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6 -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 | 이정현 목사 | 2018-12-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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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2:22-39절 개역개정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12월 16일, 눅2:22-39,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과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거처 오면서 당대의 강대국들로부터 지배와 억압을 많이 당하였습니다. 히브리민족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애굽의 손아귀에서 고통과 억압의 세월을 430년이나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애굽하여 광야를 거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의 독립국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지파가 동맹하여 살아가는 민족국가로 350년을 보내게 됩니다. 12지파 동맹시대를 흔히 사사시대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 통일왕국 시대 120년을 이어,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북쪽 이스라엘은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남쪽 유다는 135년 이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하고 그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러니까 앗수르가 세계 최강이었을 때는 앗수르의 공격을 받아 억압과 고통을 당하였고 바벨론이 세계 최강이었을 때는 또 그 나라의 침략으로 수난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전쟁에 패하고 세계의 패권을 페르시아가 잡게 되었을 때 역시 이스라엘은 페르시야의 속국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이후 헬라의 알렉산더가 등장하여 페르시야와 전쟁을 하여 승리하자 이스라엘은 자동적으로 헬라의 지배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또 역사는 흘러 로마가 전 세계의 패권을 잡게 되자 이제는 로마의 압제 하에 들어간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후손들, 히브리 민족들,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부터 분열왕국이 망하기 이전까지 약 7-800년을 제외하면 그 외는 전부 다 외세의 침략과 수난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이방나라의 침략과 억압과 수난과 수탈을 당한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 그들이 이런 민족적인 수난 중에서 간절히 열망했던 것이 바로 메시야 대망사상입니다. 외세의 침략과 억압 중에서도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메시야가 오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 메시야가 오시면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이고, 포로에서 자유와 해방을 줄 것이고, 구속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이사야). 이런 모든 일들을 감당하게 되실 메시야가 오신다, 메시야가 오신다고 선지자들은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같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고통과 억압을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되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과 수난 중에도 계속하여 메시야를 대망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도, 메시야를 대망했던 두 사람이 나옵니다. 먼저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성경은 몇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의롭다는 말은 옳다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는 ‘율법을 충실히 준행했다’는 뜻으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구약의 율법을 충실히 지키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제쳐두고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며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삶의 기준 삼아서 바르게 살아온 사람이 시므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건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함’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시므온은 말씀을 따라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볍게 보지 않고, 신전 의식으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살았다는 표현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을 중세시대 가톨릭에서 영성이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여서, 지금도 이 경건을 많은 개신교 사람들조차도 영성이라는 말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영성을 원래의 의미인 경건이라는 말로 사용하려고 애를 썼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영성보다 경건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봅니다. 단어 하나도 가급적 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되살려 시므온처럼 말씀과 기도로 경건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시므온은 즉시로 저 아기가 곧 메시야임을 알아봅니다. 자기가 그렇게 기다리던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신줄 알았습니다. 그 아기를 안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이 찬송을 우리는 라틴어로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 즉 시므온의 찬송이라고 부릅니다. 라틴어 원래의 뜻은 앞의 글인 ‘주재여 이제는’이라는 말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은 이미 ‘그리스도를 보지 아니하고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26). 이제 그 지시대로 내가 메시야를 목도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종을 평안히 죽게 하십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 질 것인데, 그 구원을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이루실 분이기도 하지만, 구원 그 자체로 보아도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구원을 현재 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구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구원은 만민을 위해 예비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메시야는 만민을 위해 예비 된 구원이시고, 또한 이방인들의 빛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구원은 이스라엘에게서 났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인에게 널리널리 전파되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앞으로 이 아기가 자라서 이방인과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으로 인하여, 즉 그리스도가 패함과 흥함의 표적으로 인하여 많은 비방과 고난을 받게 될 것인데, 그것 때문에 결국 마리아는 칼이 자기 마음을 찌르듯 고통과 아픔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마리아는 아들 그리스도가 당하는 고통과 죽음으로 인하여 자기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Mater Dolorosa’, 즉 ‘슬픔의 어머니’라는 예언의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메시야, 구원자, 우리의 위로자를 만나야 합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나이가 많도록 메시야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그 이스라엘의 위로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사람들의 흥망성쇠의 기준이 되실 분을 만났습니다. 오래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지 못하고 오래 사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메시야로 만나고 오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야를 만나기만 하면, 오래 살든 단명 하던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젊을 때 죽으면 우리 생각에는 참 안됐다고 보지만 그 사람은 오래 산 사람보다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더 오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도 복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어떻게 했습니까?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사람들에게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만민을 위한 구원자이시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시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시다. 흥함과 패함의 기준이시다. 메시야를 만나서 그 메시야를 사람들에게 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자들에게 메시야를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 메시야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우리 역시 메시야를 만났다면 이제 그분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기쁘다 구주오셨다고 전해야 하겠습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성탄절이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자 예수, 우리의 구원자 예수,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 예수가 이 땅에 오셨다고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우리의 위로자로 보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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