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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8 - 영광과 감사에 따른 또 다 은혜
이정현 목사 2018-11-18 추천 0 댓글 0 조회 1257
[성경본문] 누가복음17:11-19 개역개정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7:11-19, 영광과 감사에 따른 또 다른 은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갈릴리와 유대를 오가며 진행이 되었습니다. 주로 갈릴리와 갈릴리 주위에서 사역을 하시다가, 가끔씩 유대 지방을 방문하셔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 세 번 정도 유대지역을 방문하셨는데, 본문이 그 마지막 번째 방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님이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경계지역, 또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한 촌을 방문하셨습니다. 어느 마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촌에 들린 목적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마을 변두리에 나환자들이 집단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병 환자들은 마을을 완전히 떠나서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가 없습니다. 마을 주민들로부터 음식을 구걸해서 먹거나, 그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혐오스럽고 신의 저주로 여겼던 나병환자들이지만, 마을에서 떨어진 근처에 살았던 것입니다.

 

옛날 저희 고향에도 가면, 한 산 중턱 마을에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살았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 이 마을 교회를 방문해 본적이 있는데, 고약하고 이상한 냄새가 나서 역겨워서 예배를 잘 못 드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곳 뿐만아니라, 고흥 근처에 위치한 소록도는 섬에다가 나병환자들을 모아 놓고, 집단생활을 하게 했던 곳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마을들이 도처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마을에 들어갔을 때, 10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를 보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높여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주님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분이시고, 많은 이적을 행하셨던 분임을 들었을 것입니다. 많은 병자를 낫게 하시고, 귀신을 추방하셨다는 얘기를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 동네에 들어오셨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기대에 부풀어서 이들은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문둥병자들이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선생과 주인이라는 뜻 외에 권위를 가진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환자들이 주님을 선생님(에피스타타)라고 부른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 가르쳐 주실 수 있는 분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권위 있는 분으로 부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병을 고칠 수 있는 권위자로 인식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겨 달라는 말은,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 하나님의 자비를 부어 달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몸에 육아종이 발생하고, 진물이 나고,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이 썩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체력이 떨어지는 비참한 현실을 들어내 보이면서, 이 같은 우리 위에 하나님의 자비를 부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병을 낫게 해 달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의미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권위자여, 우리의 이 비참한 현실을 보시고, 우리 위에 당신의 자비를 부어 주십시오.’ 저들은 멀리 서서, 이렇게 소리를 높여 주님을 불렀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둥병 환자라 가까이 갈 수는 없었고, 자기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 비참하여 이렇게 멀리 서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으로 절규할 수밖에 없는, 자기들의 비참한 현실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한 섞인 절규를 들었습니다. 14절의 첫 번째 단어는 보시고입니다. 주님은 나병 환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남루한 옷을 뒤집어쓰고 만신창이가 된 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멀리 서서 절규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마음도 보시고 그들의 비참한 외부의 모습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마음을 토하여 절규하는 그들의 음성을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특별히 사회의 소외 계층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십니다. 여자들과 이방인들, 병자와 죄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 분이십니다. 그들의 억압 받는 삶의 모습을 보시고 아십니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아시고 보십니다. 그들의 눈물 흘리는 고통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도, 나병환자들의 처참한 상황을 보시고, 그들의 한이 서린 간청을 들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아시고 보시고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보통 예수님이 환자를 낫게 하시는 방법은,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거나, 환자의 머리에 손을 얹거나, 환자의 손을 잡아 일어 키시거나, 아니면 침을 발라 보게 하시거나, 그것도 아니면 기도해 주시거나, 또는 말씀으로 고쳐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환자가 직접, 예수의 옷이나 몸을 만짐으로 낫게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위의 방법과는 조금 특이합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 몸이 깨끗해졌느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너희 몸이 깨끗해 졌느니라는 말과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은 상관이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고하니, 나병환자들이 깨끗해 졌을 때,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서, 완치가 된 것을 검증받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이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다라는 판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동시에 이 사람이 문둥병에서 깨끗이 나았다라고 완치 판정을 해 주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나병환자는 제사장에게 반드시 한 번은 가야하고, 발병이후 두 번째 제사장을 찾는 것은 거의 어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나병은 불치병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환자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이 나았음을 검증 받으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다가 나음을 받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기들 몸의 변화가 없이 여전하였습니다. 감각도 없고 고름이 흐르는 여전히 비천한 몸이었습니다. 그저 주님의 말씀만 믿고 가는데, 가다가보니 어느 순간 자기들의 몸이 깨끗해 진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낫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피부가 여전해졌습니다. 살점이 생기고 눈썹도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의 몸에 예전과 같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나병은 지금은 나을 수 있는 병이지만 당시는 불치의 병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의사에 의해 나병이 고침 받은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의 의술로는 불가능한 병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와 이런 은혜와 이런 감격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말씀하십니다. 10명 중에 1사람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잡종취급을 당하고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호와께 영광을 돌립니다.’ 작은 소리로 말할 수 없지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여기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는 말은, 한 번만 영광을 돌리고 돌아왔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돌아오는 내내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여기 엎드리어라는 말은, ‘자기의 얼굴을 떨어뜨렸다.’는 말인데, 어떤 사람 앞에 자기의 얼굴을 떨어뜨려 땅에 대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극도의 존경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를 치료해 준 예수님에게, 극도의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때의 감사도 계속하여 영광을 돌린 것처럼, 계속적인 감사였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한 사람의 감사를 받으신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10사람이 다 깨끗함 받은 것을 아셨습니다. 10명이 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간청했고, 그 기도의 응답으로, 주님이 그들을 다 긍휼히 여기사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10명 다 감사하러 와야 하는데, 9명이나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는 말씀을 볼 때, 9명은 유대인이었다고 봅니다. 9명의 유대인들은 자기 몸의 나병이 나았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고, 주님에게 찾아와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큰 은혜를 입은자가, 감사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비율로 보면 1:9입니다. 이들이 은혜 입은 것을 돈으로 계산 할 수 있을까요? 나병에서 깨끗이 치료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기 몸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땡잡았다.’ ‘운수가 좋았다.’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다.’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홉은 은혜와 복과 사랑과 기적을 베풀어 주신 분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자기를 낫게 해 주신 분에게는 관심이 없고, 그져 자기 몸이 나은 것만으로 좋아했던 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병 나은 것만을 좋아하지, 누가 낫게 하셨는지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의 손에 들려있는 선물만 보고 즐거워하지, 누가 이 선물을 주셨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치유가 중요한지 치유자가 중요한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을 낫게 해 주신 주님을 잊어버리고, 감사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 몸을 깨끗케 하신 분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주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선물 때문이 아니라, 치유의 선물을 주신 분에게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 분에게 진실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몸과 마음을 다하는 감사입니다.

