아, 수술을 받은 자국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저는 특별히 아파서 아직 수술을 받아 본적은 없지만, 집사람은 맹장 수술을 받은 자국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뇌수술을 받았는데, 이 만큼의 뼈를 들어내서 다른데 보관하고, 그 부위는 함몰되어 푹 꺼져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살다보면, 다쳐서 또는 사고로 상처가 나기도 하고, 수술을 받은 자국이 남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일생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줄 앎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주님이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그에게 보내시면서, 바울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9:15-16). 주님이 직접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믿고 변화되고 난 이후에, 아시아와 유럽과 마지막에 로마까지 복음을 전함으로, 수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복음을 전혀 모르는 지역에 가서 예수님을 전함으로, 각 지역에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한 바리새인이었지만, 율법이 아니라, 복음, 곧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에 이른다는 신학을 정립한 신학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해야 구원을 받고,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바울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자가 하나도 없다고 강조하고, 오로지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신학을 세운 자입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변증한 변론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다니면서 많은 철학자, 수사학자, 종교인들, 정치인들, 부자들, 천민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변증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명철로, 기독교의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열정적인 전도자였습니다. 전도하다가 숱한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에,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면 바울은, 논리 정연하게 지혜롭게 복음을 해석하여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서신입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13개의 서신이, 바로 바울서신입니다. 이 방대한 편지들을 통하여, 바울은 복음을 정리하고 해석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서신들을 통하여 우리는 진리를 더 확실하게, 더 넓게, 더 깊게, 더 이해하기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바울의 대략적인 인생을 근거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앞의 문장 즉,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말씀을 그냥 읽으면,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내가 지금까지 숱하게 많은 괴로움을 당했으니, 이제 더 이상 너희들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을 괴롭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몰래 교회 안에 들어와서, 거짓 교훈을 한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구원을 받으려면, 먼저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이 같은 말에 갈라디아교인들이 많이 미혹이 되어,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이탈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산고의 수고를 겪으면서, 이들에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쳐왔는데, 여기에 율법주의자들이 초를 친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하여 바울의 마음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을 향해, 이후로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해서 진리에서 이탈시킴으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참된 복음에 대해 헛된 도전을 하지 말라고 율법주의자들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흔적’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여기에만 단 한 번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소유권을 표시하는 낙인과 같은 것입니다.

 

옛날 성경 시대에는 이 낙인을 노예들에게 찍기도 하고, 병사들에게 지휘관의 이름을 찍기도 하고, 그리고 종교지도자들이 자기의 신에게 몸을 드린다는 표시로, 화인을 찍어서 흔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이 같은 화인의 흔적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 어쩌면 자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흔적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써 흔적이 있으며, 또한 주님께 헌신의 표로써의 흔적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몸에 지니고 있는 예수의 흔적은 무엇입니까? 바울이 말하는 자기 몸의 예수의 흔적은, 그리스도 때문에 또는 복음 때문에 당한, 고난의 상처(흔적)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흔적이 복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단 그 상처가 한 개가 아니라,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몸에 낙인처럼 찍힌 예수의 흔적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안질은 분명 성하지 못하였습니다(행9:18, 갈4:15). 그래서 그는 그 이후 평생 동안, 앞을 잘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통 중에 눈에서 진물을 질질 흘리며 살았다고 합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그반 죽게 되었습니다(행14:19).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바울에게 돌을 던진 것입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죽은 사람처럼 되니, 그 사람들이 바울을 성 바깥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정도면,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가 났겠습니까?

