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본문] 요한복음1:40-51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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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요1:40-46, 전도, 최고의 이웃사랑
우리나라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섯 가정에 한 집은 반려동물을 키운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반려동물인구가 늘어나니까 거기에 따른 정부의 여러 가지 대책들도 마련이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반려견을 등록해라, 하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된다는 것과, 반려견을 데리고 밖으로 나올 때는 반드시 목줄을 매고, 또 사나운 개는 입마개를 해야 된다는 등등의 규정들이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반려동물인구가 늘어나니까 거기에 따른 사업들도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반려동물의 먹 거리가 입을 거리 놀 거리에 대한 사업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계절 밥상이 생겨났고, 반려동물 보험도 출시가 되었고, 반려동물 털만 청소해 주는 자동청소기가 나왔습니다. 더 나아가서 반려동물 호텔도 생겼고 콘도도 생겼고 수영장도 생겼고 장례식장도 생겼고 이제는 반려동물을 위한 전용화장실과 반려동물을 돌보와주고 함께 놀아주고 시간 맞춰 밥을 챙겨주는 전용인공지능 로봇도 생겼습니다.
반려동물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호주인데 호주는 전체인구보다 반려동물 수가 150%나 더 많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반려동물과 관련한 사업도 성행하고 앞서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호주에서 반려동물 전용화장품이 나왔는데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애완동물과 관련된 영화도 많이 나오고, 책도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의 대표적인 영화가 “옥자”라는 영화이고, 책으로는 “변치 않는 친구 반려동물”, “나의 소중한 가족, 반려동물”, 그리고 “반려동물을 위한 아로마테라피와 약용식물” 등등이 있습니다. 마지막 이 책의 내용은 방향성 약용식물에서 추출한 에센셜 오일이나 약초 추출물로 반려동물과 반려인의 몸과 마음의 균형을 회복시켜 건강을 증진시키는 자연요법을 소개하기 위한 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초에서 나오는 좋은 것을 나도 바르고 반려동물에게도 발라줘서 서로 친분 있게 지내도록 하고 서로 건강을 회복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 모든 것들의 요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동물을 인간화 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말로 반려동물을 가족의 구성원으로 생각하는 인간화(Pet Humanisation)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려동물을 위한 제품을 만들 때도 인간과 똑같이 생각해서 만드는 것이고, 인간과 똑같이 레저 수준을 만들어 주고, 인간과 똑같이 이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인간과 똑같이 그들의 편리를 위한 기계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공장에서 만들어 내는 것처럼, 이제 동물을 위해서도 똑같이 만들어 내서 공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든 책이든 전부 친구니 가족이니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고 실제로는 동물을 딸처럼 생각하거나 아들처럼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즈음은 반려동물을 주일날 교회까지 대리고 와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그 동물 이름으로 헌금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 우리교회의 한 여집사님이 예배를 마치고 마당에서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목사님 오늘 우리 딸도 나와서 같이 예배 드렸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집에는 딸이 없는데 딸이라고 하니까, 제가 놀래서 집사님은 딸이 없잖아요? 그랬더니 자기 허리춤을 열어 보이더니 얘기 제 딸이여요 하면서, 작은 주머니에 담겨져 있는 강아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굉장히 당황하였습니다. 강아지를 사람의 딸로 부르고 있다는 것과, 개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다고 말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알게 모르게 동물을 인간화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물 학대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는 화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 가두어 놓고 동물로서의 야성을 잃게 만들고 목줄매어서 다니고 짖지 못하도록 강제로 수술시키고 임신하지 못하도록 중성화 수술을 합니다. 이것이 일종의 동물학대라는 생각은 안드십니까? 개와 고양이가 밖에서 마음대로 자기들끼리 뛰어 놀며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동물을 인간화 시키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학대 아닌 학대를 하고 있습니다. 동물 학대뿐만 아니라 자기 딸이라고 기르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그 동물을 버리는 것입니다. 최근 6년 간 총 51만7407마리의 반려동물이 버려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매년 8만 여 마리의 동물이 버려진 셈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물 한 마리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자기 가족을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질문하나를 던지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동물에 대한 기독교적인 생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왜 동물을 만드셨을까요? 동물도 인간과 똑같은 가치가 있습니까? 동물을 인간화하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요?
