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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고 물 주어 자라게 하심 (고린도전서 3:1-8)
이정현 목사 2015-12-06 추천 0 댓글 0 조회 655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당시에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후 50년 가을에 고린도에 도착하였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지시를 따라 1년 6개월 동안 여기에 머물면서 하나님 진리의 도, 십자가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고린도는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대도시였으며, 아가야 주라는 로마의 행정구역의 수도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이 고린도는 여행자들과 상인들이 모여 사는 교통 중심지였고, 아가야 지방을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가장 전략적인 지역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곳에 왔을 때는 자유인이 25만 명, 노예들이 40만 명이 사는 헬라 남부의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는 적어도12개 이상의 신전이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신전은 고린도 앞산 꼭대기에 위치한 사랑의 여신 아데미 신전이었습니다. 이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만 10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음란과 방탕이 만연된 도시였습니다. 이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1년 6개월을 고린도에 유하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 지역에서 1년 6개월 동안의 선교사역을 마친 바울은, 아시아로 떠나게 되었고, 그 이후 고린도교회에는 아볼로가 후임으로 부임하여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고린도 교회는, 그 동안 약 2,000년 가까이 내려오면서, 교회를 섬긴 교역자들의 이름을 동판에 새겨 예배당 정문에 붙여 놓았습니다. 그 첫 번째가 성 바울이고, 두 번째가 아폴로니우스, 즉 아볼로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떠나 온 후, 3차 전도여행 때, 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에베소에서 ad 53년 말에 고린도전서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처음으로 고린도에 도착하여 교회를 세운 이후, 3년의 시간이 경과한 후 이 편지를 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의 신앙이 그때까지도 성장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신앙이 당연히 성장 성숙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은 자라지 못하고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에 머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장 서두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을 육신에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fleshly or carnal)란, 생활의 원리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는 믿지만,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 그 신앙이 유치하고 초보적이며 육신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나오는 ‘육에 속한 사람’하고는 다른 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곧 자연인(the natural man)을 말하는 것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은 이 사람 즉 자연인을 벌게이트(Vulgate)에서는 ‘동물적 사람’(Animalis autem)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그것은 거듭나지 않은, 본능적으로 사는 동물적 사람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육에 속한 사람’은 자연인으로 믿지 않는 자를 말하고, 본문의 ‘육신에 속한 자’는 믿는자이기는 하지만, 아직 신앙이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다고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신자인데, 그 사람의 삶의 행동 원리가 영적이 아니라 육적이라는 말입니다.?육신의 욕망과 이해를 따라서 거동하는 것입니다.?이런 신자들을 아무리 연조가 오래 되어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은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무러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육신에 속한 자’를, 고린도교인들로 본 것입니다. 이들은 1절 초반부에 나오는 ‘신령한 자들’하고는 큰 차이가 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자들은, 자연인처럼 불신자가 아니고, 또한 ‘육신에 속한 자’처럼 믿는다고는 하지만, 육신적 원리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그는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영적 원리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학자 핫지(Hodge)는, 이를 ‘성령이 그 안에 내재하시는 사람’이라 하였고, 플루머(Plummer)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

그러고 보면 고린도전서 2-3장에서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세 종류로 나누면서, 너희는 지금 불신자는 아니고,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도 어린아이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제 성장하여 신령한 사람이 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금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한지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성숙하지 못하고 어린아이 신앙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쯤이면 신령한 사람,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신앙의 초보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가 밥을 못 먹고 젖만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밥은 단단한 식물을 말하고, 교리적인 실천을 말하고, 권면과 책망과 죄를 지적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영적인 사람, 신앙이 성장한 사람은 어려운 말씀도 듣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신앙을 교정해 주는 말씀이라도 아멘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러나 육적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냥 좋은 말만 듣기를 좋아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먹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가려워하는 부분을 긁어주고, 위로와 격려의 말이나, 복 받으라는 말이나, 사업이 번창하고, 자식들이 승승장구하고 오래오래 살 것이라고 말하는 것만 듣기를 좋아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의무에 관하여 말하면 귀를 막고, 그 의무를 다했을 때 따르는 복에 관해서만 듣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 5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본문 2절에도,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지금은 마땅히 성장하여 단단한 음식도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성장하지 못하여 아직 젖이나 죽만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밥은 너희가 지금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어느 집사님 댁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고린도전서 10장에 있는 말씀을 읽고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의 인생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세우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이 말씀을 드렸는데,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이분은 미국까지 가서 공부하고 오신 분이십니다. 학원의 영어 강사입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하셨습니다. 연세도 지긋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자기가 교회를 나갈 수 없는 이유에 관하여 말하기를, ‘목사님이 우리 집에 심방으로 오셔서, 자기들보고 교회의 거치는 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유익도 못되고 거치는 자인데, 교회에 나갈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안 나오고 있습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이 연약한 사람은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깊은 진리의 말씀을 영적 양식으로 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그러면, 목사가 내 죄를 지적했다고 하며,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장하지 못한 사람, 성숙하지 못한 사람, 영적이 아닌 사람은,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없고 다만 젖만 먹는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또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며는, 시기와 분쟁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3). 

