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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무엇에 비유할까? (누가복음 7:31-32)
이정현 목사 2016-01-31 추천 0 댓글 0 조회 567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구약 성경 말라기 3장에 예언된 자로서 이 세상에 온 자인데, 모든 선지자들보다 훌륭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여자가 난 자 중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백성들과 세리와 죄인들이 그에게 나와서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메시지를 듣고 유대인들은 더욱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증언과, 그 밖의 성경을 통해 볼 때, 분명 세례요한은 훌륭한 인물로서, 그 사명을 헌신적으로 감당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세례요한을 인정하시고 칭찬하신 후에 이제는 이 세대의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 말씀인데, 주님은 이것을 하나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것을 말씀하신 근본적인 이유와 목적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그렇게도 복음을 외치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그 메시지를 너무 무관심하게 무감각적으로 무반응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책망하시면서, 이 세대 사람들의 특징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물론 이 세대의 사람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중, 종교 지도자들을 주로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만 국한 시킬 수 없는 것은, 이 진리가 한 시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걸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주님의 말씀이자, 복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2000년 전 유대인들을 위한 말씀임과 동시에, 곧 우리 시대를 위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실 정도로 많은 비유로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는 ‘비슷한 것을 옆에 두고 그것을 설명함으로, 본질적인 것을 드러내기 위한 교육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본질적인 것을 그대로 설명하면, 어려워서 들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쉬우면서 합당한 일상적인 것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천국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사람들에게는 이 개념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추상적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신비한 곳이라서 그것을 고지 고대로 설명하면 어려우니까, 천국과 가장 비슷한 것을 옆에 두고 설명함으로, 본질적인 천국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린다.’(마13:47-48) 이 비유를 통하여, 세상 끝 날에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천국에 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뜨거운 불 못에 던져버린다는 본질적인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이 세대 사람들의 특징에 관하여, 한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비유가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것은 한 마디로 아이들의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입니다. 이 놀이를 장터에서 했다고 말합니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집안이나 다른 놀이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시장이 열리지 않은 날 장터는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아이들은, 이 장터에서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결혼식 놀이나 장례식 놀이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옛날 아이들이 요즘 아이들보다 조숙했던 모양입니다. 인생의 가장 큰 중대사가 결혼식과 장례식인데, 그것을 모방해서 놀이를 했으니, 얼마나 조숙한 아이들입니까? 아이들이 처음에는 결혼식 놀이를 하며 피리를 불었습니다. 그러면 곁에 있던 아이들이 춤을 추며 즐겁게 놀아야 되는데, 한 사람도 호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피리를 불면 마땅히 춤을 추며, 기뻐하며 같이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 가서도 춤을 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아이들 가운데도 그런 아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장례식 놀이를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자, 침울한 분위기에는 장례식 놀이가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여, 장례식 놀이로 바꾸었을 것입니다. 한 친구가 열심히 울면서 곡을 했는데, 이번에도 상을 당한 것처럼 가슴을 치며 우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은, 그 때에도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어야 하고, 곡을 하면 가슴을 치면서 울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이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고, 곡을 해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피리를 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요, ‘춤을 추지 않았다’는 것은,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곡했다’는 것은, 다가오는 심판에 대한 세례요한의 설교를 말하고, ‘울지 않았다’는 것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국 두 사람에게 다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대 사람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주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하늘나라를 전파하셨으면, 이 기쁜 소식을 전하였으면, 응당 그들은 거기에 반응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주로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에 관심조차 기울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이 오셔서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표현은, 주님에 대한 모욕적이며 비하적인 발언입니다. 

 

  반대로 세례요한이 와서, 광야에서 떡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며, 검소하게 살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켜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고 했더니, 이들이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귀신이 들렸다.’라고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한 가지 특징이, 어두컴컴한 곳에 쳐 박혀 혼자 중얼중얼하며 지내는 것인데, 저 사람 요한은 이 광야에 처 박혀 시내로 나오지도 않고, 따 떨어진 이상한 옷을 입고 이상한 음식만 먹고,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으니까, 미친 사람 취급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에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을 들으면 웃든지 울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기뻐하지도 않았고, 세례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도, 가슴을 치며 울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피리를 불 때도 반응하지 않았고, 슬피 곡할 때도 무관심한 반응만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듣던지 말씀에 반응을 해야 합니다.

 