 

이 외에도 성경에 보면, 그는 유대인의 태장과 로마인의 매를 여러 번 맞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고후6:5, 11:24). 대표적인 성경이 고린도후서 11장인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성경구절만 읽어보더라도, 바울이 복음 전파로 인하여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스티그마타(흔적, 상처, 낙인)를 가지고 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특히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했는데, 이는 죄인의 두 손을 기둥에 매고, 양 어깨와 가슴을 벗기고, 소가죽 세 가닥으로 꼰 매로, 39번을 때리는 것입니다. 이는 신25:3절을 근거로 하여 죄인을 다루는 것이나, 39대를 맞기도 전에 절명하는 사람도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하니, 그 몸의 상처를 감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세 번 태장으로 맞았다고 했는데, 태장은 로마 사람들의 매로, 그 끝에 뽀족한 납을 달아서 치기 때문에, 집행 중 죽음에 이르는 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 시민들에게는 이런 가혹한 형벌을 가하지 않았으나,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이면서도 억울하게 이런 일을 빌립보에서 당하였던 것입니다(행16:22,37). 바울이 맞았던 태장은 비록 횟수는 유대인의 매보다 적지만, 그 상흔은 더 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몸은, 갈기갈기 찢긴 상처로 얼룩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동사로 ‘지니고 있노라’(구 성경-가졌노라)는 말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예수의 흔적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깊고,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정말로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함으로, 이렇게 많고 무거운 흔적들, 상처들을 몸에 짊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바울은 이런 흔적(상처)을 몸에 짊어질 이유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워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철학과 수사학에 능한 사람이었고, 윗 사람들로부터 총망 받는 젊은이였습니다. 어쩌면 출세가도를 달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사람이 복음 때문에, 예수 때문에, 교회 때문에, 고난과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가는 곳마다 새로운 예수의 흔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흔적이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서, 이제는 무겁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기쁨으로 자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기의 의를 자랑했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했고,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의 할례를 흔적으로 자랑했겠지만, 바울은 예수의 흔적들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고 변화된 이후에, 주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삶으로, 이런 흔적들을 몸에 짊어지고 자랑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흔적들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전도의 흔적이 있습니까?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다쳐본 사람 있습니까? 열심히 전도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복음 전파하다가 고난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전도하다가 손해 본적이 있나요? 전도하다가 몸살 나본 적이 있나요? 입술이 부르터 본적이 있나요? 발에 물집이 생겨보셨습니까? 고등학교 때 겨울 방학만 되면 거지 전도를 1주일씩 다녔습니다. 전도지를 사서 가방에 넣고 시골 마을 마을을 다니면서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전도를 했습니다. 밥을 주면 먹고 안주면 고구마 같은 것을 먹었습니다. 추우면 남의 처마 밑이나 묘 사이에서 바람과 추위를 피했습니다. 잘 곳이 없으면, 인근 교회를 찾아가서 스폰지 방석을 거두어서 깔고 덮고 잤습니다. 

 

우리에게 헌신과 사랑의 흔적이 있습니까? 어떤 젊은 대학생이, 정말 가난하게 사는 학생에게 자기의 콩팥하나를 이식해 줬는데, 이 소식을 들은 어느 독지가가 5천 만원의 금일봉을 장기기증자에게 장학금으로 전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대학생은, 이 돈은 내가 쓸 수 없다고 하여,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장학헌금으로 드렸다고 합니다. 이 대학생에게서는 사랑과 헌신의 흔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였습니다. 사울은 칼과 단창을 가지고,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쫓아다니고 있습니다. 다윗은 불안한 마음으로,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으로 피해 다니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느 굴속에 숨어있는데, 자기의 생명을 찾던 사울이, 너무 더우니까 그 굴 입구에 들어와 쉬다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그 굴을 빠져 나오면서 칼로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베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서 외치기를, 너희 사울 왕의 호위무사들은 무엇을 하느냐, 내 주 왕을 좀 더 잘 지킬 수 없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사울 왕의 옷자락을 들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엔게디 굴에서 다윗이 벤 왕의 옷 조각은, 다윗이 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의 표가 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세운 자를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신앙의 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 한조각의 옷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표, 즉 흔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섬김의 흔적이 있습니까? 섬기려 오신 주님이 우리를 섬겨주셨듯이, 우리도 동일하게 남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무릎 꿇고 섬기다가 무릎에 구둥살이 박혀도, 이것이 예수님의 흔적인줄 알아 계속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부엌에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다가, 손에 습진이 생기고, 뼈마디가 욱신욱신 아프면, 예수의 흔적으로 알고 그것까지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욥바의 다비다라는 여 제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 여자가 죽었습니다. 그 시체를 씻어서 다락방에 눕혀 놓고, 근처에 있던 베드로를 초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해서 그 다락방에 올라가니, 많은 과부들이 베드로 옆에 서서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비다로부터 선물 받은, 속옷과 겉옷들을 베드로에게 보이면서, 이렇게 착한 사람이고 남을 도와주는데 앞장선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을 다 내 보내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했더니, 다비다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온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다비다 주위에 있던 많은 과부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속옷과 겉옷을 보이면서 울었던 것은, 이 옷가지들은 우리를 사랑하고 섬긴 다비다의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옷들은 다비다가 고와와 과부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랑의 흔적이요 섬김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다는 흔적이 있습니까? ...