 

시기는 질투의 일종인데, 어리석은 자를 멸하고(욥 5:2), 자기 건강을 해친다(잠 14:30)고 했습니다. 아가서에서는,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게 불같이 일어난다.’(아 8:6)고 했는데, 이 말은, 질투나 시기가 인간관계를 얼마나 저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바울은, 시기를 대 죄목 속에 넣어서 말하고(갈 5:19-21) 있고, 본문에서 시기는 분쟁의 원인이 되며, 당파심을 일으키는 것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고전 3:3, 고후 12:20).

 

그리고 이어서 나온 분쟁은, 의견대립으로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합니다. 시기심에서 서로 다투는 일이 벌어지고, 이 분쟁에서 결국 네파 내파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와 분쟁이 원인이 되어서 당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시기와 분쟁 자체도 나쁜 것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더 나쁜 죄악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신앙의 소유자들에게는 시기와 분쟁이 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여러 파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4). 

 

결국 시기와 분쟁은 파를 나누어, 교회를 망치는 악하고 무서운 요소들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과 순종의 마음 즉, 자기를 낮추는 비하의 마음(빌 2:5-8)인데, 이런 마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시기와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기와 분쟁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라’(3)고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였던 당파 문제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해결하여 줍니다. “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 너희들에게 복음을 심고 가르쳐 준 사역자들이다. 복음을 심는 이나 물주어 가꾸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꾼일 뿐이지, 그것을 통하여 너희들의 신앙을 자라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대학생들을 데리고 충청북도 괴산이란 곳에 가서, 그곳에 있는 작은 교회의 여름 성경학교를 도와주었답니다. 그런데 그 동네의 청년들이, 서울에서 온 대학생들에게 시비를 걸면서, 방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이 하루 저녁 동네 청년들을 불러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변화된 이야기를 한 20여분 동안 했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던 청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청년 한명이 앞으로 나와서 회개를 했습니다. 또 한명이 나와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 날 저녁 14명의 청년들이 한명씩 한명 씩 나와서 회개를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열정적인 설교를 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초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앞으로 나와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그 목사님은 그들과 일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말씀을 가르쳤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많이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렇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믿음이 자라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     

그러므로 너희들이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누구를 중심으로 파를 이루어 신앙생활 하는 것은 옳지 않고,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구절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같은 인간 사역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상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상급의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상급은 각각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공동으로 수상된다거나 단체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받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각 기관들이 있고, 내가 이들 기관에 속해 있다고 해도, 이들이 함께 상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상급은 개별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급은 각자가 일하는 대로 받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귀하고 좋은 은사를 받았다할지라도, 일하지 않은 사람은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상급은 각각 자기가 일한대로 받는 것입니다. 

 

의사가 맹장 수술을 합니다. 자기 혼자 하는 것 아니고, 다른 의사들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한 간호사들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칼로 배를 갈라서 맹장을 때 냅니다. 그리고 봉합을 합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사람의 병을 치료하시고, 건강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 의사는 째고 짤라 내고 꿰메기는 하지만, 그 사람의 아픈 부위를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의사는 자기의 은사를 따라 그 기능을 발휘했을 뿐입니다. 수술이 잘 끝나면 그 의사와 간호사들은 분명히 병원으로부터 적당한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의사와 간호사는 자기의 은사를 따라 각각 일했을 뿐인데, 그래도 수고했다고 보상을 받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병을 직접 치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아볼로는 복음을 심고 가꿈으로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상을 받을 것이지만, 실제로 그 복음이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의 시선을, 자기들에게서 자꾸 하나님에게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분파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분파는 시기와 분쟁에서 오며, 시기와 분쟁은 성숙하지 못한 신앙, 어리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온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성숙한 신앙자인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2015년도 1년이 다 지나가는데,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작년도 신앙의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1년이 지나면 그 키와 지혜가 자라가야 하는데, 자라지 않는다면 그 부모들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제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은 어른이면서 아직도 귀저기차고 젖병이나 빨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신앙의 연조는 오래 되었는데, 아직도 시기하고 분쟁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직분은 권찰이고 집사고 교사고 권사고 장로이고 목사인데, 아직도 육신의 원리를 따라서 이해타산만 따지고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은 마땅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어, 나는 누구파다, 나는 누가 좋다, 누구와 같이 일하겠다, 반대로 나는 누구는 마음에 안 드니까, 누구와 같이는 절대로 일 안하겠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하고, 아직도 애기들처럼 우유나 마시면 되겠습니까?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자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나, 이런 것을 통하여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예배에 전심전력하시고, 성령 충만을 위해서 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이 되시고, 신령한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동물처럼 살아가는 자연인에게, 복음을 전하여 저들을 구원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볼로처럼 물을 주어 가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은혜로운 간증을 나눔으로 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은, 이 일에 열심인 사역자들에게 상을 줄 것이며, 아울러 그들의 믿음을 자라나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 말씀을 듣고 구원 받는 사람이 생겨나고,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받고 물을 공급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생각도 자라가고, 그들의 가치관도 자라가고, 인생의 목표도 멋지게 자라가고, 믿음도 큰 믿음으로 자라가고, 말과 행동이 더욱더 성숙해지고, 단단한 말씀도 잘 먹고 소화할 수 있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더욱더 자라가는 신령한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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