어느 날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세례요한 두 제자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안드레였습니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발견한 안드레는 먼저 자기의 형제인 시몬을 찾아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찾아 간 것이 아니고 자기 형제에게 먼저(아침 일찍) 찾아갔습니다. 자기 형제를 만나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 가운데 메시야에 대하여 자발적으로 제일처음으로 전도한 사람이 안드레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최초로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한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자기 형제에게 단순히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소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복음만 전한 게 아니고 그를 직접 예수께로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귀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오는 것은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모르는 곳을 여행할 때는 반드시 가이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유능한 좋은 가이드가 있으면 여향은 즐겁고 유익한 여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가이드가 누구인줄 아세요? 가장 위대한 가이드, 최고의 가이드는 바로 사람들을 예수께로 데려와서 영생을 얻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안드레에 의해서 나온 베드로를 보고 주님께서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오늘 처음 만나지만 그가 요한의 아들임을 알았고 또한 그의 이름이 시몬인줄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신적인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의 이름을 시몬에서 게바, 즉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다는 것은, 곧 그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과거 하나님이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셨을 때, 그 때부터 하나님과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시겠다는 언약의 관계에 들어갔다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시몬을 게바라고 부르신 것은, 이제부터 주님과 종의 관계, 구원자와 구원을 받은 자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들어갔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세례요한에 의해 예수님을 소개 받은 안드레가 자기 동생 베드로를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의 전도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그분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하면서 믿음은 빛을 끄지 않고 이를 사방에 발산한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의 불을 끄지 않고 자꾸자꾸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전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전도의 효과적인 방법은 먼저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친척들에게, 친구들에게 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도라는 사실을 안드레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먼데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 더 귀하다면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튿날에 예수님께 빌립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주님이 직접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빌립은 그 자리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이 말은 단순히 주님의 뒤를 따라 다니는 정도의 사람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가 되라는 매우 적극적인 요청인 것입니다. 이때부터 빌립은 주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빌립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된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고향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벳새다 고향 사람들이 줄줄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한 고향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세 명이나 나왔으니 벳세다야 말로 지금으로 말하면 명당이지 않습니까?
아무튼 빌립이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제자가 되고 나서, 첫 번째 취한 행동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 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를 우리가 만났는데 그가 곧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합니다. 구약의 메시야가 지금 이곳에 와 계신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빌립이 나다나엘이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임을 염두고 두고 말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특성과 관심을 잘 파악한 빌립이 나다나엘이 공감대를 가질 만한 내용으로 접근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말을 합니다. 나사렛은 천한 동네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런 곳에서는 메시야가 날 수 없다는 얘기인 것입니다. 나다나엘의 입장은 혹시 나사렛에서 훌륭한 군인이나, 유명한 도덕가나, 훌륭한 예술가가 났다면 이해는 될 수 있지만 거룩하신 메시야가 그런 동네에서 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빌립이 이르기를 ‘와서 보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의 부정적인 반응을 듣고 더 이상 다른 말로 응수하지 않고 단순히 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날 수 있다 없다를 가지고 서로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끼리 서로 논쟁하는 것보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발견하려면 그분에게로 데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와서라는 말은 예수께로 가라는 말이고, 보라는 말은 그분에게 주위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빌립의 그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은, 겉보기보다 훨씬 더 훌륭한 인품과 신앙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은, 그의 마음에 교활함이나 거짓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이정도로 칭찬을 받은 사람이니, 그것도 인간의 내면까지 다 알고 계시는 주님의 판단이시니, 나다나엘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를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그는 경건하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칭찬을 들었던 나다나엘이, 자기의 내면을 정확히 꿰뚫어 보신 그 주님에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더 당황했을 것이고 놀랐을 것입니다. 