 

저는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교회는 방 두 칸을 합쳐서 예배당을 만들었습니다. 부흥이 되어서 예배당을 새로 짓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부터 몇 개월 동안, 저녁마다 모여서 흙벽돌을 찍어 냈습니다. 찰흙을 파오고 짚을 쓸어 넣고, 물하고 이겨서, 한 장 한 장 찍었는데, 40평짜리 예배당을 지으려면 몇 장이나 들어가겠습니까? 그것을 고등학교 때 저녁마다 11-12시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말려서 비가 안 맞게 잘 보관해야 하는데, 그만 비를 마치는 바람에 수 백장을 못 쓰게 되었습니다. 낙심한 우리는 그러면 시멘트 블록으로 짓자고 해서, 그것을 사다가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거 하면서 손에는 물집이 다 생기고, 온 몸에 근육통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시간과 몸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바보 청년’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1972년 1월 17일에 태어났습니다. 1991년 재수를 해서 고려대 의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본과 4학년 때는 유급을 한 번 했습니다. 이 청년을 공부보다는 늘 신앙이 우선이었습니다. 재수를 할 때에도, 의대에 진학을 해서도, 시험을 앞둔 전날에도 예배를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병원 일을 하면서도 주일을 지키려고, 동료들과 시간을 바꾸어 가며 야간 당직을 서기 일쑤였습니다.

 

의약분업 사태로 의사들이 파업을 할 때, 그는 왕따를 당하면서 끝까지 병원을 지켰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자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의사는 환자들에게 따뜻했고, 동료들에게는 친절했습니다. 청년 의사 그의 이름은 안수현, 누구는 그를 ‘바보’라 불렀습니다. 자기 것을 너무 챙길 줄 모른다는 의미에서 이런 별명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돈과 시간의 대부분을, 남을 위해 썼습니다. 돈이 없어 검사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할아버지의 검사비를 대신 내 주고, 후배들이 급하다고 하면 자기가 직접 후배의 운전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2003년 28사단 사단의무대 군의관으로 입대한 청년의사는, 이제 막 의사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젊은 의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이 33세, 2006년 1월 5일에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어 사망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장로이며 권사이신 그의 부모님은 하나님께 수백, 수천 번 질문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젊고 유망한 내 아들을 데려가신 뜻이 무엇입니까? 그 날 장례식장에는 한경직 목사님의 장례식 다음으로 많은 조문객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4천여 명이 장례식장에 참석하여 애도했는데, 그 중에는 의사들, 간호사들, 병원직원들, 교회선후배들, 군인들, 병원 청소하시는 분, 식당아줌마, 매점 앞에서 구두 닦는 분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안수현 형제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칭찬이 자자하며, 그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다 감동을 받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그는 예수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를 설명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에게 베풀고 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음속에 예수의 흔적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한 가지 예를 듦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진충씨’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진충씨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이 사람이 자기의 여행을 다 마칠 때 즈음에, 이런 간증을 합니다. “나는 나의 상처와 흔적을, 주님을 사랑한 증거로서, 나에게 상급을 주실 그 분 앞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우리교회의 모든 성도들도 주님을 사랑한 증거로서, 예수의 흔적을 가지시고, 그것을 상 주실 주님 앞까지 가지고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더 묻습니다. 여러분은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로, 여러분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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