  

주님은 이제, 자기 앞에 엎드려 감사하는 그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에게도 하셨고(8),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1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심으로, 그 사람의 영혼이 구원 받았음을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도 나음을 받았고, 영혼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영육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병든 육신만 건강해져도 좋은 일인데, 죽을 영혼까지 구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엎드려 감사하고 또 감사를 했더니, 또 다른 은혜, 너무너무 귀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9명은 육체는 건강해졌지만, 그 영혼이 구원 받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건강만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영적인 만족은 얻지를 못하였습니다. 결국 이 땅만 바라보다가, 슬픈 인생으로 그 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결론

나는 10명 중 어떤 사람입니까?

 

9명은 똑같이 은혜와 복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감사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과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받은 사람이지만, 전혀 감사하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다수가 이런 사람에게 속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90%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 은혜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이번 추수 감사절에도, 9명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까? 건강을 주시고,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일하고 벌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주시고, 가정을 주시고, 많은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 주시고, 말씀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시고, 하나님을 좀 더 알아감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9명처럼 은혜와 복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잊고 감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반면에, 멸시와 천대를 받던 한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무릎 꿇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는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았습니다. 이것이 누구로부터 온 선물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사와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입술로 마음으로 몸으로, 진실 되게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제사장에게 자기의 몸을 보이는 것보다, 자기 가족들에게 뛰어가는 것보다, 먼저 그는 주님께 달려와 감사와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비록 한 사람이지만, 10%밖에 되지 않지만, 주님은 이런 자를 기뻐하시고, 인정하시고,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1:9가운데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기를 원하십니까?

 

강준민 목사님이 쓴, “감사는 숲을 담은 씨앗입니다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면 행복이 우리 곁을 떠납니다. 하지만 감사하면 우리 곁을 떠났던 행복이 다시 찾아옵니다. 감사는 축복을 끌어오는 자석과 같습니다. 감사하면 복이 임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감사하면 불행은 멈추고, 형통은 연장됩니다. 감사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부디 감사의 사람이 되십시오.’

 

옛날에 사탄이 이 지구에 내려와서 노르웨이에다가 창고를 하나 지었다고 합니다. 사탄의 창고에는 각종 씨앗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씨앗은 미움, 시기, 질투, 눈물, 분노, 험담 등등 이었습니다. 이 씨앗들은 어느 동네 어느 누구에게 가서 뿌려도 싹이 나서 잘 자라는데, 유독 한 동네에서만은 효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의 이름은 감사였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감사했답니다. 이 이야기 때문에 노르웨이에는 이런 속담이 생겼답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앗을 뿌릴 수 없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악한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악한 씨앗들을 뿌리지 못하도록, 항상 감사하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감옥과 수도원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까? 공통점은 고립이라는 것이고 차이점은 불평 아니면 감사하는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근본적인 차이는 단지 불평하느냐 아니면 감사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수감된 죄수가 수도사와 같은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 감옥은 수도원으로 승화될 것이고, 반면에 수도사가 불평의 마음을 가질 때 수도원은 감옥으로 전락할 것이다.”

 

여러분들의 환경이 아무리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사방이 꽉 막혀 있어 고립되어 있다하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하면 그곳이 곧 천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다수는, 아니 10명 중 9명이 원망하고 불평하더라도, 여러분만큼은 본문의 한 사람처럼, 중심으로 영광을 돌리고 엎드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영광과 감사는 또 다른 은혜가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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