내 인격까지 아시는 분이, 이제는 내가 어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까지 알고 계시다니, 이분은 분명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나다나엘은 더 이상 그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즉시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한때 예수를 약간 경멸했던 나다나엘의 이 고백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출신은 촌뜨기 나사렛 출신인지 몰라도, 예수에게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을 본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 왕이십니다. 나다나엘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한 것이고, 또한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즉, 예수의 신성을 고백했다는 것은 나는 당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또한 그리스도를 통치자로 고백한 것에는 거기에 충성과 순종을 맹세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의미를 담아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들은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앞으로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고 하셨고(50),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구절의 뜻은 앞으로 너희들이 메시야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이 안드레에게 예수님을 소개했더니,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안드레가 즉시로 자기 형제인 베드로에게 전도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빌립을 부르시고, 부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찾아가서 메시야를 전함으로, 그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이 전도한 내용을 보면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는 말로 그리스도를 소개하였고, 안드레는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로, 예수님은 직접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빌립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는 말로 제자들과 형제와 친구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전도한 내용은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전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구약에 예언된 구세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얘기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결론
저는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반려동물 이야기를 한참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반려동물관련 시장이 규모는 2016년에 2조 3천억 원이었는데, 2020년이 되면 적어도 6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돈을 반려동물을 사고 키우고 장례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엄청난 관심과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애완동물을 기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관심 갖고 시간을 드리고 엄청난 물질을 드리는 그 동물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의해 창조함을 받았지만 인간과 동일한 영혼을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동물들에는 각혼이 있는데 그 혼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소멸되지만(전 3:21), 인간의 영혼은 영원불멸하는 것입니다.
또한 노아의 홍수이후 하나님이 동물을 사람의 식물로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 유지를 위하여 얼마든지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도축 자체가 부도덕한 일이거나 잔인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때 사나운 짐승의 공격을 받아서 생명이 위태로워졌을 때 자기의 개가 나서서 피투성이가 되면서까지 싸워서 자기 주인의 생명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이후 3일 동안 산길을 헤매었지만 길을 찾지 못하고 너무 허기진 나머지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그 개를 잡아먹었습니다. 이랬을 때, 개를 잡아먹은 야만인이라고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반려동물에게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으면서, 개나 고양이보다 훨씬 더 가치 있고 소중한 구원 받지 못한 우리의 이웃들에게는 별 관심을 갖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살리는 데는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시간도 투자하지 않습니다. 물질도 드리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애정과 많은 시간과 11조보다 더 많은 돈을 사람이 아닌 동물에 투자하고 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정성과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드려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 시몬 같은 사람, 나다나엘 같은 한 사람만 구원해 내도,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단적으로 과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시간주시고 건강주시고 물질 주신 것이 반려동물 키우라고 주신 것입니까? 주님이, 여러분이 관심 갖고 애지중지 하는 동물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까? 그거 아니잖아요.
어떤 사람은 파지 주워서 팔아서 전도하는 데 쓰잖아요. 자식들에게 용돈 받아서 그것을 쪼개서 쓰레기 봉지 사서 나누어 주며 전도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직장 다니면서 시간을 내서 동타기 전도를 하잖아요. 어떤 사람은 맛있는 것 있으면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잖아요. 일부러 심부름을 해 주면서 전도하고 있잖아요. 우리 주위에는 어렵게 살면서도 시간 내고 물질 드려서 전도하는 사람 많습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반려동물 키우는 돈을 한 달 만 모아서, 불쌍한 이웃들을 한번 도와 보세요. 그것으로 이웃을 전도 하는데 사용해 보세요. 그 돈으로 돈이 없어서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한 번 줘보세요. 그 이야기가 전해지면, 우리 이웃과 우리 동네가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한 영혼에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전도가 최고의 이웃사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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