  기쁨과 감사와 은혜의 메시지가 전해지거나,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주는 메시지가 전해지면, 거기에 걸 맞는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근데 반응이 없으면 어떻겠어요? 고개를 끄덕끄덕 하든지, 아니면 아멘하든지, 아니면 귀한 말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헌금을 드리든지, 아니면 내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든지... 년 초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우서개 소리로, 설교 시간에 졸지 말라고 하면서, 정 피곤하면 ‘아니지, 그건 아니야’-이렇게 졸지 말고, 또 ‘너나 먹으라’-이런 식으로도 졸지 말고, ‘그렇지요, 아멘입니다.’-이렇게는 졸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든지 아멘이 됨으로, 기왕이면 말씀이 전파될 때,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예)친구 목사가 어느 교회에 주일 오후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성도들이 약 2천명 모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 교회 성도들은 예배 전 30분까지 다 모여서, 기도와 찬송으로 준비를 하더랍니다. 그 날 이 목사님이 설교를 잘 했겠습니까, 못했겠습니까? 설교를 죽 쑤었답니다. 평생 이렇게 많은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게 꿈이었는데, 그 날 설교를 망친 것입니다. 왜 설교를 못했는지 아십니까? 성도들이 한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아멘 아멘 하였기 때문입니다. 무분별하게 의미 없이 너무 자주 아멘 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너무 안하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해야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개하라, 너의 삶을 좀 수정해라, 말씀대로 살아라.’라는 말씀이 전해 질 때도,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이런 설교를 할 때에 우리는,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서, 철저하게 마음을 떧으며 회개하여 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말씀은, 나를 살리고 회복시키려는 의도를 가진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은 주님이 에베소교회에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주님이 먼저 이 교회를 몇 가지 말로 칭찬하셨습니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칭찬의 내용은,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과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는, 에베소 교회가 칭찬을 들을 만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는,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교회가 이단과 악한 자들과 싸우다 보니까, 성도들 사이의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열열이 서로 사랑했는데, 이제 그만 그 사랑을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권면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그 사랑이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그 사랑의 행위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권면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가서 직접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무섭고 두렵고 떨리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말씀 앞에서도 정당한 반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반응은 무조건적인 회개로, 지금 회개로, 철저한 회개로, 의지적인 결단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그 말씀에 따라 수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우리도, 회개하므로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1장(20-2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사람들을 사랑하셨기에 그들에게 가장 많은 이적을 베풀어 주셨으며, 가장 많은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회개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이적이 부족하거나, 말씀이 감동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고,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책임이 이처럼 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두 번씩이나 “화가 있을 진저”라고 책망하셨으며, ‘우상을 섬기는 것을 밥 먹듯이 하고, 죄악의 낙을 즐기는 것을 일상처럼 여기던, 두로와 시돈 사람들보다도 더 악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시며, ‘심판 날에는 너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도덕적으로 아주 문란한 성읍이었으며, 겉으로 보기에도 악한 성읍이라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곳에 살던 사람들보다도, 갈릴리에 살던 사람들이,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었는데도, 그 호의마저도 저버리고 교만하게 행했기에, 가장 무서운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할 것을 강하게 말씀하시는데도, 전혀 무감각하여 회개하지 않는 목이 곧은 백성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 강단에서 ‘사명에 충성해라, 끝까지 충성하고, 죽을 힘을 다해서 봉사하라.’고 할 때, 이 말씀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연히 우리는 그 말씀대로 충성하고 있는 힘을 다해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 중직자 헌신예배가 있었는데, 저는 깜작 놀랬습니다. 오신 강사 목사님께 창피했습니다. 중직자 헌신 예배니까, 집사인 내가 갈 필요가 뭐 있느냐, 난 직분자도 아닌데 갈 필요가 뭐가 있느냐.-이런 마음으로 참여하지 않으셨는지, 너무 많은 성도들이 미참 했습니다. 중직자들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충성하라, 헌신하라는 말씀이기 때문에, 다 나와서 귀담아 듣고, 충성과 헌신으로 반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반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듣던지 그 말씀에 적당한 반응을 해야 하는데, 반응이 없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신앙이 병들었거나 신앙이 죽은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병들어 그 부분이 무감각하면 반응할 수 없습니다. 신앙이 죽었으면 죽은 것이 어떻게 반응을 하겠습니까? 신앙이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섹스 권력’을 이야기하면 거기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진리,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경건, 거룩, 회개, 교회 부흥, 직분, 헌금에 대하여 말하면, 이런 말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세속적이며 영혼이 타락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이 세대 사람들의 무 반응과 무 감각함을 한탄하시며 이 말씀을 하셨다고 봅니다. 특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오래 믿었다는 유대인들에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오늘날의 기존의 신자들인 우리에게, 오래 믿었다고 하는 묵은 닭들을 향해,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이 말씀을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 BBC에서 만든 ‘지구’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태양이 지구를 비춤으로 인하여, 일어나게 되는 놀라운 변화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태양이 비침으로 인하여 지구에는 얼음이 녹고, 싹이 터서 자라고, 푸른 신록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는 생명력이 넘치는 변화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통해서, 태양 빛에 반응하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구는 자신에게 비추는 태양 빛에 충실히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이후로 지금까지 이 땅은, 하늘의 태양에 충실히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이 지구는, 생명력과 아름다움과 성장과 열매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태양이 지구에 빛을 비추어 생명력을 불어넣어, 살아나고 성장하며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도 그와 같은 목적으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십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셔서 살아나고 성장하며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어두움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태양 빛이 지구에 비취면, 얼음도 녹아내리고, 싹이 터서 올라오고, 쑥쑥 자라나며, 꽃들이 피어나고, 열매를 맺는 반응을 보이는데,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찾아오셔서 빛을 비추시는데, 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까? 구원의 빛, 진리의 빛, 생명의 빛, 희락의 빛을 비추실 때, 종교 지도자들처럼 무반응과 비난으로 반응하지 말고, 우리 소망교회는 거기에 두 손들고 아멘으로 반응하며, 감사 찬송 순종하는 우리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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