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빌립보서4:4-7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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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0월 1일 설교
빌4:4-7,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법
평강이라는 말은 ‘걱정이나 탈이 없음’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평안, 평강, 평화를 뜻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도 전쟁에 많아서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만나는 사람에게 샬롬이라고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밤새 평안히 주무셨습니까?’라고 아침인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여 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도하라고 보내시면서,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복음 10:12).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그것과 같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마음에 금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잇는데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지니고 있는 평강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혼의 내적 평강을 말합니다. 이는 주를 신뢰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평안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라”(사 26:3).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평강을 이런 그림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전쟁 중입니다. 총알이 날아다니고 포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에서 떨어집니다. 모든 것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 한 아기가 어머니 품속에서 쌔근쌔근 잠을 자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평강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고 상상을 뛰어넘는 평강입니다. 이 평강은 너무 크고 깊어서 그 높이와 깊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평강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좋은 평강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까? 7절의 첫 단어가 ‘그러므로’인데, 분명 앞의 말씀의 결론이기 때문에, 우리도 앞부분의 말씀에 주의하면 그 답(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4절 5절 6절에 각각 한가지씩이 나옵니다.
그럼 하나님의 평강을 얻는 방법 첫째는 ‘항상 기뻐하라’(4)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의 중심 주제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본다면 바울은 지금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있기 때문입니다.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고 했는데 그것도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이 안에 사람에게 혹시 기뻐하라며 위로할 수는 있겠으나 안에 있는 사람에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 처음이 아닙니다. 무려 4번째입니다. 각장에서 한 번씩은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1장 18절에,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방도로든지 예수님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나는 기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장에서는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3장에서는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1)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참 기쁨을 소유하였고 그것을 충분히 누리고 있기에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반복적으로 더욱더 강조하며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는 기뻐할 수 없어도 십자가의 친구로 행하는 자에게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많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주님 때문에 습관적으로 계속적으로 끝까지 이 기쁨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만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 돌아가셨습니다. 모진 고통과 수모와 멸시를 다 당하셨습니다. 양손 양발에 대못을 받으시고 머리에는 가시채를 쓰심으로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흘려주셨습니다. 그 피가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발을 적시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늘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나와서 경배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천국을 유업으로 이을 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기쁘지 않습니까? 바로 이 기쁨을 주님 때문에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이 기쁨은 환경을 초월한 전천후 기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기쁨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다르다. 불행 속에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밖이 아무리 어두워도 속으로는 항상 기뻐하는 자이다.’
C. S. 루이스가 우리가 천국에 갓을 때 그곳 문지기가 묻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앎으로서 참을 수 없는 기쁨을 잦고 있는가?’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다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칠 것입니다.
둘째는 ‘관용을 베풀라’(5)고 하셨습니다.
관용은 너그러움, 불쌍히 여기는 마음, 용서의 뜻이 있습니다. 관용은 기본적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자기도 품어주고 남도 품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장기 중의 위는 모든 음식을 다 포용해 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게 부수고 녹입니다. 그래서 영양분을 만들어 몸의 구석구석으로 보내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산은 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품어주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그 품에서 꺼집어 내 줍니다.
위와 산처럼 관용의 사람은 모든 것을 품어주고 결국 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 사람도, 심지어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까지 품어주는 것을 관용이라고 합니다.
이 관용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실 때에 베드로는 만류하며 말고의 귀를 잘랐지만 예수님은 하늘의 천군천사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없애지 않으셨고,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납하여 저들이 하는 죄를 알지 못하니까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에게 적대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관용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주님의 관용을 본받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한 번 틀어지면 그것이 끝까지 가는 사람이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 화해하지 않는 사람들,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관용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남들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는 말은 관용을 특정인에게 한정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관용을 베풀되 성차별하지 말고 인종차별하지 말고 지위차별하지 말고 지식차별하지 말고 하라는 것입니다.
먼저 ‘믿음의 형제들’에게 관용을 베푸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서로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은 한마디로 관용하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말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정작 그들을 용서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남의 죄는 용서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에게 관용을 베풀어 달라고 하면서, 남을 관용하지는 못합니다. 일차적으로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관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가족들’에게 관용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은 이 땅에서 평생 함께 가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면서 지옥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배우자가 그 문에 들어가려고 할 때 오히려 그 문을 지켜야 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마더 테레사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기도하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가족들 사이에도 관용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관용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의 일부분입니다. 다시 말해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면 관용을 베풀고 있는 것입니다. 익나티우스라는 사람이, ‘관용으로 우리가 그들의 형제임을 알게 하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웃들에게 관용을 베풀면, 그들이 우리의 형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 대부분 무엇을 보게 됩니까? 직업, 재산, 학력? 무엇보다 첫째로 보는 것이 그 사람의 성격이랍니다. 성격이 좋은 사람을 고른다는데, 그 성격 중에서 너그러운 성격의 소유자 즉, 관용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혼 상대자로 너그러운 사람을 원한다면 교회에서도 그런 사람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으니 이들을 너그럽게 대하라’고, 용서하라고, 사랑으로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할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셋째는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6-7)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개인적으로 제가 아주 좋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바울은 주님의 교훈하신 것을 본받아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그 외의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 어느 것도 염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염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무 것’이라는 말속에 넣을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 십 가지를 염려하고 걱정하며 사는데, 그런 것들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우리의 염려 중 마땅히 해야 할 염려는 8%라고 합니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을 염려하는 것이 40%이고, 지나간 과거의 일을 염려하는 것이 30%이고, 건강 등 쓸 데 없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12%이고, 염려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것을 염려하는 것이 10%이고 마땅히 염려해야 할 일이 8%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8%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하지 않아도 될 나머지 92%를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매여서 근심걱정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 교인들은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있습니다. 지도자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요, 교회는 여러 가지 비 진리에 노출되어 있지요, 자신들은 박해와 위협 가운데 있지요,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속에 있으니까 근심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과 여건 속에 있던 그 교회를 향하여 바울은 단호히 권면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처지를 잘 알고 계시고 또한 우리를 환란 중에서 지켜주시는 분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알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권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다른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29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0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고전 7:29-32). ...
바울은 염려와 근심 대신에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기도하고 간구하고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염려가 사라지지 않으면 더 열심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범사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간구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하나님,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이 꼬여도 감사하는 것이고, 이해할 수 없어도 감사하고, 이게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도 감사하고, 눈물의 골자기를 걸어도, 어두운 터널로 들어서도, 남편 때문에 속상하고 아이들 때문에 낙심되어도,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고 또한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교인들에게 염려대신에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우리들은 바대로 행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꾸역꾸역 염려하고, 하라는 기도는 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활 속의 염려와 근심걱정이 사라지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바울의 권면을 따라 염려는 어떤 것이든 하지 말고, 대신 기도와 간구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걱정을 중단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평강이 주님 안에서 나를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주안에서 기뻐하고,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염려대신에 기도한다면,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평강을 얻으려면, 우리는 주 안에서 기뻐하고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얼굴은 주님의 광고판입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시기 바랍니다. 관용은 주님을 닮은 행동입니다.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이나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편안한 삶이 아니라 평안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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